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속에서2012. 8. 30.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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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나나니”(롬 1:18)

라는 말은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나타내는 특유의 속성이지 다른 말이 아니다. 그것은 부활의 이쪽 편을 나타내는 특질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불의하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 우리가 말하는 것들을 잘 알고 있다고 추측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에게 세상 가장 높은 지위를 부여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 일을 그분과 동일선상에 근본적으로 올려놓았다 함으로써 그리된다. 

우리는 그분이 뭔가 필요할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우린 뭔가 다른 어떤 관계를 조율함으로써 그분과 우리의 관계도 조율하는 게 가능하다고 그렇게 추정한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나타난 불의다.

비밀스럽게도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관계 속에서 우리 자신을 주님으로 배당한다.

주관자라고는 부르지만, 우리는 하나님 그분 스스로가 주관할 줄 아시는 하나님으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 자신의 요구만 관철시키는 신자인 것이다. 불신자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의 오만이 그것을 설계했다. 어떤 초월적인 세계,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고 또 접근하기에 용이한 하나님의 나라?

다시 말해서, <초월적 세계>라고 이름 붙여진 그 저의 속에 우리가 쉽사리 담 넘어 들어갈 수 있는 설계의 교란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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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 8. 28.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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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가 말하는 로마서 주제:

“스스로가 두려워할 줄 알고 희망 걸 줄 앎으로 그 스스로 심판대 아래 엎드리는 자를 구원할 다른 의(義)는 없다. 그는 살 것이다. 그는 이생의 헛됨을 깨닫고 있기에, 썩어가는 가운데 썩지 않을 것에 대한 기대 없이는 결코 가망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에, 참된 삶의 기대 없이는 결코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에, 그는 바로 그 참된 삶의 기대를 가지는 것이다. 그 위대한 가능성이 그에게 그 모든 하찮은 가능성의 끝과 목적을 일러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한결같음이라고 말하든지 사람의 믿음이라고 말하든지 그 둘은 같은 것이다. 예언자의 언어들은 이미 이 쌍방향 포인트를 지적해왔다. 즉, 예언자들의 “No”라는 말들 속에서 도망칠 수 없이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하나님의 한결같으심이다. 하나님 거룩한 그분 한분, 곧 그 모든 나머지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만나게 되는, 그 “No”를 단정하는 이들의 경외심과 또 그 부정 속에서의 공허함(void), 꿈틀거림(move), 지체됨(tarry)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의 경외감 안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믿음”이다. 하나님의 한결같으심(faithfulness)과 사람들의 충실함(fidelity)이 부딪히는 - 부정적 의미의 부딪힘 - 그곳에 그분의 의(義)가 나타나 있다. 그곳이 의인이 사는 곳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의 주제이다.”

이것은 로마서 1:17에 있는 하박국 2:4,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합 2:4)를 칼 바르트가 주석 한 것입니다.

이 문단을 번역하다 보면, 우리가 배워온 칭의론과 많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 바르트의 구원론을 오해들을 해서 각자 따다 붙여 쓰는 것같지만서도-,

우리가 배워온 칭의와 다른 점은 이미 (구원 받을) 그 사람은 준비된 자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심판대 아래 스스로 세팅해 설 줄 알아야 하고, 부패 속에서 썩지 않으려고 하고...etc..., 그런 기대감으로 이미 상당한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예수 이름으로 무조건, 완전 무조건, 구원 받는 교리와 차이를 보이죠? 그러나 칼 바르트의 이 주석은 그런 칭의에 반하는 주석이 아닙니다.

의가 (1) “있다”도 아니고, (2) “나타났다”도 아니고, (3)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1)은 원래부터 완성되어 있는 것을 말하고, (2)는 난데없이 갑자기 나타난 걸 말하고, (3)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바르트의 주장은 (3)항에 해당해 보입니다. 

칼 바르트는 말합니다. 예언자들이 줄기차게 외쳐대는 “No”라는 언어 속에 하나님의 미쁘심, 한결같으심, 충실하심이 있다. ‘이것이 <믿음의 기원>이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지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God the Holy One, the altogether Other.” 라는 댓구를 “하나님 거룩한 그분 한분, 곧 그 모든 나머지인 것이다.”라고 밖에 번역할 수 없었는데, 이 알아듣기 어려운 댓구는, 결국,

 “하나님의 모든 <No>라는 응답은 사실상 단 한 개의 <Yes>인 것이며, 또한 그 모든 <Yes>라는 응답 속에는 <No>라는 단 한 개의 하나님 응답이 들어 있다”

라는 파라독스 속에서 이해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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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 8. 24.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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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응답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가르치는 소리를 들어왔다. “Yes,” “No,” “Wait.” 

그러면서도 언제나 응답은 사실상 “기다림”(Wait)이라는 합의 결론을 항상 종용해오는 바람에 응답을 구하는 당사자는 그 기다림을 볼모로 시간과 물질을 착취당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가운데 1:16-17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대목에서 그 세 가지 응답의 실체가 무엇인지 소상히 밝혀진다.

“<믿음에>라 함은 하나님 그분의 <믿음으로>부터 계시된 것이다. 사멸될 자들에게 주어진 대화의 수단이다. 또, 하나님과 처할 위경에 꺼리지 않는 이들에게 주어진 대화의 수단이다. 그분의 그 신성한 <‘No’>로써 받아들여진 이들이 그 위대한 <‘Yes’>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은 반드시 생기를 되찾게 될 것이다. 그 모순을 회피하지 않은 이들은 하나님 품에 숨겨진다. 진솔함으로 기다림의 태도를 받아들이는 그들은 하나님의 그 <한결같음>을 마땅히 기다려야 하고, 확신케 되고, 또 그 기다림이 능히 가능케도 되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깨닫게도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전 앞에 경외심을 세우고, 들고 일어나려는 조바심을 억누르는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살 것이다.”

이 주석에 의하면 하나님 응답은 이미 동시에 완료된 것이지 다른 게 아니다. 

부정하심(No)의 관문을 열고 들어가 긍정하심(Yes)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그 No와 Yes를 통해 획득한 대화의 수단, 곧 하나님의 <믿음으로/한결같으심으로> 우리의 <믿음에> 이르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기다림(await)을 대체하였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기다림을 대체한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 응답은 “Yes,” “No,” “Wait”가 이미 동시에 완료된 것이지 무슨 기다릴 만한 다른 것이 있는 게 아니다. 기다림을 볼모로 그 무엇도 착취당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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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 8. 21.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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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사람들, 그 모든 계급들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의(義)의 보편적 비밀, 곧 그 위대함이 바로 복음 속에서 폭로되었다.”

라고 칼 바르트가 하나님의 의(롬 1:17)를 주석하면서 이와 같이 “복음”(In the Gospel)으로 국한지어 버렸다면, 구약은 여기에 포함 되는가, 아니 되는가. 그렇다면 “구약은 복음이다.”라는 명제가 성립되어야 하는데 못 그런다. 

왜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투사된) 구약만이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문적 경향성도 진보적인 신약학자가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지 않으면서도 신학들을 하고 있는 것처럼, 내면적으로 사실상 <구약>이 아니면서 신학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다. 

영어권에서는 아예 Old Testament(구약신학, 구약성경)라는 카테고리를 삭제하고 단지 Hebrew Bible이라는 명칭으로 대체할 것을 고려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미 많이 건너간 것같다. http://en.wikipedia.org/wiki/Category:Old_Testament

그렇기에 전통적으로 구약, 신약, 조직, 실천, 기타 이론... 등으로 분화되어 조화를 이루는 것이지만, 그 모든 것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중심될 때에 균형이 잡히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학문적 문장을 다듬고 정제할 때에 “예수”라는 주어를 표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혹은 “예수 그리스도는(를, 을, 에게)”라고 된 문장을 도통 찾기 어려운 것은 학자들이 자기 논문을 발표하면서 이런 문법을 대단히 촌스러워 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 것같다.

영적으로는 오염이지만, 여기서 신학으로서 학문적 질서와 균형도 깨지는 것이다.

한 복음서 저자가 로고스라는 한 단어를 들여오기까지 그것은 단지 말, 말씀, 에너지...라는 의미 외에 “비율”이라는 뜻이기 때문임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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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 8. 16.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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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은 자연적 세상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 영혼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어떤 높은 최상의 힘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거나 혹은 인식할 만한 어떤 것이어서 (그 입증에 사람들이) 당혹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은 관측 가능한 어떤 최상위 계층으로서 힘도 아니고 그것들의 합(sum)이거나 원천(fount)도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존재로서 힘입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그 모든 힘의 위기(the KRISIS of all power)입니다.”

일전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지식이 갖는 힘들이 붕괴되었다고 한 저 칼 바르트의 주석을 소개한 것은, 그 지식들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폐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흔히, 교회에서 젊은이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얻으려고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빌 3:8-9)는 말을 오해하게 하는 바람에 그들이 지식 쌓는 노력 자체를 회피하게 만드는 것은 그른 가르침이다. 그들이 지식으로서 힘을 쥐어 보지도 않고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힘의 위기는 우리가 그 지식의 힘을 손에 쥔 후에 배설물과 같이 버렸을 때 비로소 임하는 것이다. 손에 넣지도 못한 것을 어떻게 버렸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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