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속에서2012. 9. 15.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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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하시며 그 위에 더하여질 어떠한 것도 존재치 않는 그분의 빛을 우리는 여러 빛 가운데 하나로 수용하고 말았다. 

그것은 정말이지 무형이면서도 초자연적인 빛으로서 우리 자신의 빛이 생산해낸 최고의 성공작이었다. 그리고는 그 견고한 진속에서 상당히 지속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빛이 발견되기를 구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바 된것이 단지 불신자들에게만 효용 된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분께 지금 이 순간에도 빚지고 있는 이 영광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불(빛)을 탈취한 프로메테우스의 저항은 하나님 보좌에 제우스가 올랐을 때에만 전적으로 정의로운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 신은 제우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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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 9. 7.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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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되지 못할 것은 그들의 하나님 없음이다. 이는 그분의 영원하신 힘이 내포된 그분의 언어가 명백한 환경적 행위 속에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미 그분을 저항하는 예배를 일으켰음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자연계(natural)와 영계(spiritual)와 그리고 그 모든 권능들(other forces)의 중심선상에서 그것을 드러내셨다.

또한 용서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의롭지 못함이다. 그것은 그분의 영원하신 신성에 대한 증거를 내포한 명백한 요인들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들의 오만을 일으켰음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스스로가 일으키는 요인들 속 내재된 의미로서, 곧 하나님의 언어가 그들의 체험을 강타하는(welter)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감싸인(내재된) 하나님의 진리, 그리고 그분 진노에 관한 환기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핑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계시 내지는 심판) 어떤 선택 가능한 것으로서 우리에게 열려져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으로부터 멀리계시지 않으시나니, 그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안에,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 이 안에, 그리고 우리의 존재됨 속 이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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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 9. 7.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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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게 속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분명히 보여졌고-”

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보인바 된 우리 겸손의 결핍, 기억의 결핍, 두려움의 결핍 등이 우리 앞에서는 보인바 되지 않는, 불가피한, 그렇지만은 그것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보인바 되는 (우리의) 자연스러움이다.

하나님의 그 모든 불가사의한 피조물 - 예컨대 동물원으로서 이 세계? - 우리가 답은 갖고 있지 않은 그 수많은 문제들은 무엇인가? 그러나 하나님 한 분, 하나님 그분 자신, 그분만이 그 대답이시다.

차분하고도 진정한 편견 없는 신심을 통해 그 신성한 “부정하심,” 곧 거절하심의 응답은 확립될 수 있는 것이며 또 이해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 스스로 저지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 폭로 됨에서 오는 그 건강한 “위기” 속으로 우리 존재를 운반해오는 일을 저지할 수 있는 것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반론할 여지가 없는 실체 곧, <확실히 보인바 된 그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타내지 않으심>이다. 예를 들면 부활이다. 그것이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영원하신 권능과 신성”(롬 1:19)인 것이다.

이것이 말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이야 말로 우리에게는 그분에 대해 알만한 것이 없었다는 것, 우리는 그분이 될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렇기에 그분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 그 이유 말고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여기에 모든 신들을 뛰어넘는 그분의 탁월함이 드리워져 있다. 여기에 하나님으로서, 창조주로서, 그리고 구세주로서(롬 1:16) 그분의 기호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의 심판대 아래 이미 서 있던 이들에게는 노출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그 심판을 알 수 있었고, 그리고 그것을 사랑한다고 했었다.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롬 1:20)인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보는 데 실패하고 듣는 데 실패한 데서 비롯된다. 보는 눈을 가지고 듣는 귀를 가지고서 그들은 그들 할일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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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 9. 1.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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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t which may be known of God is manifest unto them.(Rom 1:19) The truth concerning the limiting and dissolving of men by the unknown God, which breaks forth in the resurrection, is a known truth: this is the tragic factor in the story of the passion of the truth.” - K. Barth -

사람들은 자신들의 한계에 부딪히고 해체되어 버리는 순간에 진리를 직면한다. 이때에 직면하게 되는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에 의한 그 진리>가 바로 로마서 1:19에서 말하는 <알 만한 진리>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부활 속에서 분출되어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가 겪고 있는 수난 이야기의 비극적 요인이다.

위 문장은 매우 짧지만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를 통해서 믿지 않는 자들의 진리를 믿는 자들의 진리로 치환해내는 칼 바르트의 고도의 통찰이 담겨있다. 즉,

= (1) 인생들의 한계에 직면함 ------------------> 일상의 한계 체험 
= (2)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에 의한 진리> ------> 우상으로 체험 (c.f. 행 17:23 아레오바고의 “알지 못하는 신”에게) 
= (3) 하나님을 <알 만한 진리> -----------------> 롬 1:19
= (4) 부활의 진리 -----------------------------> 그리스도로 체험

(1) 항에서 (4)의 궁극적 진리에까지 이르는 등식. 

물론, 이것이 등식이기는 하지만 이 네 단계 속에 구원과 심판으로 갈리는 비극적 요소가 산술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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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 8. 30. 21:50

인간은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진리에 갇혀 있고, 그 진리에 둘러싸여있다. 그들은 그들의 입맛대로 그것을 재단하는 기법을 통해 그것이 지닌 진정성과 심각성을 훔쳐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평범하고 무해한 것으로 만들고, 그리고 불필요한 것으로 변환한다. 진리는 그런 기술에 의해 허위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진리를 허위로 변환하는 기술은 (활성화 되지 않은) 그들의 불신앙을 일깨웠고, 또한 그 불신앙은 불의의 이 새로운 형식 속으로 그들을 던져 넣는데 성공하였다.

만약 인류가 그 스스로 하나님이 된다면, 그러면 우상의 출현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 세계를 둘러치고 있는 그 새로운 차원의 계획, 곧 구원하심의 의미를,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그러한 반역에 대하여 바로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님에 의해) 폭로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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