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2. 10. 14.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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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욥의 의(義)를 기점으로 나타나는 두 가지 측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참조: http://www.mimoonchurch.com/159 ) 자신의 의를 과신하는 욥 하나와 - 패배주의적 신앙과 그것을 연결지었습니다 -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 그것은 주로 창조로 표현되었습니다 - 앞에서 회개함으로 오직 하나님의 의로 덧입은 욥이었습니다. 

오늘 이 본문(막 10:17-31)에 등장하는 ‘재물이 많은 사람’은 부자로서 재물이 많다는 점에서 욥과 닮았지만 계명을 다 지켰노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전자의 욥과 많이 닮았습니다. 특히 그는 (1) 살인하지 말라, (2) 간음하지 말라, (3) 도둑질하지 말라, (4) 거짓 맹세하지 말라, (5) 속여 빼앗지 말라, (6)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과 계명을 잘 준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권고로 제시되고 있는 그것은 불교 같은 종교에서 말하는 어떤 무소유를 뜻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구제의 질량을 무겁게 쌓으라는 주문도 아니며, 그 재물을 예수님 자신에게로 가져오라는 요구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버리라”는 단순한 말로 압축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은 그로 하여금 “제자가 되어 따르라”는 말씀 즉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씀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 상에서 우리는 재물 많은 이 사람을 포함하는 다음 세 부류의 제자군이 등장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첫째, 재물을 버리지 못하는 제자. 

이들은 예수님께 달려와 무릎까지 꿇으며,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버리고,” “따르라”고 했을 때 슬퍼하며 되돌아갔던 제자들입니다.


둘째, 수군거리는 제자.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는 말을 듣고 서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수군거리는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


셋째, 버리고 따르는 제자. 

반면에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라고 고백하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향해서만 예수님께서 알려주십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로써 우리는 그 재물 많은 사람의 영생에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재물 자체가 아니라 그 재물을 놔두고 따르지 못한 결단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생은 버렸다 다시 받는(λαμβάνω) 것에 포함되는 것이지 이 남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 속에서 상속받는(κλερονομέω)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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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 8. 16.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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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은 그 기본 개념 자체가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는데 흔히 죽은 자들이 받는 전리품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사실 넌센스다. 죽으면 이미 결격이다. 영생은 믿다 죽으면 받게 되는 보상 정도로 인식되어 있지만, 이 영생은 오직 산 사람들의 생명이다(요일 5:11a). 더욱이 영생은 그 믿음 행위에 대한 증거라고까지 말한다. 그렇다면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생을, 그리고 죽으면 받게 되는 것인 줄 알았던 그 영생을 어떻게 증거로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영생은 “아는 것”이라고 했을 때에(요 17:3) 그것이 가능하다. 즉 “아는 것”이 바로 “믿는 것”의 증거인 동시에 우리가 산 채로 소유하고 있는 생명이다. 한 마디로 영생은 죽은 자들이 아닌 산 사람들이 산 채로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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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8. 6.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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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플라톤의 국가

신약성서보다도 더 오랜(380 B.C경) 플라톤의 저서 <국가>라는 책의 주제는 ‘정의’입니다. 그는 정의를 “조화”라고 가르칩니다. 정의가 개인에게는 덕이지만 전체 속에서는 조화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조화를 위해 사회의 계급을 크게 둘로 나눕니다. 수호자 계급과 기술자 계급. 수호자 계급은 외부 침입을 방어하는 임무를, 기술자 계급은 생산을 담당하는 임무를, 그들이 각각 가슴과 배로 상징됩니다. 한편 철학자 자신들은 최상단 머리 위치에 둠으로써 통치 그룹으로 상정합니다. 원시적 분할 같지만 사실 이러한 계급 단위는 인류가 창설한 모든 국가 체제에 상시로 반영되어왔습니다. 때로는 귀족주의 사회에서, 때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체계가 채용되는 현상을 보여 왔습니다. 심지어는 전통적 공산주의의 사유재산 금지 제도도 플라톤의 국가 속에 이미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대목은 개개인의 재산 공유를 넘어 (아직까지 실현된 국가는 없지만) “처자(妻子)의 공유”라는 제도도 그 이상 안에 들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내와 자식도 국가를 위해 공유한다는 발상입니다. 과연 이런 조화 속에서 개인이 얼마나 행복할 수 있겠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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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하나님 나라의 내용과 목적

복음의 내용과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 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생애를 직접 묘사하고 있는 복음서들 외 바울의 서신서들에서도 중요한 주제 입니다. 물론 이 ‘하나님의 나라’는 구약 유대인들의 신앙에 까지 소급되는 개념입니다. 그렇듯 중요한 이 주제어가 다른 세 복음서에는 다 나오는데 요한복음에서만 빠져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기만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 대신에 ‘영생’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전혀 다른 표현인데 어떻게 대체될 수 있을까. 그것은 다시금 하나님 나라의 내용과 목적이 무엇인지 살필 때에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첫째, 영생은 하나님 나라의 내용과 목적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내용과 목적은 오해되고 오용된 사례들이 많습니다. 그 나라를 정치적인 나라로 이해했던 사람들은 허리에 검을 차고 다녔으며, 그 나라를 황금의 나라로 이해했던 사람들은 허리에 전대를 차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영생 곧 영원히 사는 것을 그 내용과 목적으로 갖습니다.

둘째, 영생은 다른 차원의 양식으로 가능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뜻인 ‘영생’에 대해 오해한 사람들이 진시황의 불로초나 희랍 신화의 넥타르를 구하듯 신앙생활을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오해했듯이 오병이어를 체험한 사람들이 그 떡에 대해 잘못 이해를 하고 있지만, 영생 할 수 있는 떡이란 예수님의 몸입니다.

셋째, 영생은 말씀으로 사는 ‘삶의 체계’를 일컫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그 영생의 떡이자 곧 하늘에서 온 떡이라고 한 것은 그 떡/몸이 어떤 불사(不死)의 효능을 지닌 재료라는 뜻이 아니라, 일종의 체계(system)라는 말입니다. (1) 광야에서 먹었던 떡 곧 만나의 질료도 예수님의 몸을 가리키고 있고, (2) 오병이어의 떡도 예수님의 몸을 가리키고 있고, 신령한 떡인 (3) 하나님의 말씀도 예수님의 몸을 가리키고 있다면, 그 몸은 일종의 실천, 실행, 행위로 표명될 수 있는 ‘삶의 체계’ 말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것입니다(요 1:14).

에필로그 | 영생의 내용과 목적

플라톤이 꿈꾼 <국가> 역시 일종의 체계였습니다. 머리, 가슴, 배로 이루어진 체계.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철인이 아닌 예수님께서 머리 되시고 그 아래로 가슴, 팔, 다리, 손, 그 모든 것들이 (계급이 아닌) 독특한 개성과 은사를 지닌 지체로서 서로 화합하고 사랑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밝혀진 바, 사실상의 영생의 내용과 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예형이라 할 수 있는 교회에서 성공적인 몸을 형성해내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의 궁극인 하늘에 가서도 그리 행복을 느끼지 못할 것이 자명합니다. 어떻게 좋아하지도 않던 공동체 생활을 영생토록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8월 5일 성령강림 후 제10주
본문, 요 6:24-35.
 (c.f. 삼하 11:26-12:13a; 시 51:1-12; 엡 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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