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속에서2012. 7. 26.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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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율법의 <텔로스>가 되셨다”고 하는 롬 10:4의 <텔로스>는 “완전히 끝났다”고 하는 의미와 “완성이 되었다”고 하는 두 의미를 지닌 오랜 신학적 논쟁 주제였다. 그런데 율법에 관한 <텔로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복음 또한 현대인들의 입에서 퍼뜨려나갈 때 두 의미 색을 띠는 <텔로스>가 돼 가는 것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서에서 드러낸 <텔로스>의 관성과 역학은 그것이 반드시 “새로움”이라는 주제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새로움이라는 모티프가 없이는 그 어느 곳에서도 <텔로스>가 지닌 진정한 어의는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새로움” 즉 “희망”이라는 주제를 벗어나서는 복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이 종말론이든 무엇이든 “끝장났다”는 식의 - 혹은 끝장날 것이라는 식의 - 전파는 복음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 그것은 끝장이 안날 것이 때문이 아니다. 내일 아니, 지금 당장 이 순간에 그 끝이 임했다 하더라도 희망을 말해야 하는 것이 복음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닌 자들이나 복음을 받아든 자는 숙명적으로 희망으로부터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가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복음 전파자의 특색은 희망을 끼치지 불안을 끼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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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 속에서2012. 5. 29.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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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민중의 아편(das Opium des Volkes)이 될 것인지 아니면 민중의 복음이 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교회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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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4. 1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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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福音, 곧 Good News입니다. 무엇이 좋은가요? 왜 좋은 소식이라고 하는 건가요? 사람들이 좋았기 때문에 기쁘다고 했을 텐데 기쁨이 된 그것은 무엇인가요? 무엇을 기뻐하는 거죠?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은 뭔가 만족을 느낄 때인데 그 만족은 사람일 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고, 혹 무형으로는 명예나 권력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거추장스러워 하는 일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기독교 인식이 부정적인 시기에는 더더욱 복음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복음을 통해 나는 구원을 받겠다고 하면서 그 복음 자체는 부끄러워하는 이율배반적인 퇴행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슬로건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닌데 나는 그런 식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취지에서 우리는 이 슬로건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복음이 갖는 전제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는 “기쁜 소식”이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부끄러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부끄럽다는 것은 아직 그 소식을 못들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바울과 실라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간수가 이들을 데려다가 치료해주고 음식 차려주고 세례 받고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했다고 기록합니다. 무엇이 기뻤을까?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v. 31) 하더니, 정말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구원 받은 확신이 들었기에 기뻤던 것입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인가요? 사람? 물건? 명예? 권력으로의 구원? 

아닙니다. 죄로부터 구원입니다. 즉 복음을 거추장스럽고 부끄러워하는 것은 복음이 누군가에게 전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는 것의 반증입니다. 그것은 또한 “기쁘지 않다” 의 반증입니다. 그리고 기쁘지 않다는 것은 기뻐보지 못한 것의 반증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그는 한번도 구원에 이르러 본 경험이 없다라는 결론에까지 도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각하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미문(美門)교회 수요 예배
2012년 4월 18일 부활절 후 2nd
본문, 행 16: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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