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3. 10. 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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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엘리야의 승천.


엘리사가 벧엘을 지날 때 아이들이 놀리자 저주를 받아 곰에 찢겨 죽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선지자의 위엄’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구약시대의 의례적인 진노로 보아야 할까? 이 본문을 들어 현대식 목사가 자신의 위엄을 강조하는 본문으로 차용하는 것은 대단한 넌센스다.


* 엘리야가 승천하기에 앞서 엘리사가 따르는 장면(왕하 2:1-2, 6-14)은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

프린서플 | 무엇을 따르는가 어떻게 따르는가.


“따르라”(눅 9:59)고 했을 때, 따르는 데에는 몇 가지 태도가 있다.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따르는 것 즉 따라붙는 것(tag along), 애착으로 따르는 것(be attached to), 목표를 따르는 것(go after),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obey), 행동으로 따르는 것(act on), 법률적으로 따르는 것(abide by/comply), 이들은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더 낫다거나 더 못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모든 것들이 적시 적소에 사용될 때 온전한 ‘따르기’가 될 수 있는 요건들이라 하겠다.



본문에서 엘리야를 따라가는 엘리사 역시 위의 모든 요건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 엘리야는 엘리사를 데려가지 않으려 했는데도 엘리사는 열심히 따라붙고 있다(tag along). 


(2) 그리고 벧엘과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들의 제자들이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라고 만류 하는데도 “너희는 잠잠하라” 하고서 계속 따를 정도로 애착이 있다(be attached to). 


(3) 또한 엘리야가 떠날 때뿐만 아니라 벧엘과 여리고를 지날 때에도 연속해서 “너는 여기에 머물라” 하는 데도 그 목표점을 놓지 않고 따른다(go after). 


(4)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기를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있게 해달라는)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을 때 시키는 대로(obey)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본다.


(5) 그렇게 엘리야가 승천하고 나자 그는 자기 옷은 둘로 찢어 버리고는 엘리야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들어 엘리야가 앞서 행했던 대로(act on) 물을 쳐서 가른다. 


(6) 아울러 끝으로, 여리고에서는 ‘고치고’ 벧엘에서는 ‘저주를’ 한 일은 상당히 법정적인 것에 따른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comply). 여리고는 증언을 했고 벧엘은 조롱을 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 예수님의 승천.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마을을 저주하지 않으셨다. 저주하고자 하는 제자들을 도리어 꾸짖으셨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따르는’ 태도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❶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는 집도, 굴도, 머리 둘 곳도 없으시다고 하셨다(58절).

❷ 예수께서는 죽은 자의 장사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라고 하셨다(60절).

❸ 예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다(62절). 


신약, 예수님의 삶의 자리에 왔을 때 승천이라는 주제는 불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을 보여 줌(SHOW)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 속 승천을 어떻게 잘 승계하고 계승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평행본문인 누가복음 9장은 그걸 강조하는 것이다.


2013년 6월 30일자 분, 본문, 왕하 2:1-2, 6-14; 눅 9:51-62. (c.f. 시 77:1-2, 11-20 갈 5:1, 13-25.)


이미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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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10. 2.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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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브엘세바.

브엘세바는 세겜, 헤브론과 더불어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아브라함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곳 중 하나라고 한다. 세겜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처음 장막을 친 곳이고 헤브론은 아내 사라를 장사 지낸 곳이다. 세겜과 헤브론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로 편입돼 접근이 통제되고 있어 브엘세바만 접근이 가능하다고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만민의 아버지”가 된다는 위대한 약속을 받았지만 몇 가지 고질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선 결정적으로 자녀가 없다는 점 (사실상 자녀의 생산 가능성이 전혀 없었음), 둘재 토지가 없다는 점, 셋째 그렇다보니 인접한 외부세력에 한 시라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신분(이방인)이라는 문제였다. 우리는 흔히 그가 백세에 아들을 낳는 이야기에만 몰입해있지만, 공동체를 이끌어야 하는 책무가 주어진 아브라함에게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외부 적대 세력과의 지속적인 분쟁이었다. 특히 블레셋 영지가 주 거점이던 아브라함에게 아비멜렉과의 끊이지 않는 샘을 둘러싼 분쟁은 가장 큰 골치거리였다. 


그러다 마침내 샘을 하나 확보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브엘세바였던 것이다. 아비멜렉과 협정을 맺어 이를 확보하고는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이름 짓기를 “맹세의 우물”(일곱 우물)이라고 지었다. 단순히 적대 세력과의 협정으로서 맹세가 아니라 주거가 안정되지 않았던 자기 공동체에게 안정과 평화를 확보해줄 수 있는 거점이어서였을 것이다. 브엘세바는 아버지 사후에 이삭이 아버지처럼 아비멜렉에게 시달리다가 역시 샘을 재확보한 바로 그곳이다. 또한 이삭이 야곱에게 복을 빌어준 곳이며, 애굽 총리가 된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모셔 갈 때 야곱이 마지막 잠을 잔 곳인가 하면, 일찍이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나 사막으로 향하면서 잠시 들렀던 곳이기도 하다. 


프린서플 | 도상해석. 로뎀나무가 키워드인가 구운 덕이 키워드인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냄으로써 명실상부 대 예언자로 데뷔 한 엘리야가 아합과 바알 사제들에게 도전장을 낸 끝에 예배에 승리를 거두고, 거기서 그치지 않아 계속 밀어부쳐 그들을 제거하는 것은 물론(왕상 18:1-40) 자신이 수 년 간 멈춰 놓았던(왕상 17:1) 비까지 다시 오게 만드는 위력있는 영성을 발휘하지만 이세벨이 다짐한 보복의 소식을 듣고는 서둘러 도망친다(왕상 19:2). 


그리고 그가 찾아간 곳이 바로 브엘세바다(3절). 그는 브엘세바에 사환을 두고는 광야로 좀 더 들어갔다. 힘을 보충하려는 의도 보다는 아마 죽으려고 그렇게 더 들어갔던 것 같다. 그곳에 들어간 그는 기진맥진 한 상태로 그늘이 될 만한 로뎀나무를 발견하고는 그 아래서 잠이 든다. 일어나 보니 곁에 구운 떡과 물이 조금 있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먹고 마신 힘으로 그 지점으로부터 “사십 일”을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의 영혼은 몇 가지 부분과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1) 먹(고마시)는 부분 (2) 감각하는 부분 (3) 움직이는 부분 (4) 생각하는 부분


우리는 주로 먹을 것을 위해 움직인다. 감각을 좇아 움직이기도 한다. 먹을 것을 위해 움직이는 것과 감각을 좇아 움직이는 것은 다 ‘생각’을 통해서 가능하다. 먹는 생각 미감/쾌감 다 ‘생각’이다. 그러나 먹는 것과 그 감각이 완전히 배제된, 생각만을 위한, 생각만에 의한 우리의 움직임이 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면서도 가장 우월한 단계의 영혼의 부분이다. 그것은 먹는 것과 감각하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최고의 부분이다보니, 그곳에는 언제나 먹는 것과 감각이 제거되는 혹독한 경험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다. 광야는 그런 의미에서 언제나 영혼의 공간이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 같이(시 42:1-5) 우리 영혼은 그 샘의 원천을 찾아 헤매고 거기서 가장 원초적인 식량, <물>을 만난다. 그 샘, 브엘세바에 다다르는 것이다. 일곱 우물의 장소, 아브라함과 이삭이 맹세한 영적 장소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영혼은 그것 만으로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차라리 죽기를 원하는(19:4), 완전한 탈진(burn out)의 공간에 들어서고 마는 것이다. 엘리야는 브엘세바를 지나 바로 그 구역까지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로뎀나무를 만난다.


기왕 광야로 나가 만난 기적이면 더 시원한 오아시스를 만나야 하는데, 불덩어리들을 만난다. 


모세는 (불에 타지 않는 나무) 떨기나무를, 엘리야는 (불이 까지지 않는 나무) 로뎀나무를- 


에필로그 | 광야에서 왜 구운 떡을 주셨는가.


두 명의 여행자가 로뎀나무 가지들을 연료로 삼아 밥을 지어 먹었는데 1년 후 가보니, 그 재 속에 여전히 불씨가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유대인의 전설이 있다. 그래서, <숯 재료로 가장 좋은 나무> 곧, <천사가 숯불에 구운 떡을 놓고 간 나무>는 둘 다 같은 나무이다.


이 불을 연료 삼아 엘리야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산 호렙에까지 다다르는 것이다. 



2013년6월23일자 본문, 왕상 19:1-4, (5-7), 8-15a (c.f. 시 42 & 43  갈 3:23-29; 눅 8: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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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9. 2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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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그리스도께 향유를 부은 여인들.


그리스도께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모든 복음서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녀에 대한 묘사가 복음서 마다 다 다릅니다. 몇 가지가 다르지만 향유를 머리가 아닌 발에 붓는 것은 요한복음과 누가복음뿐 입니다. 누가복음이 요한복음 보다 이 발에 붓는 장면에 더 주력합니다. 


* 본 글과 설교음원은 누가복음 위주로 설명합니다.


프린서플 | 향유 부은 여인은 왜 발에 부었는가?

성서일과가 3주째 엘리야 중심으로 읽히고 있습니다. 2주 전에는 이방 신 바알 사제와 대치하던 엘리야의 단호함이 천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바울 시점에 가서는 이방인의 복음을 저해하는 세력에 대한 단호함으로 뒤바뀐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천년 전에 대치하던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자리를 완전히 뒤바꿔 놓은 것은 하나님을 중심선상에 모셨을 때 우리의 ‘변화’ 혹은 ‘변질’이라는 태도가 그것을 갈라낸 것이었습니다.


(참조. http://www.mimoonchurch.com/197 )


지난주에는, 엘리사-수넴 여인(왕하 4:8-37) 이야기와 오히려 더 잘 어울리는 엘리야-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고) 복원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라는 대 선지자를 그 가정이 만났던 까닭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월이 지나 다 변하고 사라져도 하나님, 하나님의 사람과 관계된 이야기에 들어섬으로써 우리는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결론이었습니다.


3주째 성서일과에 거듭되는 엘리야. 왜 엘리야인가? (변화산 상에서 변화되신 예수님과 함께 나타났던 2인 중 한 사람도 엘리야. 모세는 ‘모세’니까 그렇다 쳐도 많고 많은 예언자 중 왜 하필 엘리야였던가?) 그것은 그가 ‘최고의’ 예언자라서가 아니라 ‘최초의’(The First) 대(大) 예언자였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께서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릴 때, 저자 누가가 특별히 그곳을 나인 성이라고 밝힌 것은 엘리사를 회고하는 듯 보이지만(그곳이 수넴과 가깝기에), 궁극적으로는 엘리야를 겨냥합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아들을 돌려주듯 “돌려준다”고 회고 했습니다[눅 7:15].) 즉, 그 분은 바로 ‘대 예언자’라는 것입니다(7:16).


오늘 본문 역시 한 여인이 그리스도께 향유를 붓는 이야기를 통해 ‘대 예언자’라는 일관된 관점을 유지합니다. 마가복음(14:3-9)을 참조하고 있는 마태는 마가복음과 마찬가지로 그 장소를 베다니의 나병환자 집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은 한 바리새인의 집이라고 지목하고 있습니다. 그 향유 붓는 여성을 비난하는 사람도 다른 복음서에는 ‘제자’ 혹은 ‘어떤 사람’인 반면 누가복음은 그 집 주인(바리새인)으로서 시몬입니다(다른 복음서는 나병환자인 시몬). 같은 사건도 저자마다 약간씩 편차있게 기록하게 마련이지만 특별히 누가복음에서만 엿볼 수 있는 것은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이야기처럼 그리스도를 ‘대 예언자’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인 성 과부 이야기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과연 어떻게 대 예언자 상을 보여주셨는가를 기록했다면, 오늘 본문인 향유를 붓는 여인 이야기를 통해서는 어떻게 이 마지막(The Last) 대 예언자를 ‘대접’해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어떻게?


(1) 그 발 곁에 서다.


(2) 눈물로 그 발을 적시다. /머리털로 닦다.


(3)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붓다.



에필로그 | 그리스도에게 기름 붓는 자의 자격.


유대인에게 손과 발을 닦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식입니다. 식사 교제 특히 잔치의 경우 그러한 의식으로 환대가 표명되었지만, 상대적으로 밥을 함께 먹을 수 없는 부류들과의 선을 긋는 것 또한 씻는 행위였습니다. 즉 환대의 표시이자 결별의 표시인 셈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발에 향유 부은 여인을 다른 복음서와 달리 누가복음에서는 ‘죄 지은 여자’로 지목하고, 또 비난하는 자 역시 “선지자라면서 죄 지은 여자가 자신을 만지게 두었다”라며 비난한 것은 그리스도에게 기름 부은 자의 정체성 내지는 자격과 관련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대 예언자나 군주들이 하는 식으로 유력한 인물에게서 기름부음 받는 존재가 아니라, 죄인에게 기름부음 받는 분이시라는 역설인 것입니다. 게다가 기름부음은 머리에 받게 마련인데 발에 부어졌다는 것도 의미심장한 역설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께 기름부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오로지 ‘죄인’뿐이라는 메시지이기도 하겠습니다. 스스로 죄인이 아닌 자는 이 특권을 누릴 길이 없습니다.

 

2013.6.16일자. 본문: 눅 7:36-8:3, (c.f. 왕상 21:1-10, (11-14), 15-21a; 시 5:1-8; 갈 2:15-21.).


이미지 참조.

http://theepottershand.com/tag/oil-on-my-head/
http://jamestabo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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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6. 10.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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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아합의 아버지.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지면서 남쪽은 유다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북쪽에서 가져다 썼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대로 남 유다는 다윗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지만 북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다윗의 이상을 이어 받지 못한 것으로 성서는 기록한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그들에게는 왕위를 둘러싼 정변이 계속되었다. 여로보암이 북 이스라엘을 설립한 이래 열 아홉 명의 왕이 바뀌는 동안 여덟 명이 살해 당했고 다섯 번의 큰 정변이 발발했다. 200년 새의 일이다.


남 유다보다는 땅도 많이 차지했고 인구 수도 더 많았지만 북 이스라엘이 외국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위치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항상 국가 존립의 위협과 마주 섰던 여로보암의 후예들은 어떤 이상과 정통성을 유지·발전시키겠다는 이데올로기 면에서는 상대적 열세를 면할 수 없었는데, 그에 따른 영적 이질감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측면을 넘어 문화적이고 신앙적 유연성으로 폭넓게 번져 나갔다. 아합 왕과 이세벨이라는 인물은 이런 배경 속에서 등장하는 것이며, 아울러 엘리야와 엘리사 같이 그들을 견제하는 강력한 선지자들도 잇따라 출몰하기에 이른 것이다. 


비록 722년경 멸망 당하지만, 북 이스라엘 왕조 가운데 아합의 아버지인 오므리의 왕조는 강력한 왕조였다. 이세벨이 상징하듯 정략 결혼을 통해 안정과 번영을 누렸으며 그에 따라 군사력도 강대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윗 보다도 지명도 있는 왕조였다. 역사에서만. 


프린서플 | 사라지는 체험 남게되는 체험.


역사라는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세속적 용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역사적’이라는 말이 신앙적 조어로서 들려오면 현대 그리스도인은 뭔가 확실한 증빙이 붙은양 의미심장하게 받아 들인다. 하지만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믿지 않겠다’는 공리를 깔고 있다. 그래서 관념어에 강한 독일어 같은 경우는 실제 발생한 역사로서 히스토리에(Historie)와 전설 따위로서 역사, 게쉬히테(Geschichte)를 구별해 쓰기도 한다. 예수는 히스토리에지만 부활은 게쉬히테라는 식이다. 그렇지만 부활을 설령 게쉬히테라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가령) 내가 누군가와 만났다는 사실은 분명한 나의 히스토리에임에도 나에게 관심이 없는 저들에게는 내가 그와 백번을 만났다한들 게쉬히테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히스토리에든 게쉬히테든 내가 사랑하는 그(녀)와 만났다는 경험이 달라질 것은 없는 이치이다. 


본문에서 한 과부의 가정이 엘리야라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삶과 죽음의 체험을 했던 경험은 엘리사를 만난 과부의 가정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만난 과부의 가정이 체험한 바로 그것은 우리 각자 삶의 체험 속에서도 영구히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요건을 띠며 임한다.


죽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오다.


엘리야는 과부의 아들을 죽은 상태로 받아 안았고, 엘리사는 죽은 아이를 자기의 침상에 드러뉘였으며, 예수께서는 나인 성에서 죽은 아들을 데리고 나오는 과부에게 다가가 불쌍히 여겼다. 


죽은 것을 하나님의 사람이 살려서 돌려주다.


엘리야는 아이 위에 자기 몸을 3회 펴서 엎드리며 기도했고, 엘리사는 3곳 즉 입과 눈과 손을 맞대고 기도했으며, 예수께서는 죽은 자에게 직접 말로 명하여 살리셨다. 그리고는 살아있는 상태로 돌려주셨다(왕상 17:23; 눅 7:15).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엘리야를 만난 과부는 아이를 살린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이란 칭호를 고백한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칭하던 과부의 아이를 살린 것이다. 예수께서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셨을 때는 모든 사람이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고 하였다. 


에필로그 | 다윗 왕가와 오므리 왕조.


인간의 삶은 두 번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한번은 자기 체험(Geschichte) 속에서, 그리고 타자의 회자(Historie) 속에서. 그리하여 어떤 것은 구속사에 산입 되는가 하면 어떤 것은 역사에서 조차 잊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우리가 경험했던 체험 속에서 영구히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누군가의 체험과 연결되는 것 뿐인데, 특히 사르밧 과부, 수넴 여인, 나인 성 과부처럼 하나님의 사람과 연결되었을 때 그 체험과 존재는 영원한 것이 된다. 다윗과 오므리 왕조의 역사적 편차도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미지 참조:

wikipedia.org.jpg
www.biblicalarchaeolog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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