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3. 5. 14.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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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5년만 있으면 종교개혁 500주년. 잘했든 못했든 500년 전에 루터가 한번 끊어준 덕택에 바울의 복음이 2000년을 지탱할 수 있었다. 원효의 불교도 한 1400년 존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복음은 100년 좀 넘었는데..., 휘청휘청 하는데다가 이게 무슨 색인지가 모호하다.

프롤로그 | 바울의 행로.



프린서플 | 못하게 하다. 허락하지 않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책입니다. 사도행전은 성육신하셨던 예수님의 지상사역이 모두 끝난 후 그 다음에 진행되었던 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활동인물은 모두 사람이지만 성령의 사역을 중심으로 쓰고 있습니다. 계시록을 제외하고 그 외 문서는 대부분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중 바울을 필명으로 하는 서신이 13개이며, 그 가운데서도 전혀 논란 없는 바울의 친필 서신을 학자들은 7개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후대의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은 글들을 보고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그 분이 하신 일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시대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확장시켜나갔는지를 파악합니다. 특히 사도행전은 그리스도교가 지중해 연한의 팔레스타인이라는 한 지역에서 시작해 로마라는 세계도시로 상륙하기까지를 소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어떤 계획이나 전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이었다는 증언들로 곳곳에 스며있는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다음과 같이 파악합니다. 



못하게 하다. (v.6)


바울 일행이 원래는 아시아로 가려고 했던 것같습니다. 그러나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막은 것은 성령이라고 못을 박아두고 있습니다. 바울이 임의로 한 것이 아니라 또렷한 성령의 의사였다는 것입니다. 

왜 아시아로 가는 것을 막으셨을까요?  


허락하지 않다. (v7)


못하게 하는 것(금지)과 허락하지(방치·묵인) 않는 것은 방향성에서 같지만 양자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이럴 때에 우리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역사를 어떻게 파악 할 수 있을까요? 그 영이 나타나서 육성 혹은 육안으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러한 소통은 다음에 하게 됩니다.


환상을 보다. (v. 10a)


베드로 같이 바울도 특별한 계시를 받습니다. 베드로는 꿈에서 고넬료 쪽 사람들을 보았고 바울은 환상으로 마게도냐 사람들을 봅니다. 그것이 꿈이냐 환상이냐는 중요한 가름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주도하는 전 여정 속에서 그 인도하심을 파악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정을 하다. (v. 10b)


바울은 비로소 성령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환상에서 도와달라고 부른 것은 마게도냐인들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라고 바울이 파악을 하더라는 사실입니다.   



에필로그 | 아시아로 먼저 들어왔다면.


바울의 복음이 아시아로 강제로 밀고 들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이미지 참조:

modernreject.com
www.washedred.com
small-www.sophiainstitu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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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3. 24.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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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스토커들

◎ 운전하다 차선을 바꿔가며 천천히 가는 앞차에 바짝 달라붙어서는 빨리 가라고 재촉하고, 일부러 갑자기 끼어들다 급기야 운전자끼리 고성이 오간다. 상대방이 사과하지 않자 화가나 아예 자신의 행선지를 포기하고 그 차를 추격한다. 신호등이 켜졌을 때 차에서 내려 창문을 막 두드리면서 욕설을 한다. 쫓기는 운전자는 저러다가 말겠지 했는데 계속 쫓아온다. 공포를 느끼게 만든다. 단순집착형 스토커다. ◎ 어떤 미남 가수를 좋아하던 10대 열성 팬이 그 가수와 스캔들이 난 여성 가수에게 혈서를 보냈다. “죽여 버리겠다, 오빤 내꺼다, 우리 오빠 건들지 마라!” 그 편지봉투에는 잘게 조각난 면도칼이 함께 들어있었다. 이 팬은 진정으로 그를 사랑한다. 자기는 그와 운명으로 맺어진 관계인데 그가 그걸 못깨닫고 있어 안타깝다고 한다. 앞서 운전자보다 좀더 심각한 망상형이다. ◎ 매력 넘치는 A는 인기가 많아 남자가 줄을 선다. 그 중 하나가 B다. 점점 B가 별로였던 그녀는 그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다 선 본 남자와 결혼 약속을 하고는 B 문제를 매듭지으려고 결혼 사실을 알렸다. B는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만나자고 해서 싫다고 했더니 약혼자랑 같이 나와서 담판을 짓자고 해 하는 수 없이 약혼자에게 얘기 했다. “가자 해결해줄게-” 했지만 그날 차가 막혀 약혼자가 조금 늦었다. B는 그 사이 A를 잡아끌고 “너를 사랑하는 건 나 밖에 없다. 그 놈 안온다”며 고함을 질러댔다. 여자가 몸부림 치니 머리채를 휘어잡고 골목에 있는 모텔 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약혼자가 이 광경을 보고 차에서 뛰어 내려 B에게 한방 날렸는데 그가 쓰러지면서 보도 블럭에 머리를 부딪혀 즉사하고 만다. 약혼자는 졸지에 살인범이 된 것이다. 세 이야기 모두 같기도 다르기도 하지만 특별히 마지막 것은 열심있는 사랑에서 사랑 빠지고 열심만 남아 질투와 분노로 돌변한 예였다

프린서플 | 바울의 오직 믿음으로

빌립보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빌립이 세웠고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도시입니다. 이 지역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직접 설립한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 사람들이 바울이 투옥된 소식을 듣자마자 뭔가 필요를 챙겨 보냈던 것같으며(c.f. 1:5; 4:10-19), 이 서신은 그것에 대한 감사의 글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다른 서신서들이 그렇듯 유대교 신앙의 그릇된 행위를 강하게 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로마서를 함께 가르며 지나가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신앙을 확립하는 중요한 문맥의 구간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그 ‘오직 믿음’에 반한, 배설물로 간주되는 것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할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매우 중요한 행위이자 표식이었습니다. 일종의 구원의 징표일 뿐만 아니라 거룩한 신분과 속된 신분을 가르는 경계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에서 선택받은 민족은 이스라엘뿐입니다. 그 이스라엘의 정식 회원으로의 가입은 할례로서 되는 것이었습다. 그런데 이러한 신분적 징표를 버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

베냐민 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막내이지만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될 당시 다윗 왕을 배출하는 가문인 유다와 함께 잔존했던 유일한 지파 였습니다. 다윗 왕에 앞서 이스라엘의 첫 군주 사울을 배출한 지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명망있는 족보도 버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이스라엘과 히브리인은 어떻게 다른가. 헬레니즘 시대 당시 디아스포라 내에는 유대교로 개종해 들어오는 구성원들이 있었습니다. (할례를 통해 개종합니다.) 즉 자신은 중간에 개종해 들어온 이스라엘 족속이 아닌 순수혈통으로서 히브리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순혈도 버리는 것입니다.  


바리새인.

바리새 운동은 헬라의 강대국에 신앙적 주권까지 빼앗긴 상황에서 신앙을 존속시켜준 평신도 정신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이단으로 간주되었던 그리스도교의 교회를 철저하게 핍박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준수했던 것입니다. 그것 또한 버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필로그 | 열심

모든 것은 버렸지만 하나는 남아 있었던 것같습니다. 바로 열심. 즉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칫 열심히 사랑 하다가 분노와 앙갚음으로 변하게 마련인데, 바울은 반대로 분노와 앙갚음에서 사랑의 ‘열심’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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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 속에서2012. 8. 18. 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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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리바이벌이라는 이름으로 요즘 계속 어려운 일을 하나 하고 있다. 10년도 넘은 글들을 통해 나를 심판하는 작업이다. 흔히 밤새 쓴 편지나 일기를 다음 날 아침 찢어버리고픈 정신 역학을 감안한다면, 이 10년도 넘은 텍스트는 나의 심판주다. 리바이벌 다섯 번째] 

The Conversion of Saint Paul, by the Italian painter Caravaggio

공산주의가 무너졌을 때 민주주의의 승리인 줄 알았지만 승리자는 자본주의였고, 그런 자본주의가 다시 붕괴되면서 진정한 승리자는 어떤 체제가 아닌 언론과 미디어임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여론=언론”이라던 등식이 이젠 전혀 배치된 사태에 직면하게 되면서 진정한 최후의 승자는 미디어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미디어라고 하는 매개체 그 자신은 이미 통제 불능에 빠져 미디어에 순응하는 악인은 순간에 의인이 될 수 있으며 불응하는 의인은 순간 악인도 된다. 살아있는 생물인 것이다.

미디어가 체제의 통제를 받던 때는 돈과 권력이 그 채널을 독점했지만 미디어 자신이 권력인 체제에서는 마음먹은 누구나가 채널을 손에 쥘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값싸고 빠른 방법으로서 콘텐츠가 바로 우리가 흔히 안티(Anti)라고 부르는 형식이다.

안티라는 문화적 변이가 교회에도 유입되면서, 묻혀만 있던 교회와 목회자도 드러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소수를 가장한 집단의 권력화 일종이라는 점에서, 안티는 체제의 새로운 형식이다. 단지 그 집단을 특정 지을 수 없는 점만 종전과 다르다.

그런 가운데 기독교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속성에 빠진다는 것은 실로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게다가 자신이 몸담은 곳의 성직자에게까지 저항하는 것은 개탄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지난 몇 년간 내부적 안티는 그렇게 금제 구역인 교회를 무차별 해부해 놓았다. 자, 이제 어떻게 봉합할 텐가? 홍길동처럼 교회에 산적한 비단을 퍼낼 텐가 쌀을 퍼낼 텐가? 안된 말이지만 자신 또한 권력화에 부응하는 문화적 변이로서 그들에게는 이 해부를 마무리 지을만한 능력이 없다.

어떤 면에서 모세를 지탄하는 미리암은 정당하다. 그러나 그녀가 모세의 사욕만 못한 의를 지녔기에 저주를 받은 것은 아니다. 흔히 모세의 권위가 미리암의 사사로운 의를 이겨서 라고 말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패러다임 자체를 파괴 하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대변한다. 모세 자신이 가나안에 들어가든 못들어 가든 그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모세의 무수한 단점들이 노출되었지만 그래도 한 인간으로서 다른 모두보다 낫기에 이스라엘의 구심점이 되었던 것 아닌가?

교회와 성직자는 하늘의 별 같은 존재다. 그것은 계급의 높이로서 별이 아니라 길을 나선 나그네의 방향을 보여주는 나침반으로서 별이라는 점에서 그 높이에 위치한다. 그 별이 떨어진다면 무엇을 보고 길을 나서겠는가? (c.f. 요한계시록 6: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가 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무엇보다도 이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이 노선 상에 지금 나는 없다. 어떠어떠한 상황이나 누군가를 옹호하려는 목적을 띠고 썼던 게 분명한 나의 이 곤혹스러운 글은 그 노선 상에 내가 없음을 심판한다. 도리어 이 텍스트가 지탄하고 배격하는 그 자리에 내가 서 있는 것만 같다.

그렇지만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전혀 제3의 길목에 서 있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내가 혈육과도 의논하지 아니하고 나보다 먼저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도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와 홀로 되었기 때문이다. 美門은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 다메섹일 것이다. 전향자(convert)인 셈이다.


2001년 5월 25일자 텍스트 앞에서
나의 자아를 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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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 8. 16.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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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은 자연적 세상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 영혼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어떤 높은 최상의 힘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거나 혹은 인식할 만한 어떤 것이어서 (그 입증에 사람들이) 당혹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은 관측 가능한 어떤 최상위 계층으로서 힘도 아니고 그것들의 합(sum)이거나 원천(fount)도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존재로서 힘입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그 모든 힘의 위기(the KRISIS of all power)입니다.”

일전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지식이 갖는 힘들이 붕괴되었다고 한 저 칼 바르트의 주석을 소개한 것은, 그 지식들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폐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흔히, 교회에서 젊은이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얻으려고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빌 3:8-9)는 말을 오해하게 하는 바람에 그들이 지식 쌓는 노력 자체를 회피하게 만드는 것은 그른 가르침이다. 그들이 지식으로서 힘을 쥐어 보지도 않고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힘의 위기는 우리가 그 지식의 힘을 손에 쥔 후에 배설물과 같이 버렸을 때 비로소 임하는 것이다. 손에 넣지도 못한 것을 어떻게 버렸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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