'단상 속에서'에 해당되는 글 47건

  1. 2012.08.16 영생에 대한 넌센스
  2. 2012.08.08 오늘날의 면죄부(Indulgence) 형식 1
  3. 2012.08.07 독사(doxa)라는 말에 관한 오남용
  4. 2012.07.26 복음의 텔로스 1
  5. 2012.07.19 설교가 지닌 한계
단상 속에서2012. 8. 16.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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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은 그 기본 개념 자체가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는데 흔히 죽은 자들이 받는 전리품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사실 넌센스다. 죽으면 이미 결격이다. 영생은 믿다 죽으면 받게 되는 보상 정도로 인식되어 있지만, 이 영생은 오직 산 사람들의 생명이다(요일 5:11a). 더욱이 영생은 그 믿음 행위에 대한 증거라고까지 말한다. 그렇다면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생을, 그리고 죽으면 받게 되는 것인 줄 알았던 그 영생을 어떻게 증거로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영생은 “아는 것”이라고 했을 때에(요 17:3) 그것이 가능하다. 즉 “아는 것”이 바로 “믿는 것”의 증거인 동시에 우리가 산 채로 소유하고 있는 생명이다. 한 마디로 영생은 죽은 자들이 아닌 산 사람들이 산 채로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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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 8. 8.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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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센스하지만 과연 Indulgence가 없었어도 종교개혁이 있을 수 있었을까. Indulgence 없이는 종교개혁도, 루터도, 그리고 그의 방대한 저작들도 없었을 것인데, 95개 조항을 문에 박던 1517년으로부터 얼마 안되는 기간 동안 그 다양한 개혁 의제들을 쏟아냈던 걸 감안하면, 95개조의 주 테마를 Indulgence로만 국한하고 있는 것은 그의 눈매 만큼이나 꽤 의도적인 전략이었다. 만약 Indulgence 조항을 95개 중 딱 한 개로만 실었다면, 그 나머지들이 제아무리 주옥같은들 누가 손뼉을 마주쳐주었을까.

또 하나의 넌센스는 오늘날도 Indulgence가 발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루터 시대에는 죽은 불신자들에게 발행했던 것을, 오늘날에는 살아있는 거짓신자들에게 발행된다는 사실, 그 사실만 다르고 거의 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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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10일 美 성공회에서 <게이들 혼인 미사>와 <트랜스젠더 사제 안수> 문제를 투표하여 가결시킨(찬 111, 반 41, 기권 3) 경우도 일종의 Indulgence 아닌가? 그런가 하면 오늘날 예배 도입에 Singing Bowl과 같은 거의 목탁 수준의 소품을 들여오는 경우도 일종의 도구에 관한 Indulgence 아니겠는가? 그러면 과거 세속 악기들이 - 노래의 창법과 작곡도 포함해서 -  예배 악기로 허용되지 않다가 현재는 허용되고 있는 경우는 Indulgence가 아닌가?

그러므로 결국 Indulgence란 진리와 자유에 관한 경계 문제 같지만, 그것은 시간이라는 형식이 그것의 농담(濃淡)을 결정하고 희석하는데 따른 개조된 구원의 형식이 된 셈이다. 그 농도가 탁해질 때 압력이 팽창되어 폭발이 발생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종교)개혁이라고 불러왔다.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누가 너희들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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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 8. 7.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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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δοξα)라는 말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와서 <영광>이라는 말로서 그것이 단지 어떤 빛이라는 뉘앙스 견지에서만 즐겨 사용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 말은 본래 전혀 의미도 생소한, <의견>이라는 뜻으로부터 출발된다. 고대 희랍인들이 동물학을 논하면서 “동물들은 <의견>이 없다”라고 말할 때 이 단어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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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에게는 의견이 정말 없을까? 강아지나 고양이 앞에 생선과 개사료를 놔두면 무엇을 택할까? 당연히 생선을 택할 것이 아닌가? 그래도 의견이 없는 것인가? 여기서 말하는 <의견>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일종의 추론으로부터 나온 상상력을 말한다. 감각에 준거한 즉각적인 택일을 하는 식의 그런 선택으로서 의견이 아니라, 스스로 계산하거나 추론하고 상상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의견을 말한다.

그래서 고대의 희랍인들은 이 독사라는 어휘 속 사고능력을 생각할 때, 사고 그 자체, 그 사고 자신이 추론하고 상상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같다.

다시 말하면 “모든 동물들이 <의견>( δοξα)을 갖는 것은 아니다”라는 정의에 대한 그 근거를 피력할 때,

동물들은 추론으로부터 나온 상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반면 추론은 상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De Anima>

라고 해제를 내리고 있는 것은 그와 같은 독사(δοξα)의 구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반면에 추론은 상상을 필요로 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어떻게 “동물”과 “추론”이 댓구가 될 수 있는가? 전자는 생물이고 후자는 생물이 아닌데?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정신으로서 <독사> 그 자신이 그렇게 추론하고 상상을 하면서 <의견>을 개진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신체의 구속을 벗어나는 정신의 단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일종의 육체의 감각 추구와 합목된 그런 <의견>과는 완전하게 분리된 추론능력으로서 <의견>을 말하며 곧, 그 스스로 추론하고 상상하여 견해를 내리는 판단 양식으로서 <의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심판>의 양식인 셈이다.

즉 다시 말해서 <영광>에서 뉘앙스 짓는 그 빛은 어디에서 비롯된 빛의 기운인가 라고 그 출처를 따져볼 때에 그것은 전적으로 <심판>으로서 <의견>에서 도출되는 빛의 형식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 인기인이 받는 따위의 - 그런 빛의 형식과는 판이한 것이다. 이것이 독사의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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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 현대적 그리스도인은 <심판>을 전혀 두려워하지도 않지만 전혀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그 <영광>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 위선적 관념 속에 이 독사에 대한 오남용의 일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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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 7. 26.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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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율법의 <텔로스>가 되셨다”고 하는 롬 10:4의 <텔로스>는 “완전히 끝났다”고 하는 의미와 “완성이 되었다”고 하는 두 의미를 지닌 오랜 신학적 논쟁 주제였다. 그런데 율법에 관한 <텔로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복음 또한 현대인들의 입에서 퍼뜨려나갈 때 두 의미 색을 띠는 <텔로스>가 돼 가는 것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서에서 드러낸 <텔로스>의 관성과 역학은 그것이 반드시 “새로움”이라는 주제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새로움이라는 모티프가 없이는 그 어느 곳에서도 <텔로스>가 지닌 진정한 어의는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새로움” 즉 “희망”이라는 주제를 벗어나서는 복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이 종말론이든 무엇이든 “끝장났다”는 식의 - 혹은 끝장날 것이라는 식의 - 전파는 복음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 그것은 끝장이 안날 것이 때문이 아니다. 내일 아니, 지금 당장 이 순간에 그 끝이 임했다 하더라도 희망을 말해야 하는 것이 복음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닌 자들이나 복음을 받아든 자는 숙명적으로 희망으로부터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가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복음 전파자의 특색은 희망을 끼치지 불안을 끼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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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 7. 19.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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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시작된 이후로 줄곧 설교 본문을 성서일과(Common Liturgy)라는 것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평신도들 가운데는 이런 것이 있는 지조차도 모르는 분들이 적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임의 본문을 삼가고 있습니다.

한 주간 속(俗)에 거하다가 지쳐서 교회 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고서 사람의 입 타고 나오는 말을 들려줘야 하는데 그것이 일개 개인 자의로 선택된 것이라면 그것이 과연 얼마나 대언력을 갖출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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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박학다식하고 성서 지식이 남다른 목사라 하더라도 그가 구사하는 언어의 캐시 용량과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비유가 좀 그렇습니다만, 이 세상에 동물들의 종류가 그렇게 많은데 사자나 표범 이런 건 다 빼고서 쥐나 뱀 따위의 십이 간지만 가지고 사람 운수를 진단하는 한계와 같은 것입니다.  

무슨무슨 세미나나 성장 기술에 사로잡힌 사람의 언어 캐시에는 그 어휘들만 들어 있습니다. 2-3주간 읽은 책의 어휘에 그 모든 캐시가 사로잡히는 이치입니다. 우리들의 성도들은 2-3년 전에 써먹은 설교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특정 성도들을 향해 표적 설교를 하는 경우도 지겹도록 보아 왔습니다.

일장일단은 있겠으나 내가 임의로 선택한 본문이 아닌, 철저하게 교회력에 입각한 검증된 본문 위에 설교자 자신도 함께 올라섰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정합성이 몇 갑절은 더 상승된다는 장점이 그 모든 단점을 상쇄하고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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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개신교는 설교라는 도그마로 그 얼마나 성서 위에 군림해 왔는지, 깊은 반성을 해야 할 시점에 오지 않았는가 하는 자성과 함께 하르낙(Adolph von Harnack)의 역작 History of Dogma(1885) 중 한 소절을 떠올려봅니다.

...도그마는 모든 교회의 배경에 있어 왔다. 동방교회는 제의의 공간적 측면을 강조했고, 서방교회는 교권적 측면을, 그리고 개신교회는 복음서 본질을 추구하는 측면에서 그러했지만 역설적인 것은 개신교회들이 가장 후대 멀리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그 이점으로 도그마들을 일시에 제거하는 데 아무런 문제될 게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 와서 그것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직접적으로 말하는 방식의 설교라는 도그마로 치환되어 와 있게 되었다. 카톨릭 교회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르낙은 도그마가 복음을 방해한다는 입장에서 이런 진술을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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