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속에서2012. 8. 28. 06:12

 

저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칼 바르트가 말하는 로마서 주제:

“스스로가 두려워할 줄 알고 희망 걸 줄 앎으로 그 스스로 심판대 아래 엎드리는 자를 구원할 다른 의(義)는 없다. 그는 살 것이다. 그는 이생의 헛됨을 깨닫고 있기에, 썩어가는 가운데 썩지 않을 것에 대한 기대 없이는 결코 가망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에, 참된 삶의 기대 없이는 결코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에, 그는 바로 그 참된 삶의 기대를 가지는 것이다. 그 위대한 가능성이 그에게 그 모든 하찮은 가능성의 끝과 목적을 일러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한결같음이라고 말하든지 사람의 믿음이라고 말하든지 그 둘은 같은 것이다. 예언자의 언어들은 이미 이 쌍방향 포인트를 지적해왔다. 즉, 예언자들의 “No”라는 말들 속에서 도망칠 수 없이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하나님의 한결같으심이다. 하나님 거룩한 그분 한분, 곧 그 모든 나머지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만나게 되는, 그 “No”를 단정하는 이들의 경외심과 또 그 부정 속에서의 공허함(void), 꿈틀거림(move), 지체됨(tarry)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의 경외감 안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믿음”이다. 하나님의 한결같으심(faithfulness)과 사람들의 충실함(fidelity)이 부딪히는 - 부정적 의미의 부딪힘 - 그곳에 그분의 의(義)가 나타나 있다. 그곳이 의인이 사는 곳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의 주제이다.”

이것은 로마서 1:17에 있는 하박국 2:4,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합 2:4)를 칼 바르트가 주석 한 것입니다.

이 문단을 번역하다 보면, 우리가 배워온 칭의론과 많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 바르트의 구원론을 오해들을 해서 각자 따다 붙여 쓰는 것같지만서도-,

우리가 배워온 칭의와 다른 점은 이미 (구원 받을) 그 사람은 준비된 자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심판대 아래 스스로 세팅해 설 줄 알아야 하고, 부패 속에서 썩지 않으려고 하고...etc..., 그런 기대감으로 이미 상당한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예수 이름으로 무조건, 완전 무조건, 구원 받는 교리와 차이를 보이죠? 그러나 칼 바르트의 이 주석은 그런 칭의에 반하는 주석이 아닙니다.

의가 (1) “있다”도 아니고, (2) “나타났다”도 아니고, (3)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1)은 원래부터 완성되어 있는 것을 말하고, (2)는 난데없이 갑자기 나타난 걸 말하고, (3)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바르트의 주장은 (3)항에 해당해 보입니다. 

칼 바르트는 말합니다. 예언자들이 줄기차게 외쳐대는 “No”라는 언어 속에 하나님의 미쁘심, 한결같으심, 충실하심이 있다. ‘이것이 <믿음의 기원>이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지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God the Holy One, the altogether Other.” 라는 댓구를 “하나님 거룩한 그분 한분, 곧 그 모든 나머지인 것이다.”라고 밖에 번역할 수 없었는데, 이 알아듣기 어려운 댓구는, 결국,

 “하나님의 모든 <No>라는 응답은 사실상 단 한 개의 <Yes>인 것이며, 또한 그 모든 <Yes>라는 응답 속에는 <No>라는 단 한 개의 하나님 응답이 들어 있다”

라는 파라독스 속에서 이해될 수 있겠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개별 복합 게시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Unported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Pentalogia
단상 속에서2012. 8. 16. 13:31

 

저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은 자연적 세상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 영혼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어떤 높은 최상의 힘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거나 혹은 인식할 만한 어떤 것이어서 (그 입증에 사람들이) 당혹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은 관측 가능한 어떤 최상위 계층으로서 힘도 아니고 그것들의 합(sum)이거나 원천(fount)도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존재로서 힘입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그 모든 힘의 위기(the KRISIS of all power)입니다.”

일전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지식이 갖는 힘들이 붕괴되었다고 한 저 칼 바르트의 주석을 소개한 것은, 그 지식들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폐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흔히, 교회에서 젊은이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얻으려고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빌 3:8-9)는 말을 오해하게 하는 바람에 그들이 지식 쌓는 노력 자체를 회피하게 만드는 것은 그른 가르침이다. 그들이 지식으로서 힘을 쥐어 보지도 않고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힘의 위기는 우리가 그 지식의 힘을 손에 쥔 후에 배설물과 같이 버렸을 때 비로소 임하는 것이다. 손에 넣지도 못한 것을 어떻게 버렸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개별 복합 게시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Unported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Pentalogia
상상 속에서2012. 7. 14. 13:42

 

저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꿈에 대한 신앙적 진술>

하나님께서 오늘 새벽에 꿈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꿈에서 내가 스케이트를 받아 신고 탑니다. 그러나 앞으로 잘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얼음을 지치는데 날이 미끄러워 잘 지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스케이트 날을 만져보니 각각 반대쪽에는 날이 쓸 만한데..., 신발을 바꿔 신고 있습니다. (신발이 미끄러워 좌우를 바꿔 신어야 하는 것인지 좌우 신발을 바꿔 신어서 미끄러운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 부분에서는 의식이 돌아왔기 때문에.)

<꿈에 대한 신앙적 해석>
// 스포츠 중에 스케이트는 내가 유일하게 잘 할 수 있는 스포츠입니다. 빠르게 달리는 것보다는 아름답게 또는 박력 있게 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아이스하키 또는 피겨 스케이트를 선호합니다.
// 유리한 종목으로 잘 할 수 있지만 결정적으로 날이 미끄러운 것은, 그리고 그것을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속에서 스케이트 신발을 “좌우 바꿔 신었다.”고 확정한 것은 “순서가 바뀌었다”는 계시로 받아들입니다.
// 그 순서가 바뀐 대상은 바로 “기도”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 아무리 잘 하는 종목으로 한다 해도 기도로 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설명: 일어나자 마자 그린 그림. 꿈에는 명확하게 피겨였음. 좌우를 더욱 헷갈리게 하는 그것 피겨]


꿈은 과연 계시인가? 

<심리론>에서는, 꿈은 심리이지 계시일 수 없다. 융이 다소 신적 계시 가능성을 타진했다고는 하지만 신앙인들이 말하는 그 하나님을 염두에 둔 게 아니다. 


계시로서 꿈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고 봐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꿈은 전제의 산물 아니겠는가? 내가 스케이트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스케이트 꿈을 꾸겠으며, 그리고 그 날(blade)에 관한 경험이 없다면 어떻게 무딘 날이 전진하는데 있어 장애인 줄 알겠는가? 심지어 그 경험의 한계를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태고> 시절까지 소급해 확장해놓는다. <태고>의 경험으로도 부족한 전제 영역을 더 나아가 <신의 영역>으로까지 소급하여 열어 놓았던 것. 그것이 바로 융의 신론(神論)이다. (그러므로 신앙적 신 개념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전제로 그려질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전제를 “바꿔 놓으라(바꿔 신으라)”는 파라독스 명령자는 나를 넘어서는 영역이다. 꿈의 재료를 경험했던 “나”가 있다. 꿈을 지어낸 “나”가 따로 또 있다. 이 양자가 자기 나름대로 재료를 구성/재구성 하지만, 그 최종적인 결과물을 깨고 (반대로) 계시하는 계시자(revealer)로서 “나”가 완전히 별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가 ‘둘 이상’이라고 일러 두었던 것이다.

그러면 꿈은 그리스도인만 꾸느냐, 꿈으로 된 그런 계시는 불신자에게는 없느냐. 물론 그들에게도 그런 계시가 있다. (만물 가운데 신성이기에.)

다만, 그 계시가 진리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그 계시가 (자기가 미처 모르는) 무의식에 거치되었다 안되었다로 정합성이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씀을 받은 자인가 아닌가 라는 정점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르트가 말하기를, “제1의적 계시를 예수에,” “제2의적 계시를 성경,” “제3의적 계시를 설교에”인 것이다.

요셉의 꿈은 꿈이기 때문에 계시인 것이 아니라 그 꿈을 통해서 그가 그리스도의 길을 깔았기 때문에 계시인 것이며, 느부갓네살의 꿈도 그것이 그의 꿈일 때에 계시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길을 까는 다니엘이 해석을 내릴 때에 계시가 정립되는 이치라 하겠다.

그래서 이 스케이트 꿈에서 “바꿔 신었다”는 판단이 무의식이었는지 의식이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였다. 어차피 최종 계시로서 판단은 말씀(성경)을 받은 “나”가 하는 것이고, 모든 질료와 형식이 이 말씀으로 재편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꿈을 통한 계시로서 형식이며 여기서 지나는 것은 모두 상상력의 범주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개별 복합 게시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Unported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