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3. 6. 4.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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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NCD Vs. Finding Organic Church.


과거 NCD라는게 있었다. (지금도 있지만 과거만 못하기에.) 크리스티안 슈바르츠가 만든 이말을 우리나라에 들여올 때 자연적 교회 성장(Natural Church Development)이란 이름으로 들여왔다. 마이너스 성장하는 당시 개신교 환경 속에서도 신흥 메가쳐취의 패러다임을 주도했다. 


그 열풍이 지방 중소형 교회에 한창 일 무렵 프랭크 바이올라라는 사람이 쓴 책 하나가 Finding Organic Church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한 때 아마존 베스트셀러 12위에 랭크 된 이 책의 제목은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NCD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1) Natural, Organic, (2) Development, Finding, (3) Church, Church. 세 쌍의 시니피앙도 같고 의미도 같고, 그리고 무엇보다 기존 교회의 구태 패러다임을 파격적으로 탈피시키겠다는 케치프레이즈도 같다. 


NCD의 경우는 자연적 성장의 특질을 ‘지도력’, ‘사역’, ‘영성’, ‘교회조직’, ‘예배’, ‘소그룹 활용’, ‘전도’, ‘인간관계’ 8분야로 특징 짓되, 특히 소그룹의 활용과 효과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NCD도 이 과정에서 초대교회처럼 작은 교회를 지향하고 바이올라의 책도 초대교회 같은 작은 교회를 지향하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메가쳐치에 효험이 있고 후자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아마도 Development를 Finding 곧 ‘확립’, ‘발견’으로 번역하지를 않고 단지 ‘성장’이라고 오역하는 바람에 초래된 결과 같다. 한편, Finding Organic Church는 자연적 교회(Organic Church)에 반하는 그 특질을 다음 8가지로 규정한다. 

The glorified bible study(미화된 성경공부),
The special interest group(특별 이익집단 모임),
The institutional home church(제도화 된 가정교회),
The personality cult(개인 숭배),
The bless-me club(자기 수집품적 모임),
The socially amorphous party(사회적으로 모호한 집단),
The disgruntled malcontent society(불만에 찬 불평분자 집단),
The unwritten liturgy driven church(비성서적 예배가 이끄는 교회)


프린서플 | 다른 복음은 어떻게 식별되는가.


우리 나라 경제성장에 발맞춰 급성장한 기독교가 지나치게 귀족화되고 세속화되자 여기서 낙오되고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을 틈타 시한부종말론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때가 1992년이다. 엄청난 파장을 불러온 이 휴거소동이 해프닝으로 끝나버리는 바람에 종말론이나 은사주의는 당분간 소강 상태인 채 물러난다. 대신에 기독교는 이에 대한 반동으로 사회와의 문화적 소통에 상대적 관심을 돌리게 되는데 그런 과정에서 다양한 열린예배 형식이 모색되고 중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문화엔진을 장착한 강력한 패러다임 틀이 교회로 유입된다. 때를 같이해 2000년대 초 서구의 다채로운 성장 모델이 수입되면서 과거 국가 성장기 때와는 차원이 다른 기술적 프로그램들이 속속 도입된다. Cell, 목장, 소그룹운동, 총동원...이런 용어들이 거의 모든 교회에서 목격되며 NCD라는 이름도 이때 접한다. 그러나 지금은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 아랍권 체제의 붕괴, 기아, 천재지변, 그로인한 원전폭발 재앙..., 누구도 통제할 수 없고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세계를 덮치고 있다는 불안감 속에서 기독교는 지엽적 이데올로기형 종교, 웰빙·웰다잉 종교,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꿔입은 종말론과 은사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진리에 참되려면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대결 상황을 안 떠올릴 수가 없다(왕상 18장). 바울은 본문에서(갈 1:1-12) 다음과 같이 그 식별 방법을 제시한다.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다.


저마다 “사람 뜻 따라 된 것이 아니라”고 하기에 분별이 어려운 것같지만 바울처럼 자기 됨이 어디까지나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즉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았다”고 하는 확실성이 있으면 구별할 수 있다.


다른 복음은 없다.


당시 바울이 “다른 복음”이라고 했던 그 복음은 예수를 믿는다 할지라도 전통에 의거 할례까지 추가로 받아야 완성된 믿음이라고 가르치던 그 복음을 말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대결(왕상 18;20-21) 당시 훼파 대상이었던 그 편에 바울이 위치 되고 마는 셈이고 (왜? 바울의 복음은 이방인의 복음이니까) 바울이 “다른 복음”이라고 진노했던 그들이 도리어 과거 엘리야 편에 서 있던 전통 이스라엘이 된 상황이다. 


이같은 다름(difference)의 발생을 어떻게 오늘날 적용할 수 있을까? 그런 식의 다름이라면 오늘날 동성애도 WCC도 자연스레 허용해야 된다는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시간의 지연과 거기서 오는 차이(difference)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복음이 엘리야의 자리를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바울의 다름은 <변화>였고, 전통의 자리에 섰던 그들의 다름은 <변질>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할례라는 전통을 차별의 용도로 전락시켰으니까.)


포스트 모더니즘 즉, 해체의 시대에 다름(difference)은 늘어지거나 지연될(différer) 때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제아무리 자신이 달라지지 않았다 주장하더라도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 그것은 거짓말이다. 달라지지 않은 자가 있던가? 새삼 자연적”, 유기적”이란 말은 해체의 다른 말이 아니었던가? 문제는 어떻게 달라지느냐인 것이다. 변화인가 변질인가.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에도 변치 않는 게 있기는 하다. 에크리튀르, 즉 ‘흔적’이나 ‘자국’은 남게 돼 있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성서라고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다.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거나 배운 게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직접 계시라는 말인데 ‘다른’ 직접계시와는 또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바울, 그의 생애로 보나 문법적으로 보나 그 계시는 한 마디로 ‘변화’를 말한다. 변화가 계시이다. 그렇기에 바울의 계시로서 그의 변화는 오랜 기간 집중받아 온 것이다.


에필로그 | 집합을 위한 분할인가 집단을 위한 분할인가.


자연적 교회(Natural Church)와 유기적 교회(Organic Church)는 둘 모두 초대교회를 표방한다고 하였다. ‘작은 것’, ‘분할된 것’을 지향하는 면에서도 같다. 그래서 ‘흩어지고,’ ‘모이는’ 교회로서 유연성도 같게 나타난다. 하지만 그 분할이 꾀하는 ‘전체’ 내지는 ‘집합’에 관한 문제가 둘을 가른다. 그 분할이 1인을 위한 집단으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분할된 1인들이 집합 자신으로 존재하는 지의 문제는 엘리야가 850명의 바알 사제를 맞닥뜨린 현장과도 같은 것이다. 




이미지 참조:

www.ely.anglican.org
dallasnaz.com
joinedtoh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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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7. 23.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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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만리장성  

B.C 246경 중국에 영정이라는 소년이 왕이 되었습니다. 섭정을 받던 그는 장성한 후 섭정 무리를 척결하고 친정 체제를 구축하여 천하통일을 꾀합니다. 우선 가장 약한 한나라부터 멸망시켰습니다. 다음 조나라(228년), 위(225), 초(223), 연(222), 그리고 제나라까지(221), 마침내 39세 나이로 중국을 통일합니다. 왕이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삼황오제라는 말에서 ‘황’과‘'제’를 따 황제라 칭하고, 자신은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라 부르도록 했습니다. 이가 바로 진시황입니다. 그는 아방궁을 위시한 무리한 토목공사 강행과 대규모 문화탄압사건(분서갱유)으로 중국 사상 최대 폭군으로 불리지만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2천년 왕조의 기본틀을 닦은 인물입니다. 만리장성도 유명합니다. 그가 150만 여명을 동원 시킨 이 공사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이 긴 성벽을 대체 왜 축성했는지는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북방 흉노의 침임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이 성이 실제 그들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평생 불노초를 찾아 헤맨 것으로도 유명한 그는 불과 49세로 죽습니다. 사실 그 보다 평균 두 배는 더 사는 우리들은 그가 볼 때 불노초 먹은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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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그리스도인들이 세우는 세 가지 담

예수님께서 자기 육체로 허물려고 했던 - 이미 허무셨지만 어떤 자들에게는 여전히 존재하는 - 담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천국과 지옥 사이의 담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관념적 장소가 아니라 육체와 관념 모두로써 인식되는 곳입니다. 특히 천국은 우리가 반드시 들어가야 할 궁극적 귀착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만 들어갈 수 있고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너희가 가는 천국이라면 함께 가고 싶지 않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천국이 잘못된 것입니까? 이슬람의 천상계는 살아생전 공로 있는 남성들의 경우 - 예를 들면 종교적 열심의 자살 테러 - 원하는 만큼의 여성들과 같이 살 수 있는 곳입니다. 여성들은 그런 천국엔 안가려 할 것입니다. 우리의 천국이 여전히 담이 쳐져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그릇된 행동 양식과 그에 따른 천국의 설명일 것입니다.

둘째, 교리라는 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가만히 덕을 쌓고만 있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그분의 행실과 태도를 소유해야 합니다. 세례(침례)가 그것입니다. 성만찬이 그것입니다. 교회라는 곳은 세례와 성만찬을 위해 가는 곳이지 다른 이유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 중요한 교리 말고 다른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그러나 이 교리는 의식과 예전이라는 미명 아래 교파적 교리보다 부차적 수준으로 격하되어 단지 천국으로 가는 일종의 수속으로 자리해 있거나, 성장 테크닉에 가려 있습니다. 담을 형성하는 교파적 교리나 성장 기술 프로그램은 본문에서 지탄하고 있는 ‘손으로 행하는 할례’에 지나지 않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사람들이 운집하는 어떤 유명한 목사의 집회에 참석해보고는 “저 목사가 나를 장로교인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말하고는 두 번 다시 그곳에 안갔다고 일기에 기록합니다. 프랭클린이 신심이 부족해서 그런 말을 했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셋째, 빈곤이라는 담입니다.

배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구원은 빈곤으로부터의 구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빈곤을 안 느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요즘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절대적 빈곤> 퇴치를 사역기치로 하는 한 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떡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떡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절대적 빈곤의 퇴치를 위해서는 무모하리만큼 도전하려고 하지만 상대적 빈곤의 문제까지 해결하려고 나설 마음은 없습니다.
<상대적 빈곤>에 처해있는 자들의 빈곤 문제를 배부른 자들의 나약해 빠진 푸념 정도로 간주하는 것은 그릇된 진단이라는 입장이 저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산업혁명 이후의 인류 빈곤은 전적으로 상대적 가치가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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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것이 상대와 상대 사이의 ‘담’을 주도하며, 그리고 그것이 결국에는 절대빈곤에까지도 맹위를 떨치게 되는 것이고, 그렇기에 ‘빈곤’ 그 자체보다도 선행된 악을 우리는 ‘사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이’가 바로 본문에서 지목하는 ‘담’입니다. 십자가가 허물고 평화를 세우려 했던 것도 이 벽들이며, 이 벽이 또한 그것을 도리어 방해하기도 합니다.


에필로그 | 담을 허무는 방법 

우선 진시황이 친 벽인 만리장성을 칭기즈 칸이 허물 때에 쓰는 방법이 있습니다. 성벽에서 잘 보이는 위치에서 큰 가마솥에 기름을 끓이고는 포로들을 그곳에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성벽 위에 있던 자들이 그것을 보고 겁먹는 바람에 사기가 꺾여 그 담이 붕괴되었다는 얘기 입니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군대는 공병의 공성전으로 유명합니다. 아무리 높고 강한 성벽도 그 곁에다가 같은 높이로 공성을 하여서는 거기서 상대 성벽 담을 공략하는 전법이었습니다.  
 
끝으로 본문의 저자 바울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는 ‘가정으로’ 제국들과 모든 세계의 담을 무너뜨렸습니다. ‘종교로’ 담을 허문 게 아닙니다. ‘가정으로’ 허문 것입니다. 로마서의 마지막 장에는 당시의 하우스쳐취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 명단이 나오고 있습니다. 몇 되지도 않은 가정이 로마제국의 담을 넘어선 좋은 예입니다. 로마제국뿐 아니라 진시황과 칭기즈칸의 나라들은 바울의 그것보다 결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종교’가 아닌 ‘가정’으로 담을 붕괴시켰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미문(美門)교회가 하우스쳐취라서 드리는 말은 아닙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7월 22일 성령강림 후 제8주
본문, 엡 2:11-22.
 (c.f. 삼하 7:1-14a; 시 89:20-37; 막 6:30-34, 5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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