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2. 12. 30.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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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은 “처해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죽음 앞에 처할 때 가장 큰 두려움을 자아내는 것같지만, 실상은 삶(살아 있다는 사실) 앞에서 더 큰 두려움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처해있음”의 실체인데, 이로써 우리가 이 땅의 태생이 아님을 압니다. 그리스도가 처했던 냉담함도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프롤로그 | 도마가 쓴 그리스도의 유년기 복음

그리스도는 어떻게 자라셨을까? 친구들과는 어떻게 지내셨을까? 우리의 유년시절처럼 뛰놀기도 하셨을까? 도마가 쓴 것으로 알려진 그리스도의 유년기 복음서(Infancy Gospel of Thomas)에는 정경에서 흔치않은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이 비교적 상세히 다루어져 있다. 특히 이 책에는 누가도 언급하는바, 그리스도께서 12살 때 예루살렘에 갔다 일행과 떨어져 부모가 다시 찾으러 갔던 사건도 포함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책에서의 유년 그리스도는 매우 폭력적으로 묘사되다 보니 전혀 다르게 읽힌다는 사실이다. 그 한 대목을 소개해 본다. 

[율법학자 안나스의 아들이 요셉과 함께 서 있다가 나뭇가지로 예수가 만들어 놓은 물웅덩이에서 물을 빼냈다. 그것을 본 예수는 화가 몹시 나서 “못된 녀석, 불경스럽고 무지스런 망나니 같으니. 물웅덩이와 물이 네게 무엇을 잘못했단 말이냐. 너는 네가 가지고 있는 나무처럼 마르고 뿌리나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야”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즉시 몸이 말라버렸다. 예수는 그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몸이 말라버린 아이의 부모가 와서 그 아이를 데려가면서 아이가 생기가 없는 것을 보고 속상해 했다. “우리 애한테 이 따위 짓을 하다니 도대체 그 놈이 어떤 놈이야? 요셉, 당신이 눈으로 보았으니 다 알 거 아니오?” 그들은 요셉을 탓했다.] 

베일에 싸인 그리스도의 유년기를 접할 수 있는 것같아 흥미롭지만, 이 책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다른 기록들이 모두 다 정경 안에 들어오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대로 믿고 표현하기 보다는, 자기들이 믿고 싶은 방향대로 그리스도를 표현해 놓고 믿으려는 경향성에 더 큰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프린서플 | 정경 속의 그리스도와 위경 속의 그리스도

예수께서 12살 때 예루살렘에 갔다가 부모를 잃어 버렸던 동일한 이 사건이  두 책에 기록되어 있었지만 어떤 것은 정경 확정을 받은 반면 어떤 것에는 위경 판정이 내려졌다고 했을 때, 그 가름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관점은 편/저자가 그 이야기를 얼마만큼의 일관성 있는 구속사로 연결 지어나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곧잘 신약과 구약을 아우르는 개념/사조들 간의 연속성을 규명하면서 전개되어 나가지만, 심지어는 각기 다른 사건과 정황들이 예기치 않는 짝을 이루어가며 중첩되는 현상을 출몰시키기도 합니다. 정경만이 갖는 생명력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12살 당시의 그 사건만 해도 더 이른 사무엘 선지자의 유년기 정황과 다음과 같이 강력한 평행을 이루고 있는 사실이 그 한 예입니다.


그들은 성소/성전에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성소에 그리스도는 성전에 있었습니다. 자기 삶의 논점이 거룩한 장소에 있음을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비록 어리지만 엘리의 아들들과는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통해 그것을 드러냈고 그리스도는 랍비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즉, 하나님 말씀에 관한 이해와 관심을 통해 그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지혜가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분립했고, 또 분립돼야만 했던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순종을 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궁극적 지혜를 반영합니다. 특히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랍비들과 경이로운 대화를 이어갈 정도의 월등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 육친의 부모에게 순종함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합니다.


그들은 부모와 떨어져 있었습니다.

사무엘과 그리스도는 이미 모친의 태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모친들의 기도로 준비되었다는 점에서 구속사의 일관성을 고합니다. 또 사무엘과 그리스도는 모두 나실인으로 즉, 구별되어 자랐다는 점에서도 같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두 사람 모두는 어려서 부모와 떨어져 있었다는 점도 같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유년기 경우는 며칠 동안만 뜻하지 않게 잠시 떨어져 지냈을 뿐인데 누가가 그 단조로운 사건을 갖고 사무엘과 평행하다며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 누가의 놀라운 정경적 포인트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간의 뒤바뀜입니다. 사무엘은 부모의 집을 떠나 성소에서 지내야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땅의 부모와 거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냉담함 곧,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는 모친을 향한 반응이 지닌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기도(企圖)를 통해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가 정경의 들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였습니다.


에필로그 | 마술적 가치, 정경적 가치

자기들이 믿고 싶은 방향대로 그리스도를 표현해 놓고 믿으려는 경향성을 우리는 이단이라 부르며 그들이 만든 저작물을 위서(위경)라 부릅니다. 영지주의도 그 강력한 한 사조 중 하나입니다. 특히 Infancy Gospel of Thomas(도마의 유년기 복음)라는 이 위서는 정경 복음서들보다도 약 1-200년이나 후에 쓰인 작품으로서 위와 같은 유서 깊은 정경적 가치와는 달리 구속사와 어떠한 연관성도 맺을 수 없는 마술적 가치로만 일관하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위조된 작품임을 판단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것은 도마의 작품이라고 볼 수도 없는 위작에 불과합니다.


* 이미지 출처:

http://snpgny.org/prayers

http://www.spiritualtravels.info/2012/03/20/being-born-again-thomas-style/

http://porkrhine.wordpress.com/tag/bible/

http://buildingcatholicfaith.blogspot.kr/2012/05/mary-losing-and-finding-child-jesu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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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11. 18.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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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심청전의 서원기도

황주 도화동에 사는 심학규는 맹인이지만 양반이다. 부인 곽씨는 지성으로 불공을 드린 끝에 딸을 얻지만 애를 낳은 지 7일 만에 죽고 만다. 젖동냥으로 자란 딸 심청은 삯바느질로 아버지를 공양하는 효녀다. 어느 날, 아버지 심봉사는 귀가가 늦는 딸을 찾아 나섰다가 실족해 웅덩이에 빠지는 봉변을 당한다. 마침 지나던 몽은사 화주승이 그를 구해주며 공양미 삼백 석을 시주하면 눈을 뜰 수 있다고 하자, 심봉사는 앞뒤 가리지 않고 공양미 삼백 석을 서약한다. 가난한 형편에 약속을 후회하는 아버지 고민을 알게 된 심청은 인신제물을 구하러 다니던 남경 상인들에게 자신을 팔아 대가로 받은 공양미 삼백 석을 남기고 제물이 되기 위해 승선한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버지 걱정을 하며 인당수로 뛰어든 심청은 바다 속에서 자신의 전생, 현세, 미래를 알게 되고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 곽씨까지 만난 후 하늘과 바다의 선처로 연꽃에 담겨 돌아온다. 수면 위에 떠오른 이상한 연꽃은 남경 상인들이 돌아오던 길에 발견돼 송나라 천자에게 바쳐지고 천자는 연꽃 속에서 나온 심청을 아내로 맞이한다. 곧이어 황후 심청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 맹인 잔치를 벌인다. 심청이 떠나고 난 뒤 뺑덕어멈과 살던 심봉사는 이 잔치 소문을 듣고 황성으로 향한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상경한 심봉사는 잔치에서 황후가 된 심청을 만나 너무도 감격해 놀란 나머지 눈을 뜨게 된다. 

 도교, 불교 등으로 감싸인 이 이야기는 특히 불교의 보은사상으로 소개되며 널리 알려졌지만 실상은 철저하게 반(反) 불교 목적을 두고 형성된 이야기이다. 


프린서플 | 서원기도 무효

심청전에는 두 번의 서원이 나옵니다. 심청이는 불공에 의해 태어났지만 또 다른 서원에 의해 죽습니다. 심청전, 이 이야기는 공양미 삼백 석이 그녀 가정에 어떠한 효험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화주승이 도리어 혹세무민으로 백성을 혼란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이야기를 싸고 있는 불교‧도교‧유교 등, 종교들은 효(孝)를 차용만 했지 어떤 종교적 인과관계도 형성치 못합니다. 효는 원래부터 있는 것이지 종교로 가르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한 서원과 그렇지 않은 진정한 서원은 다음을 통해 가를 수 있습니다.

서원에는 목적물이 있습니다.

우선 전체의 삶을 서원할 수 있습니다(민 6:1-21). 나실인이라는 구별된 신분의 호칭은 당시에는 사제적  의미로 쓰였지만 현대에 와서는 구별된 우리 삶 자체로서 보편화 될 수 있습니다. 자녀를 서원하기도 합니다(삼상 1:11-28). 한나가 맺은 아들 사무엘에 대한 약속이 그 예입니다. 또, 소유물에 대해 약속하기도 합니다. 야곱의 돌기둥이 그것입니다(창 28:22).


서원에는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신속히 드리며(신 23:21-22), 반드시 실행하며(신 23:23; 전 5:4, 5), 경솔하게 하지 말 것이며(잠 20:25), 흠 없는 것으로 드릴 것(잠 22:18-25)을 말하고 있습니다.


서원이 무효화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 여성이 서원을 한 경우 양육의 책임이 있는 아버지가 듣고 부당할 때 무효를 선언할 수 있습니다(민 30:3-5). 또 여성이 결혼하기 전에 했던 경솔한 서원에 대해서는 결혼 후 그 남편이 무효 시킬 수도 있습니다(30:6-8). 결혼한 후의 서원에 대해서도 (새) 남편이 무효화 할 수 있습니다(30:9-16). 이처럼 서원은 주로 구약 중심으로 편성되어 극히 남성/부권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만으로 서원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의 삶과 절대 주권자가 펼치는 역사가 서로 한 맥락을 이룰 때에만 진정한 의미와 효력을 띱니다. 

다시 말해 한 개인의 삶이 행복을 찾고자하는 염원 속에서 서원을 형성하고, 또 그 배후에는 그 서원을 이끄는 강력한 어떤 힘이 존재하며, 마침내는 이들이 결합해 만들어내는 역사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 역사를 우리는 구별 지어 구속사라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난 것들은 모두 악으로부터 나온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으며 당시의 그 모든 그릇된 서원들을 무효화 시켰습니다(마 5:33-37). 


에필로그 | 심봉사의 서원과 우리의 서원

심청전 이야기가 종교적 혹세무민과 양반의 위선을 지적하는 것처럼 한나의 서원 기도 이야기가 한낱 무자한 여인의 한풀이 같은 정도의 서원으로 표방되고 있지만 그녀의 기도가 다른 점은 시대와 하나님의 경륜이 이미 왕을 구하는 궤도로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고지합니다. 그녀의 성취 기도가 끝나자마자 그 시대 참상이 - 사제와 성소의 타락 중심으로 - 고발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의 서원이 심봉사의 서원 수준에 매여 있다면 그 화주승의 혹세무민과 같은 책임을 우리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 이미지 출처:

http://www.animatoon.co.kr/soft/head_main_view.php?no=101&pinfo=info7
http://www.newworldencyclopedia.org/entry/Samuel
http://eglewis.blogspot.kr/2011/12/tale-of-two-mothers-mary-and-hannah.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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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6. 18.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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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프로메테우스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조물주를 만나봐야겠어. 만들어 놓고 대체 왜 파괴하려는지...,” 

이런 반신(反神)적 다이얼로그에 기인해 반기독교 이야기로 규정받기도 하지만, 그 말은 어떤 면에서 이 세상 환경들로부터 우리 인간들이 들어야 하는 목소리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어낼 수 없는 환경을 우리가 만들어낸 것으로써 상당부분 파괴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 파괴는 물과 공기와 토양뿐 아니라 생명 패턴에까지도 미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이미 그들의 조물주인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이름 짓는 권능이 그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진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면 모든 언어의 궁극점인 ‘이름,’ 즉 그 존재들이 사는 집(세계)인 그 ‘이름’을 짓는 능력은 이미 조물주에 상응한 권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로써 단지 “이름을 짓도록 하셨다”는 행위에서 그 깊으신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이며(시 92:5), 반면 “왜 만들어 놓고 파괴하려느냐”라는 어떤 이들의 소리를 통해서는 그 얄팍한 마음 됨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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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잘 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만들어 놓고 파괴하는 분이 아니라 “잘 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역사 모델로 합니다. 한 가정으로 출발해 국가의 형성과 성장 그리고 쇠락과 패망의 역사과정뿐 아니라 그 너머에 재건에까지 이르는 흥망성쇠의 장구한 ‘반복’을 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지파동맹에서 왕정 단계로 들어서는 대목은 그 역사를 감싸고 계시는 하나님 손길의 의도를 읽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청원 할 때 청원의 직접 대상은 마지막 사사 사무엘이고 하나님은 최종 결정권자였습니다. 사무엘은 왕의 제도를 좋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최고 실력자였던 사무엘이 자신의 일가가 누리는 절대 지위를 놓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내 그의 태도는 우리를 혼돈스럽게 만듭니다. 왕의 청원을 반려하고 싶어 하면서도 왕을 엄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제도를 ‘기피한다,’ ‘선호한다’라는 관점 보다는 백성들이 처한 모든 환경 속에서 항상 새로운 기대를 놓지 않으시고 복을 주신다는 그분의 속성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을 세워주셨습니다(삼상 10:24; 11:14).

왕의 제도를 반대했기에 이후에 쳐다보지도 않으셨던 게 아니라 합당한 인물이 그 자리를 맡을 수 있도록 엄선하시고, 그리고 기쁨으로 그 환경을 새롭게 열어주십니다. 왕이 되기 전의 사울은 수줍을 정도의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된 이후 그 위치를 감당하기에 몇 가지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세상 관점에서는 그만한 리더가 없을 것입니다. 체격과 그리고 용맹함, 그는 전사답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다 죽습니다. 그에게서 기름부음이 떠난 건 어디까지나 신앙적 문제 때문입니다.

다윗 왕을 세워주셨습니다(삼상 15:34-16:1).

사울이 지도자로서 실격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때에도 왕의 제도 자체를 둘러엎으시고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좋은 제도/환경이 될 수 있도록 일하십니다. 사무엘은 다윗이 소년일 때에 기름을 부어 예비시킵니다. 다윗은 시상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 깊은 시상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중요한 연관을 맺게 됩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미완의 삶으로 다음 세대를 맞습니다.

솔로몬을 세워주셨습니다(삼하 12:25).

솔로몬의 왕 됨은 자연스런 ‘세습’ 같지만 많은 역경을 거쳐서 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력 이전에, 앞서 모든 왕들에게 그러했듯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는 그 어떤 한 부분이 그에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왕이 된 후 재물과 복수가 아닌 지혜를 구하는 한 장면으로 압축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여디디아, 그는 하나님에게 사랑받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도 쇠락을 걷습니다.


에필로그 | 새로움의 하나님

이는 ‘모든 인생은 쇠락할 수밖에 없구나’를 가르치는 내용이 아닙니다. (1) 이미 예고된 왕의 제도가 지닌 속성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의 새로움/회복을 노력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3) 우리 자신의 장점을 쇠락시켜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우리는 언제나 그 새로움을 파괴해왔다는 점에서 우리 스스로가 파괴를 일삼는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6월17일 성령강림 후 제3주
본문, 고후 5: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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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 6. 11.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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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려는 계획을 이미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려는 뜻으로 간주하셨다(삼상 8:6-9). 게다가 왕의 제도를 요구한 것은 사실상 사무엘 일가의 세습을 반대하는 요구에 기반하기 때문에(8:5) 사무엘 입장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된 재앙이라도 내렸으면 체면도 세우고 좋았을 법하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한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우리는 여기서 참 목자상을 발견한다.

화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화목 시키는 사무엘상(像).
그리고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상.

그러나 우리는 이것만 가르치고 배워왔다.
어차피 당연히 망할 수밖에 없는 “사울,”
어차피 당연히 이길 수밖에 없는 “다윗,”
무시무시한 순종을 요구하는 “사무엘,”
끝으로,
다윗과 사무엘과, 그리고 내 편만 드는 “하나님.”

위의 본문이(삼상 11:14-15) 성서가 말하는 “새로움”의 모체 중 하나이며,
흔히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부여하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란 칭호에 대한
모상(模像)이기도 하다.

“새로움”은 화해 속에만 존재한다.
화해 밖에 있는 것은 새로움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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