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2. 12. 23.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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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어떻게 기쁜가

“슬픔도 기쁨의 한 종류다”(Thomas Fuller)라는 금언이 있다. 부정과 긍정의 명확한 경계를 허무는 듯한 이런 표현은 언뜻 생각할 때 여느 작가의 시문학적 감성이 빚어낸 표현 정도로 생각될 수 있지만 이는 매우 구조적 통찰이 깃든 말이라 할 수 있다. 우리 각자의 생애에서 최초로 기뻤던 순간을 곰곰이 기억해내보자. 내 생애 가운데 가장 기뻤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여보자. 또 오늘 가장 기쁜 것은 무엇인지 하나만 생각해보자. 그리고 내일 혹은 미래에 기쁠 수 있을 것은 무엇인지 세 가지만 떠올려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최초로 뭔가 받았던 것을 기뻐한다. 또는 누군가와 만나게 된 것이 기쁘다. 그런가 하면 어디로인가 갔던 장소를 기뻐한다. 장차 갈 곳도 아울러 기뻐한다. 그리고 뭔가가 된 상태나 또 될 것에 대해 기뻐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쁨은 아무것도 받지 못할 뻔했던 그것이 기쁜 것이다. 헤어질 뻔한 그것이 기쁜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함께 못하면서도 헤어지지 않았던 그 때를 기쁨으로 간직할 수 있는 것이고, 지금 그곳에 있을 수 없으면서도 그곳에 있던 사실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처럼 다신 오지 못할 여기가 기쁜 것이며, 우리는 그런 식으로 모든 기쁨을 산출한다. 따라서 진정한 기쁨은 언제나 그 반대로 처해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나 슬픔과 함께 임하며, 그렇기에 슬픔이 기쁨의 한 종류가 되는 것이다. 이런 기쁨에 속하지 않는 기쁨이라고는 아편과 같은 마약뿐이다.


프린서플 | 무엇이 기쁜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고 하였을 때 그 기쁨은 감각기관을 자극해 얻어지는 쾌감이거나 어떤 심리적인 효과로부터 짜내는 막연한 생리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명확하고 분명한 기쁨입니다. 특별히 성서는 그 기쁨에 내재된 형식과 수순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내고 있습니다. 


첫째, 용서의 기쁨.

스바냐 3장 1절에 나오는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은 어느 퇴폐한 이방 나라의 환락가를 이르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지상 최고의 성지였던 예루살렘을 지목하는 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주변국들에 쏟아져 내리던 심판이 점점 이스라엘이라는 구속사 중심축에까지 다다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종말은 언제나 특정 장소나 특정인에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적 지평 속에서 전개 되어 모든 자에게 예외 없이 들이닥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자> 가운데서 용서 받은 자만 살아남아 <남은 자> 칭호를 받습니다. 용서의 기쁨은 그 남은 자들의 기쁨 입니다.


둘째, 남은 자의 기쁨.

그러나 남은 자의 기쁨이란 ‘나만 살아남아 다행이다-’라는 식의 기쁨이 아닙니다. 남겨지지 못한 이웃들과 도시, 그리고 그곳에서 남겨진바 된 자로서 짊어져야 하는 그들과의 연대(solidarity) 된 회한들, 이런 조각들이 남은 자의 기쁨을 조성합니다. 이것이 바로 “항상 기뻐하라”라는 지령의 아이러니를 성립하게 만드는 것이며, 이것이 또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을 산출해내게 만드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생명의 기쁨.

생명은 새로움을 뜻합니다. 새로움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부터의 새로움이라는 뜻도 있지만, 그 연대 된 옛 조각들 속에서 다시 싹트는 새로움의 뜻도 있습니다. 전자가 ‘창조’라면 후자는 우리 삶과 더 밀접한 ‘구속/구원’과 맞닿습니다. 즉, ‘용서,’ ‘남은 자,’ 이러한 (기쁘지 않은 몇몇) 주제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면 생물학적 생명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산고의 생명의 기쁨도 알기 어렵습니다.


에필로그 | 기쁨은 슬픔의 한 종류다.

다시 한번 다음 질문들을 곰곰이 되짚어 봅시다. 

(1) 내 생애에 최초로 기뻤던 순간은 무엇인가? (2) 내 생애 가운데 가장 기뻤던 것은 무엇인가? (3) 오늘 내게 가장 기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4) 내일 혹은 미래에 내가 기뻐할 것은 무엇인가? 대개는 슬픈 것들이 기쁨으로 오래오래 남습니다. 그러므로 본질상 기쁨은 코미디가 아니라 슬픔의 한 종류인 것입니다.



* 이미지 출처:

http://birdhousebooks.blogspot.kr/2011/11/vintage-christmas-books-for-children.html

http://www.funinmarriage.com/page/10/

http://www.squidoo.com/ohenrystories

http://floricane.typepad.com/buttermilk/2010/01/joel-priddys-perfect-valentines-day-gift.html

http://youth.cheongacamp.com/join/notice/_view.asp?no=369&page=18

http://cdntv.co.kr/s01_1.htm?search_content=&menu=&now_page=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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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12. 2.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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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라는 말은 예수 재림시에 신도들이 하늘로 들림받는 성경 예언이 1992.10.28에 일어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의 캐치프레이즈였다. 그러나 당일 예언은 빗나갔고 리더였던 목사는(이장림) 구속되었다. 구속 된 사유는 예언이 빗나가서가 아니라 사기 및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였는데 그의 자택에서는 1993.5.22 만기 도래되는 환매채와 수표 1억9300만원, 그리고 미화 2만6700불이 발견되기도 했다. 반면, 신도중에는 퇴직금을 모두 바친 철도공무원, 아들과 가출해 선교회에 합류한 주부, 여기에 합류를 막는다고 음독자살한 여고생, 그리고 심지어 ‘들림’을 가볍게 하기 위해 낙태를 한 임산부도 있었다고 전한다.

                         * 사진 설명: 당시의 종말은 북한의 남침과 연계되어 나타날 것으로 주장되기도 했는데
                                                 목사들 중에는 벌거벗고 그것을 전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사야처럼?...


                                * 사진 설명: 이후 92년 11월 2일에는 동아일보에 소형광고로 사과문이 게재되기도 했다.
                                         

프린서플 | 바른 종말론

휴거(携擧)라는 한 현상에 몰입했던 이 단체의 핵심 리더였던 이장림씨의 목적이 단순 금전사기였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서에도 없는 어휘인 이 ‘휴거’라는 말이 다름 아닌 이장림 그 자신이 과거 번역 과정에서 만들어낸 것이었다는 점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생명의 말씀사 소속 번역자였을 정도로 지식에 문외가 아니었을 그가 1978년 Ernest Angley 소설 Raptured를 번역하면서 휴거라는 한자식 표기를 처음 들여온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설류를 우리는 일종의 <묵시문학>이라는 장르로 분류합니다. 성서 자체가 이러한 묵시 환경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을 정도로 그 유래가 깊은 것이지만, 올바른 이해가 없다면 얼마든지 또 그런 혼란은 반복될 것이며, 실제로 강력한 스마트 환경에 진입한 오늘날도 이미 도처에서는 동종의 현상들이 포착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묵시를 이렇게 계시로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공의의 파괴.

종말의 주제는 휴거, 바코드, 베리칩이 아니라 <공의>입니다. 왜 종말이 오는 지, 왜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종말은 실제로 유대교 형성의 배경이었습니다. 유대교는 태초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처음’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맞지만 그 창조주를 언제 기억해냈는지가 중요한데 그 때가 바로 ‘종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죄도 한 개체로서가 아닌 하나님 공의에 관한 포괄적 침범을 다룬 것이며, 이후 전개되는 모든 죄상들 역시 공의의 붕괴를 기록한 것이고, 또 그것은 오늘날의 종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의의 심판.

심판은 회피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다미선교회>의 실패는 휴거를 마치 심판 회피의 거점으로 축소한 데 있습니다. 심판의 장소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십자가 도상입니다. ‘들림’도 그곳에서 발생합니다. 계시록을 이 전제와 분리시켜 읽을 때 우리는 또 다른 심판대, 또 다른 예수를 소개 받게 되는데 십자가 도상과 그곳에서 발생한 사건보다 더 강도 높은 종말이란 있을 수도 없고 또 있어서도 안됩니다. 이단 되기 십상입니다.

공의의 회복.

성서가 남긴 묵시와 작금의 묵시현상 간 가장 큰 차이점은 ‘회복’을 말하는 가에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회복을 의미했으며, 광야 성소도 회복이었으며, 다윗 성전도, 그리고 예수의 살과 피 역시 회복을 기표로 갖는 종말이었습니다. 구속사적 종말은 언제나 공의의 회복을 목적하고 재연되어왔습니다. 파괴와 불안이 아닙니다.


에피로그 | 반복의 도그마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는” 사람들 가운데 근본적인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은 한 마디로, 성례전의 ‘반복’에 실패한 자들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초림 이후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종말과 심판은 바로 이 성례전에서만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종말에 가서도 보전해야 할 최선의 도그마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본문의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는 대목은 마가와 마태복음에 공히 나오는 본문인데 유독 여기 누가복음에서 만은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아닌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로 기록된 것을 봅니다. 왜 “모든 나무”가 추가된 것일까. 그것은 지정학적 유대교 팔레스타인 만의 독점적 사건으로서 종말이 재생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나라, 모든 시대에 발생하는 일종의 반복을 고려한 번역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 이미지 참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110200209219013&edtNo=3&printCount=1&publishDate=1992-11-02&officeId=00020&pageNo=19&printNo=21988&publishType=00020

http://history.khan.kr/176

http://wnewskorea.cafe24.com/bbs/board.php?bo_table=weekly_issue&wr_id=199

http://ndarticle.joins.com/pad/2012/10/25/2012102519441539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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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 9. 7.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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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되지 못할 것은 그들의 하나님 없음이다. 이는 그분의 영원하신 힘이 내포된 그분의 언어가 명백한 환경적 행위 속에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미 그분을 저항하는 예배를 일으켰음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자연계(natural)와 영계(spiritual)와 그리고 그 모든 권능들(other forces)의 중심선상에서 그것을 드러내셨다.

또한 용서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의롭지 못함이다. 그것은 그분의 영원하신 신성에 대한 증거를 내포한 명백한 요인들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들의 오만을 일으켰음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스스로가 일으키는 요인들 속 내재된 의미로서, 곧 하나님의 언어가 그들의 체험을 강타하는(welter)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감싸인(내재된) 하나님의 진리, 그리고 그분 진노에 관한 환기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핑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계시 내지는 심판) 어떤 선택 가능한 것으로서 우리에게 열려져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으로부터 멀리계시지 않으시나니, 그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안에,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 이 안에, 그리고 우리의 존재됨 속 이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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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 9. 7.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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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게 속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분명히 보여졌고-”

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보인바 된 우리 겸손의 결핍, 기억의 결핍, 두려움의 결핍 등이 우리 앞에서는 보인바 되지 않는, 불가피한, 그렇지만은 그것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보인바 되는 (우리의) 자연스러움이다.

하나님의 그 모든 불가사의한 피조물 - 예컨대 동물원으로서 이 세계? - 우리가 답은 갖고 있지 않은 그 수많은 문제들은 무엇인가? 그러나 하나님 한 분, 하나님 그분 자신, 그분만이 그 대답이시다.

차분하고도 진정한 편견 없는 신심을 통해 그 신성한 “부정하심,” 곧 거절하심의 응답은 확립될 수 있는 것이며 또 이해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 스스로 저지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 폭로 됨에서 오는 그 건강한 “위기” 속으로 우리 존재를 운반해오는 일을 저지할 수 있는 것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반론할 여지가 없는 실체 곧, <확실히 보인바 된 그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타내지 않으심>이다. 예를 들면 부활이다. 그것이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영원하신 권능과 신성”(롬 1:19)인 것이다.

이것이 말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이야 말로 우리에게는 그분에 대해 알만한 것이 없었다는 것, 우리는 그분이 될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렇기에 그분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 그 이유 말고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여기에 모든 신들을 뛰어넘는 그분의 탁월함이 드리워져 있다. 여기에 하나님으로서, 창조주로서, 그리고 구세주로서(롬 1:16) 그분의 기호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의 심판대 아래 이미 서 있던 이들에게는 노출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그 심판을 알 수 있었고, 그리고 그것을 사랑한다고 했었다.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롬 1:20)인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보는 데 실패하고 듣는 데 실패한 데서 비롯된다. 보는 눈을 가지고 듣는 귀를 가지고서 그들은 그들 할일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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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 속에서2012. 8. 15.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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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려운 일을 하나 하고 있다. 10년도 넘은 글들을 통해서 나를 심판하는 작업이다. 흔히 밤새 쓴 편지나 일기를 다음 날 아침 찢어버리고픈 정신 역학을 감안한다면, 이 10년도 넘은 텍스트는 나의 심판주다.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가 긍정하든 부정하든 각각이 커다란 시간표 안에 존재한다. 종교적으로 생각하든 종교를 떠나서 생각하든 어쨌든 인간은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혹은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진행'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찢어지고 헤졌다가 봉합된 시간 위에 서있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누리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시간에 머무르기도 하는데, 우리가 그 모든 시작은 목격 하지만 도무지 끝은 알 수 없다. 끝이 어떤 지도 알 수 없지만 끝이 어느 지점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나는 어디 쯤 와 있는가. 한번 쯤 생각해야 하지 않는가. 그냥 다람쥐 쳇바퀴 돌듯 그냥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어디 쯤 와 있는가. 당신이 만약 스스로를 느끼고 또 어디쯤 와 있는지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면 당신의 인생이 지금 그렇게 그 꼴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

<나는 어디 쯤 와 있는가.> 라고 하더니 갑자기 <당신이 만약 스스로를.... 당신의 인생이 지금 그렇게 그 꼴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로 마무리 짓고 있다.

나는 어떻게 감히 알 수 없는 상대를 향해 <그 꼴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 말할 수 있었을까? 복음을 그런 식으로 던지고 있었던 것일까? 누구를 목적하고 있을까? 그럴 자격이 과연 있었을까? 이것이 사제 된 동력이었을까?

저 자아가 말하고 있는 그 시간표라는 틀에 날 넣을 때 정작 난 어떤 결말에 와 있는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1년 4월 26일자 텍스트 앞에서
나의 자아를 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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