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2. 12. 23.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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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오적

오적(五賊)은 1974년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어 긴급조치4호 위반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 김지하를 처음으로 감옥에 보냈던 시다. 판소리 형식의 한자어/비속어를 섞어가며 세태를 풍자한 이 시는 <사상계>라는 교양지가 5ㆍ16군사혁명 10주년을 맞아 특집을 내면서 18쪽에 달하는 지면을 할애해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군)장성,” “장차관,” 특정 사회 지도층들을 한일합방 을사5적에 비유해 비판하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담고 있다. 특히 당해에 발생한 ‘3ㆍ1고가도로 정인숙 피살사건’을 정치 사건으로,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를 고위 공직자 부패에 기인한 사고로 묘사했으며, 그 오적들을 잡으러 갔던 포도대장마저 결탁해 이를 고변하는 힘없는 백성들만 도리어 잡아 가둔다는 이야기로 마친다. 당시 2030세대였던 그는 사형선고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나 <인혁당사건>과 관련해 재차 구속되어 또 무기징역 형을 살다가 유신정권이 붕괴되고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면서 1980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된다. 석방된 이후에는 각 종교의 생명사상을 수용하고 생명운동을 벌이는 데 힘쓰다가 1991년 분신자살 정국에 우파 일간지 조선일보 사설에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 치워라”(91.5.5.)는 글로써 분신 정국을 강하게 규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급기야 2012년 11~12월에는 <이 가문 날에 비구름>이라는 강연을 통해 대선 후보 박근혜를 사실상 지지하기까지에 이른다. 그녀는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던 정권 독재자의 딸이다. 그의 커밍아웃이 유리한 정당은 호재로 활용하는가 하면 불리한 정당은 변절이라고 폄하하는 등, 극단의 평가로 갈리고 있다.


프린서플 | 변절인가 변화인가

우리는 변화하는가 변절하는가? 우리 사회는 변절하지 않는 것을 최고 미덕 가운데 하나로 올려다 놓고 추앙하면서도 변화하지 않는 것은 또 구태라며 규탄 합니다. 변하라면서 변치 말라는 셈입니다. 이 모순된 이중성을 사회적 세대 간의 이행에서 주로 만나게 되며, 한 가족 속 아버지와 아들 또는 어머니와 딸 세대 간의 이행에서도 만나며, 심지어는 율법과 복음이라는 양날의 계시 속에서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각각의 생명을 잉태하고서는 서로 알아보고 축복하는 장면을 통해서는 그 세대 간의 이행 순리가 어떤 것인지 잘 말해줍니다. 


둘은 같으면서도 달랐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는 서로 맞닿아 있는 ‘율법과 복음,’ 두 세대를 표징합니다(눅 16:16; c.f. 마 11:11-13). 그래서 둘은 출생의 때로부터 그렇게 같으면서도 달랐습니다(1:5-25, 26-38). 요한의 부모는 나이 많아 아이가 없지만(vv. 5-10) 예수님의 부모는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가 없는 것입니다(vv. 26-27). 수태계시가 양쪽 모두 천사에 의해 전해지지만 한 편은 아버지 사가랴에게(v. 12-13) 다른 한 편은 모친 마리아에게 전해집니다(v. 29-30). 그리고 그 천사가 전자에게는 나타났고(v. 11) 후자에게는 들어가(v. 28) 전합니다. 아울러 무엇보다 사가랴에게는 “그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v. 15) 마리아에게는 ‘주 앞에서’가 아닌 “그가 큰 자가 될 것”(v. 32)이라 말합니다. 양자는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있지만 앞과 뒤는 명확히 갈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갈립니까?


이전 세대가 적극적으로 수용합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주의 어머니로 알아보고 자기 복중에 있는 요한이 뛰어놀 정도로 기뻐한다고 증언합니다. 실제로 그는 성인이 되어 회개케 하는 사역을 선행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말할 때 그리스도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는 말로써 새로운 세대를 수용하고 적극 예고합니다.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인 것입니다.


두 세대가 생명이라는 주제 속에서 하나가 됩니다.

두 세대의 만남은 이미 태중 곧 여성성 속에서의 만남으로 이루어졌다고 누가는 증언합니다. 남성에 대비된 성으로서 여성성이 아니라 생명의 공간으로서 여성인 것입니다. 여기서의 축복이 무병장수의 기원 같지만 사실 요한과 예수 양자 모두는 곧 죽을 운명으로서 하나 됩니다. 현대 웰빙 식의 생명이 아닙니다. <큰 자>의 죽음은 만인을 살리는 죽음으로, <주 앞에서 큰 자>의 죽음은 그 만인을 위한 생명 사역의 길을 예비하는 죽음으로. 죽을 운명을 지닌 두 다른 태의 생명이 만나서 서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수많은 세대교체가 발생합니다. 선배와 후배,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특정 세대 정권과 그 다음 세대 정권이 어떤 형태로든 교체를 야기 시킵니다. 여기서 변화가 충족되지 못한 교체는 구태로 판정 당하고, 또 마음에 들지 않는 변화는 변절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 세대교체의 형식과 과정들이 가져오는 이 같은 모순의 장벽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유일한 변화는 오로지 <화해>를 동반하는 변화뿐입니다. 화해에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필로그 | 김지하의 오적(五賊)에서 <생명>까지.

그런 점에서 김지하의 커밍아웃은 확실히 ‘변화’ 맞습니다. 그의 변화된 텍스트에는 생명과 화해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거역하는 세력을 지칭할 때 쓰는 ‘수구’란 말이 최근엔  단지 노인층을 겨냥한 전용어가 되어 버린 상태지만, 설령 그들이 젊다하더라도 노인 김지하처럼 생명을 향한 부단한 변화가 없다면 변치 않는 그들이 도리어 수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이미지 출처:

http://www.ahammalgul.com/?document_srl=13543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2052053081

http://pasanetworkusc.blogspot.kr/2012/09/pasa-network-executive-board-election.html

http://www.hanscomfamily.com/2010/05/31/today-in-history-105/

http://aesaintsoftheday.blogspot.kr/2010/06/nativity-of-st-john-baptist.html

http://jamestabor.com/2009/12/

http://charmedyoga.com/tag/freedom/

http://educationworksonline.wordpress.com/2010/01/12/education-and-free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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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2012. 9. 8.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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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잘 자라라고 물을 주었을 때, 그 식물의 대가 굵은 것에는 아무 이상이 없지만, 갓 솓아나온 가는 것은 감당을 못하고 흙 지면 위로 나와있는 경계로부터 하늘을 향한 부위가 부러져 버렸다. 썩은 것이다.

흙 속의 수분량을 조절하지 못하면 그 습윤을 타고 하늘로 오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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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2012. 8. 1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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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오르던 산 속 나무숲이 마치 정글처럼 보여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무마다 넝쿨들이 휘감아 있다. 저렇게 높은 길이를 지난 몇 달 새 다 휘감아 올라갔다. 기둥이 되어 준 나무라는 식물도 그렇지만, 한해살이에 불과한 저 식물들의 흡입력이 더 놀랍다. 여러 해가 아닌 단 몇 달 새에 자신의 키를 다 흡입한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식물이지만 이들에게 프쉬케가 없는 게 아니다. 프쉬케의 가장 기본 능력인 섭생능력을 토대로 살아간다. 생명흡입, 섭생능력 곧, 영양섭취의 힘은 아래로부터 위로 밀어 올리는 힘인가 위에서 빨아당기는 힘인가? 그러면 이들의 영혼은 뿌리인가 아니면 그 줄기와 잎의 끝인가? 또한, 그런 점에서 이들의 영혼은 부분인가 전체인가?

죽은 것에는 흡입력이 없다. 공기도 물도 들이마시지 못한다. 죽은 나무와 풀에 흡수되는 물은 스며드는 것이지 섭취된 것이 아니다. 아무리 많이 스며들어도 그것은 썩을 것이다. 이것으로 생명을 판단한다.

우리 신체의 영혼의 힘은 끌어당기는 힘인가, 밀어 올리는 힘인가? 넝쿨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부분인가 전체인가? 심장과 압력이라고 말하겠지. 압력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호흡, 곧 영양섭취로서 프쉬케의 힘이 근원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예컨대 기독교 정체성 속에 행해지는 금식은 신에게 부려보는 투쟁도 아니고 극기와 맞바꿔 얻어내는 마술의 힘도 아니며, 그것은 바로 가장 기본이 되는 그 섭생의 프쉬케를 불러 깨우는 노력인 것이며, 그 프쉬케가 대기 중에 흩어진 프뉴마(바람)와의 운동일 때 의미가 있다. 이 유일한 운동력이 아니면 어떻게 (1) 풀고, (2) 끌러주고, (3) 자유케 하고, (4) 꺾는 모션을 불러일으키겠는가?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

따라서 우리가 굶을 때 - 그것은 의도적인 단식일 수도, 가난함의 주림일 수도 있지만 - 우리는 죽음과 거의 동시에 생명의 힘을 체험한다. 혀의 감각에서 비롯되는 시장기와는 다른 영혼으로부터 밀어 올리고, 끌어당기는 허기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라”는 통찰은 지당한 것이다. 이 섭생이 영성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면서도 관문과도 같은 영혼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에게 친근한 허기는 영양의 굶주림이라기보다는 감각 혼, 즉 탐욕의 허기에 더 가깝다는데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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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 8. 16.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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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은 그 기본 개념 자체가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는데 흔히 죽은 자들이 받는 전리품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사실 넌센스다. 죽으면 이미 결격이다. 영생은 믿다 죽으면 받게 되는 보상 정도로 인식되어 있지만, 이 영생은 오직 산 사람들의 생명이다(요일 5:11a). 더욱이 영생은 그 믿음 행위에 대한 증거라고까지 말한다. 그렇다면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생을, 그리고 죽으면 받게 되는 것인 줄 알았던 그 영생을 어떻게 증거로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영생은 “아는 것”이라고 했을 때에(요 17:3) 그것이 가능하다. 즉 “아는 것”이 바로 “믿는 것”의 증거인 동시에 우리가 산 채로 소유하고 있는 생명이다. 한 마디로 영생은 죽은 자들이 아닌 산 사람들이 산 채로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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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7. 9.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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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마지막 잎새

워싱턴 광장 옆 그리치니라는 주택가는 집값이 싸 화가 촌이 자리 잡은 곳입니다. 어느 해 겨울 그곳에 폐렴이 나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습니다. 몸 쇠약한 화가 존지도 이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쇠잔한 그녀는 창밖의 담쟁이를 바라보며 그 잎들이 모두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자신의 생명도 꺼져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녀가 겨울을 넘기기 어렵다는 의사의 말을 그녀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친구 수우는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병간호 하느라 의뢰받은 그림을 기간 내에 그릴 수 없던 차 수우는 아래층 화가 노인 베어먼을 모델로 청하면서 그에게 존지 이야기를 건넵니다. 명색만 화가였지 별 볼일 없는 그 노인 역시 병약한 그녀의 망상을 꾸짖습니다.
단풍잎들이 하루하루 떨어져 드디어 마지막 한 개가 남았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병마와 싸우는 마지막 고비의 긴 밤을 넘긴 존지는 다음 날 밖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여전히 한 개만은 지지 않고 있던 것입니다. 곧이어 베어먼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풍잎이 질 것이라고 말한 그날 그가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담벼락에 잎을 그려놓았던 사실도 알게 됩니다.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희망과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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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두 종류의 믿음

반도(半島) 특성상 1,000여 회에 가까운 외세침입을 받아 왔던 우리나라만큼이나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인들 역시 바람 잘 날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크게 다섯 제국으로부터 - 앗수르 제국(지금의 이라크 북쪽지역), 바벨론 제국(이라크 남부), 페르시아(이란), 헬라(희랍 중심), 그리고 로마 제국 - 침탈을 겪습니다.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에 그들이 시도했던 문화 삭제의 잔상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성서적 이스라엘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이 성서만큼 미치지 못하는 현상은 그들의 오랜 침탈 기간을 반증하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역사에서 삭제된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 처했던 그들을 다시 살려낸 건 어디까지나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상황 속에서 믿음은 두 가지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희망’이라는 형식입니다.

패망하여 나라도, 가정도, 성전도 모두 파괴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그 모든 것들이 무산되어 버렸는데도 몇몇은 그 상황을 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당초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약속들이 진정 무엇을 의미했던 것인지를 거듭 묵상하고, 또 그 묵상을 통해 반성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믿음 즉 ‘희망’을 발견하고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둘째는 ‘절망’이라는 형식입니다.

모두가 희망을 선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쇠락해가는 상황을 바라보며 하나, 둘...., 무너져 내리는 낙엽의 개수를 세는 듯한 믿음도 있었습니다. 마치 그 잎새들, 특히 마지막 잎새가 살아남기를 바라는 희망처럼 마음에 깃들지만 명확하게도 그것은 ‘절망’입니다. 저 잎들이 다 떨어져버리고 나면 “난 더 이상 살지 않겠노라.”는 <시한부 신념>을 기저로 갖기 때문입니다. 신념은 체념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시한이 지나면 산화해버리고 맙니다.

셋째, ‘없어지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없어질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깨뜨리거나 부술 수 있는 게 아니며, 녹이거나 불처럼 끌 수 없는 독특한 형식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없어질 것’들은 애당초 믿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에필로그 | 절망이라는 믿음의 형식이 아닌 희망이라는 믿음의 형식으로 

우리나라가 이 시대에 쓰임 받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과 같이 우리 민족의 믿음을 보신 것이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또한 여러 번 없어졌던 나라였는데도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 것은 다 그 믿음의 덕택입니다. 많던 잎사귀들이 하나 둘 떨어져나가듯이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하나, 둘..., 사라져갔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야고보, 다대오,... 바울도 죽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친 믿음이 여전히 우리 속에서 살아 숨 쉽니다. 이 믿음의 형식에서 바로 영생의 개념이 산출된 것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7월 8일 성령강림 후 제6주
본문, 고후 1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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