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2. 7. 9.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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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마지막 잎새

워싱턴 광장 옆 그리치니라는 주택가는 집값이 싸 화가 촌이 자리 잡은 곳입니다. 어느 해 겨울 그곳에 폐렴이 나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습니다. 몸 쇠약한 화가 존지도 이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쇠잔한 그녀는 창밖의 담쟁이를 바라보며 그 잎들이 모두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자신의 생명도 꺼져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녀가 겨울을 넘기기 어렵다는 의사의 말을 그녀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친구 수우는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병간호 하느라 의뢰받은 그림을 기간 내에 그릴 수 없던 차 수우는 아래층 화가 노인 베어먼을 모델로 청하면서 그에게 존지 이야기를 건넵니다. 명색만 화가였지 별 볼일 없는 그 노인 역시 병약한 그녀의 망상을 꾸짖습니다.
단풍잎들이 하루하루 떨어져 드디어 마지막 한 개가 남았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병마와 싸우는 마지막 고비의 긴 밤을 넘긴 존지는 다음 날 밖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여전히 한 개만은 지지 않고 있던 것입니다. 곧이어 베어먼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풍잎이 질 것이라고 말한 그날 그가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담벼락에 잎을 그려놓았던 사실도 알게 됩니다.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희망과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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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두 종류의 믿음

반도(半島) 특성상 1,000여 회에 가까운 외세침입을 받아 왔던 우리나라만큼이나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인들 역시 바람 잘 날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크게 다섯 제국으로부터 - 앗수르 제국(지금의 이라크 북쪽지역), 바벨론 제국(이라크 남부), 페르시아(이란), 헬라(희랍 중심), 그리고 로마 제국 - 침탈을 겪습니다.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에 그들이 시도했던 문화 삭제의 잔상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성서적 이스라엘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이 성서만큼 미치지 못하는 현상은 그들의 오랜 침탈 기간을 반증하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역사에서 삭제된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 처했던 그들을 다시 살려낸 건 어디까지나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상황 속에서 믿음은 두 가지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희망’이라는 형식입니다.

패망하여 나라도, 가정도, 성전도 모두 파괴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그 모든 것들이 무산되어 버렸는데도 몇몇은 그 상황을 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당초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약속들이 진정 무엇을 의미했던 것인지를 거듭 묵상하고, 또 그 묵상을 통해 반성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믿음 즉 ‘희망’을 발견하고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둘째는 ‘절망’이라는 형식입니다.

모두가 희망을 선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쇠락해가는 상황을 바라보며 하나, 둘...., 무너져 내리는 낙엽의 개수를 세는 듯한 믿음도 있었습니다. 마치 그 잎새들, 특히 마지막 잎새가 살아남기를 바라는 희망처럼 마음에 깃들지만 명확하게도 그것은 ‘절망’입니다. 저 잎들이 다 떨어져버리고 나면 “난 더 이상 살지 않겠노라.”는 <시한부 신념>을 기저로 갖기 때문입니다. 신념은 체념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시한이 지나면 산화해버리고 맙니다.

셋째, ‘없어지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없어질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깨뜨리거나 부술 수 있는 게 아니며, 녹이거나 불처럼 끌 수 없는 독특한 형식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없어질 것’들은 애당초 믿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에필로그 | 절망이라는 믿음의 형식이 아닌 희망이라는 믿음의 형식으로 

우리나라가 이 시대에 쓰임 받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과 같이 우리 민족의 믿음을 보신 것이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또한 여러 번 없어졌던 나라였는데도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 것은 다 그 믿음의 덕택입니다. 많던 잎사귀들이 하나 둘 떨어져나가듯이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하나, 둘..., 사라져갔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야고보, 다대오,... 바울도 죽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친 믿음이 여전히 우리 속에서 살아 숨 쉽니다. 이 믿음의 형식에서 바로 영생의 개념이 산출된 것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7월 8일 성령강림 후 제6주
본문, 고후 1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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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에서2012. 5. 4.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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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이란 어떤 때에는 사고를 하고 어떤 때에는 사고를 하지 않는 그런 게 아니다. 지성은 그것의 현 상태로부터 분리돼 자유로울 때에 (비로소) 그 자체인 것이지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지성만이 영원하고도 불멸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감각을 지닌 지성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데 반해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곧 수동적인 지성은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지성 없이는 어떠한 사고도 하지 못한다. <Aristotle's De Anima>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통찰은 부활과 영생, 그 모든 불멸하는 삶에 관한 표현에 적용될 수 있다. 문제는 그 진정한 지성이 무엇인가에 달려있다. 뭐가 진리인가.
ἀεὶ γὰρ τιμιώτερον τὸ ποιοῦν τοῦ πάσχοντος καὶ ἡ ἀρχὴ τῆς ὕλης. [τὸ δ' αὐτό ἐστιν ἡ κατ' ἐνέργειαν ἐπιστήμη τῷ πράγματι· ἡ δὲ κατὰ δύναμιν χρόνῳ προτέρα ἐν τῷ ἑνί, ὅλως δὲ οὐδὲ χρόνῳ, ἀλλ' οὐχ ὁτὲ μὲν νοεῖ ὁτὲ δ' οὐ νοεῖ.] χωρισθεὶς δ' ἐστὶ μόνον τοῦθ' ὅπερ ἐστί, καὶ τοῦτο μόνον ἀθάνατον καὶ ἀΐδιον (οὐ μνημονεύομεν δέ, ὅτι τοῦτο μὲν ἀπαθές, ὁ δὲ παθητικὸς νοῦς φθαρτός)· καὶ ἄνευ τούτου οὐθὲν νοεῖ.

Mind is not at one time knowing and at another not. When mind is set free from its present conditions it appears as just what it is and nothing more: this alone is immortal and eternal (we do not, however, remember its former activity because, while mind in this sense is impassible, mind as passive is destructible), and without it nothing thinks. <Aristotle's De Anima 430a: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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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other Version. Tr. by Hicks] But this intellect has no intermittence in it thought. It is, however, only when separated that it is its true self, and this, its essential nature, alone is immortal and eternal. But we do not remember because this is impassive, while the intellect which can be affected is perishable and without this does not think at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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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에서2012. 5. 4. 06:12
(차라리) 영혼이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에 영혼이 스스로를 움직이는 것같은 방식으로 몸을 움직인다고 말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반대로 영혼도 몸의 운동과 같은 종류의 운동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을 것이다. 따라서, 몸은 장소운동을 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도 몸 전체에 따라 또는 부분들에 따라 운동할 것이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육체를 떠났던 영혼이 다시 돌아오는 것 또한 가능할 것이고 죽은 생물들이 부활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ἔτι δ' εἰ μὲν ἄνω κινήσεται, πῦρ ἔσται, εἰ δὲ κάτω, γῆ· τούτων γὰρ τῶν σωμάτων αἱ κινήσεις αὗται· ὁ δ' αὐτὸς λόγος καὶ περὶ τῶν μεταξύ. ἔτι δ' ἐπεὶ φαίνεται κινοῦσα τὸ σῶμα, ταύτας εὔλογον κινεῖν τὰς κινήσεις ἃς καὶ αὐτὴ κινεῖται. εἰ δὲ τοῦτο, καὶ ἀντιστρέψασιν εἰπεῖν ἀληθὲς ὅτι ἣν τὸ σῶμα κινεῖται, ταύτην καὶ αὐτή. τὸ δὲ σῶμα κινεῖται φορᾷ· ὥστε καὶ ἡ ψυχὴ μεταβάλλοι ἂν κατὰ τὸ σῶμα ἢ ὅλη ἢ κατὰ μόρια μεθισταμένη. εἰ δὲ τοῦτ' ἐνδέχεται, καὶ ἐξελθοῦσαν εἰσιέναι πάλιν ἐνδέχοιτ' ἄν· τούτῳ δ' ἕποιτ' ἂν τὸ ἀνίστασθαι τὰ τεθνεῶτα τῶν ζῴω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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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rther, since the soul is observed to originate movement in the body, it is reasonable to suppose that it transmits to the body the movements by which it itself is moved, and so, reversing the order, we may infer from the movements of the body back to similar movements of the soul. Now the body is moved from place to place with movements of locomotion. Hence it would follow that the soul too must in accordance with the body change either its place as a whole or the relative places of its parts. This carries with it the possibility that the soul might even quit its body and re-enter it, and with this would be involved the possibility of a resurrection of animals from the dead. <Aristotle's De Anima 406a:30-406b: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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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4. 16.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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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패션왕

어떤 여성에게 “너, 오늘 입은 옷이나 헤어스타일이 꼭 아무개 따라한 것 같다?” 라고 하면 무척 기분 상해합니다. 누굴 따라 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여학생에게 20여 년 전에 만든 의상을 주며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니 입으라”고 하면 역시 황당해합니다. 요즘 남들이 입는 스타일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전자와는 반대되는 모순된 반응입니다. 인간은 이와 같이 모순과 모방 속에서 자기 패션을 추구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들 자체가 모방을 본성적으로 즐거워하는 동시에, 그 모방을 통해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최고의 목적을 성취해내려는 창조적 욕구를 그 인간 본성으로 갖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즘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패션왕>의 남자 주인공 방에 걸려 있는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라는 말은 코믹해보이지만 이론적으로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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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창조의 모범 예수 

인간은 모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모방을 통해 살아나가는 기술을 습득하고 모방을 통해 세상 원리를 터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방은 부당한 이득을 취하기 위해 값비싼 명품의 모조품을 만드는 모방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세상 원리로서의 모방은, 그 모방의 대상이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갖는 행동을 모방하는 데 주력합니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배우려는 것은 그의 생김새가 아니라 그가 했던 행동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여기서 모방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언제나 일종의 모범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으로서 ‘부활’을 닮고자 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행동들이 일어났습니다.

첫째, 의심입니다(요 20:19-31).

도마가 예수님 손의 못 자국을 보면서 자기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고, 또 자기 손을 그분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도마만 유별나게 의심이 많았던 사람임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가질 수 있는 믿음의 한 형태를 보여주는 대목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믿기는 믿는데 합리적으로 믿기를 좋아합니다. 합리 속에 나만의 기준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찬양을 합니다(시 133, 134, 135).

나만의 기준으로 자리하고 있는 그 의심을 극복했을 때 비로소 송축하라~ 라는 탄성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찬양은 우리 의심을 뚫고 다시 일어나신 주님에 대한 찬양이지 힘 있는 군주로 귀환하는 금의환향자에게 돌리는 찬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망을 고난과 인내로 이기신 모범 행위로서 가치가 바로 진정한 부활가치입니다. 

셋째, 나눔입니다(행 4:32-35).

그와 같은 찬양을 한 사람들에게 반드시 일어나는 또 하나의 행동이 있습니다. 바로 나눔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 부활·승천 이후 교회가 어떤 사역에 임했는지를 기록합니다. 병 고치는 능력과 갖가지 이적 외에도 그들은 ‘나눔’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빈민구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행동의 본질을 이해하게 됨으로 그분의 행동을 똑같이 함께 나누는 그것, 그것이 바로 나눔의 본질입니다. 또한 그것이 부활 최상의 모방이기도 합니다.


에필로그 | 당신은 뭘 모방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뭔가를 합니다. 안할 수 없기 때문에도 하지만, 하지 않아도 될 것도 하고, 하고 싶은 것도 합니다. 한시도 그냥 있지를 않고 계속 뭔가를 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모방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며, 예수님의 부활 같은 최상의 창조 행위 닮기를 통해 그 창조를 완성코자 하는 (하나님 심어주신) 본성에 기인해서 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2012년 4월 15일 부활 후 제2주
본문, 요한일서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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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4. 14.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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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늑대소녀

1920년 10월 인도에서 한 목사 부부가 아말라(2세)와 카말(8)이라는 두 여자 아이를 늑대 굴에서 구출하여 양육한 일이 있습니다. 발견될 당시 이 아이들은 모습만 사람이었지 행동은 완전히 늑대였다고 합니다. 두 부부의 헌신적인 노력 끝에 이들은 서서히 걷기를 배웠고, 울부짖는 소리 대신 말을 배웠고, 어둠을 싫어하고 빚을 찾게 되었으며, 날것이 아닌 익은 음식을 좋아하게 되었고, 사람들에게 정도 느껴 의지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아말라는 아이는 이미 1년 이내에 죽었고 카말라는 그로부터 9년 후에 죽게 됩니다. 두 손으로 그릇 잡는데 1년 반, 꼿꼿이 설 수 있는데 1년 반, 그리고 5-6세 수준의 언어가 죽기 전까지 9년 동안 배운 전부였습니다. 인간이 그 특유한 기능을 개발하지 못하고 다른 습성에 길들여지면 차라리 백지 상태에서 형성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시간도 훨씬 오래 걸린다는 보고로서 예이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은 결국 일종의 그들의 사인(死因)이 된 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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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부활은 다듬어질 때 이룰 수 있는 것. 다듬어지지 않은 자들에게 부활이란?

오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고의 절기인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절이 오늘만 있는 건 아닙니다. 지난해도 있었고 내년에도 올 것이며 매해 그렇게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맞는 이 부활주일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유일한 날입니다. 그러므로 올해 부활절에 내가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이 부활절에 내가 술친구와 더불어 마시고 있다면 이 부활은 영원히 술친구와 함께 한 부활이며, 이 부활주일에 내가 온전한 성만찬의 의미에 응하고 있다면 이 부활은 그렇게 영원히 남습니다. 이러한 반복(mimesis)을 통해 우리의 부활은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첫째, 부활은 고통을 통해 다듬어집니다.

유아에서 아동으로, 아동에서 청소년으로, 청소년에서 청/장년이 되어가는 것은 결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과 학교를 오가면서 사회로 진입할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하게 되는데 “교육”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것은 한마디로 고통, 곧 통증입니다. 이 통증의 고충을 상당량 부모님들이 받아내 줍니다. 이 고통을 이해해 주시는 분들을 우리는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이 과정을 간과했을 때 삶에 들이닥치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는 이미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상적으로 사회에 진입한 사람들 중에 어릴 때의 고충을 통증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로 가는 고통입니다. 

둘째, 부활은 죽음을 통해 다듬어집니다.

부활의 전제는 죽음입니다. 죽음을 전제 하지 않으면 부활은 존재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사회에서 이해하는 살상(殺傷) 개념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생명으로서 죽음 입니다. 죽을 것만 같은 어머니들의 해산의 고통이 생명과 맞닿고 있는 이치입니다.

셋째, 부활은 생명을 통해 다듬어집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죽이고 싶다는 생각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은 모두 살상입니다. 부활이 고통과 죽음을 통해 다듬어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은 모두 살고 싶어 하지, 죽고 싶다는 속성은 아예 갖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간절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죽고 싶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이와 같이 살고 싶은, 생명력을 통해 우리 부활이 다듬어집니다.


에필로그 | 다듬어지지 않은 자들에게 부활은 전혀 행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과정이 일체 필요가 없는 분이신데 우리를 위해 몸소 보여주심으로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다듬어진 자들만이 부활과 그 너머에 있는 세계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자들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이 과정 없이는, 이 과정이 전혀 없는 그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의) 부활이란 뒤늦게 다듬기에도 아주 더디고, 그리고 그것은 도리어 그의 사인(死因)이 되고 말 것입니다. 늑대소녀들에게서처럼.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4월8일 부활주일
본문, 마 28: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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