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2.09.03 왕의 여인들
  2. 2012.08.27 위조된 꿈을 분별하는 방법
  3. 2012.08.20 지혜의 본성
  4. 2012.06.18 영화 <프로메테우스>에 등장하는 하나님들
말씀 속에서2012. 9. 3.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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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퍼스트 레이디

우리나라는 역대 대통령 10인이 있습니다. 그 곁에는 퍼스트레이디들도 있습니다. 세 분만 소개해보면, 우선 오스트리아인이셨던 프란체스카 여사. 대통령과 스물다섯 살 나이 차가 났지만, 전쟁기간 각 나라에 직접 영문편지를 써 구호품을 요청하는 등 대통령 비서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셨습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구호품이 그녀 고국에서였다고 합니다. 작고(作故) 시에는 아주 낡은 한복이 유품으로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영원한 국모’라는 칭호에 누구도 이의 걸지 않을 법한 육영수 여사. 청와대의 “귀”가 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고 합니다. 라디오를 목에 걸고 다니다시피 했으며 국내 발행 모든 신문, 심지어 발행 금지된 신문들까지도 모두 챙겨 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진보 매체에서조차 “청와대 내의 야당”이라 부를 정도입니다. 끝으로 그런 그녀를 롤 모델로 삼았다는 이순자 여사. 교육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여 새세대육영회와 새세대심장재단을 설립해 유아교육과 심장 수술 발전에 양적·질적 공헌을 많이 하였지만 정권 말 산속에 들어가 사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요약발췌, 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4&artid=10011> 

그러나 앞의 두 분 역시, 외국인이면서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한 채 이 땅의 기억 속에서 스러질 때까지 머물러야만했던 점, 혹은 난데없는 총탄에 스러져야만 했던 삶이었다는 점에서, 모두 한 여성으로서는 과연 얼마나 행복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프린서플 | 왕의 여인들

아가(雅歌)서는 도대체 그 기능이 무엇인지, 왜 성경에 편입되었는지 예나 지금이나 의견이 분분합니다. (1) 고대근동의 성적인(sexual) 제의 문서들과의 연관성을 찾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2) 유대인들의 문서들 중 자투리 정도로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이 문서는 (3) 거룩한 중에서도 거룩한 문서라는 랍비들의 판단에 의거하여 약 이천년 전에 정경에 들어오게 됩니다. 

오늘 날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글이 솔로몬에 의해 직접 작성되었다고 보지 않는 경향이 지배적이지만 분명한 사실은 최고의 지위를 가진 <남성>이 <여성>에 관해 적은 글이라는 사실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 수천 년이 흘러도 변함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 여인이 누구인가 라는 점은 이 문서를 읽는 우리의 여전한 적용점입니다. 세 명의 여성상을 제시하겠습니다.

첫째, 미갈.

미갈은 사울의 둘째 딸입니다(삼상 14:49). 다윗을 사랑하되 그의 신앙과 영성을 좋아했습니다(18:20, 28). 그녀가 아니었다면 다윗은 아마도 사울에게 죽었을지도 모릅니다(19:11, 14-15, 17). 다윗을 좋아하지 않은 아버지 사울이 다른 남자에게 아내로 줘버리기도 하지만(25:44) 다윗이 그녀를 아내로 다시 데려와 정혼했던 그 책임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다윗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삼하 6:16; 대상 15:29). 에봇만 입고 춤추는 다윗을 지적한 것은 그 마음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둘째, 아비가일.

아비가일은 미련한 어떤 남성의 아내였습니다. 다윗이 그 남성의 가산을 지켜줬지만 그는 오히려 악담을 퍼부은 일로 화가 난 다윗이 그를 치러 오자 아비가일이 다음과 같은 말로 다윗을 말립니다. “...내 주의 손으로 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야웨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 사람이 일어나...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야웨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야웨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향후 이 여인의 전 남편이 죽자 다윗이 데려다 삽니다.

셋째, 밧세바.

다윗과의 만남의 시작이 시사하듯 밧세바는 가장 관능적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 솔로몬이 왕위 승계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완도 지녔습니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그녀의 관능적 외모가 오래간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에필로그 | 왕의 마지막 신부, 교회

교회는 속성적으로 여성성(性)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여성상(像)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갈처럼 정열적이어야 할까요, 아비가일처럼 말을 잘해야 할까요, 아니면 밧세바처럼 관능적이어야 할까요? 아가(雅歌)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무조건 아름다워야(美) 합니다! 

그것은 플로(plot)으로 아름다운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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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8. 27.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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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꿈 깨는 이야기

2004년9월13일 오프라 윈프리는 “여러분 소원을 이뤄줄 수백만 달러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는 말로 <꿈은 이뤄진다>회분 토크쇼를 시작합니다. 그날 방청객은 차가 꼭 필요한 사연을 써 미리 모아진 여성 276명이었습니다. 이들 중 11명만 무대로 불러내 차 키 한 개씩 주자 부러움으로 열광했습니다. 이어서 그녀는 나머지 265명에게 작은 선물상자 하나씩을 나눠주고는 말합니다. “여러분께 드린 상자 중 하나에 12번째 자동차 키가 있습니다.” 모두 그 키의 주인공이 되기를 기대하며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여는 동안 여기저기 환호성이 울렸습니다. 모든 상자 속에 자동차 키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2만8천 달러 정도하는 GM사 폰티악 G-6의 키였습니다. 총 가격은 770만 달러, 오프라 윈프리의 선물이었습니다. 며칠 후 CNN머니는 이들 각각에게 최고 7천 달러의 세금이 부과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습니다. 소득세와 소비세는 본인이 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윈프리 사무실 대변인은 “자동차를 선물 받은 사람들은 세금 내고 차를 보유하든지, 차를 팔아 그 돈으로 세금을 내든지, 아니면 차를 포기하든지 3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10월29일경에는 실제로 경매 사이트 이베이에 “오프라 윈프리가 방청객에게 준 車 선물”이라는 명칭으로 매물이 나왔습니다.

선물은 자동차였나 현금이었나... 그럼 꿈은, 그것이 선물이기에 기쁜가 환금(換金)가치였기에 기쁜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 후 2010년에 오프라 윈프리는 폭스바겐사로부터 세금 포함 차량 전체를 후원 받아 이런 이벤트를 다시 한번 합니다.  


프린서플 | 꿈에 관한 하나님의 전개 방식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천막 가운데 있구나”(삼하 7:2) 하는 마음이 다윗의 꿈이었습니다. 대적을 물리쳐주시면 내가 성전을 짓겠다거나 내가 정권을 잡으면 성전을 짓겠다는 식의 공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궤를 바라보는 작은 탄식이 바로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을 자기 대에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피를 흘린 군인이었기 때문입니다(대상 28:3). 대신 아들이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자원을 확충하고 죽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그 꿈을 이룩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는 과정은 나라 전체에 막대한 부담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분열의 불씨를 남겼습니다. 솔로몬은 본문과 같은 기도를 통해 자신의 꿈 곧, 아버지가 받았던 하나님과의 약속을 토대로 하는, 성전 중심의 비전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성실한 신앙, 건축으로 야기된 분열의 씨, 그리고 외세의 침략으로 그 모든 비전과 꿈은 사실상 붕괴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 꿈은 붕괴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꿈의 질료는 예수님의 몸을 통해 완전한 형식으로 탈바꿈 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서입니다. 

첫째, 부정하심을 통해서 입니다. 

우리의 꿈은 사실상 부정되어야 합니다. 단순한 부정적 사고가 아닙니다. 아브라함 꿈이 부정되었고 - 그는 처음 이삭의 출생을 믿지 못했습니다 - 야곱의 계획도 처음엔 부정되었고, 요셉의 꿈 또한 부정되었으며 심지어는 예수님의 뜻조차 포기되었습니다.

둘째, 긍정하심을 통해서입니다. 

하늘의 아버지 뜻이 땅에서 아들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 모든 꿈이 다시 재편된 것입니다. 아니, 아예 원래부터 그렇게 설계가 된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 꿈의 진정한 의미를 삶의 부정하심을 통해 발견했고, 야곱이 받아낸 이스라엘이라는 꿈의 이름 역시 부정하심의 역사 속에서 그 심원한 의미를 깨닫습니다. 이 긍정하심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 정말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셋째,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야곱, 요셉, 다윗, 솔로몬, 그들 모든 개인적인 꿈들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 일체를 예수님의 몸, 삶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우리는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이 과정에서 그 분이 보여주신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처음 부정되었던 것도 (우리의) 믿음이었습니다. 두 번째 긍정하심도 (하나님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따라가려는 우리의 머나 먼 미래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꿈에 관한 전개 방식입니다.


에필로그 | 쪼갤 수도 섞을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꿈

따라서 그 꿈, 곧 그 유일한 선물은 어떠한 경우에도 쪼갤 수도, 섞을 수도, 그리고 바꿀 수도 없는 그 자체로서 가치입니다. 그 선물을 성령이라고 부르며(행 2;38), 폰티악 G-6나 뉴비틀즈 같이 환금(換金) 가치 이벤트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2012년 8월 19일 성령강림 후 제13주
본문, 왕상 8:41-43, (c.f. 1, 6, 10-11, 22-30).
 (c.f. 시 84; 엡 6:10-20; 요 6:5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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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8. 20.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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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이혼에 성공한 사람

이화여대 영문과를 3년만에 조기 졸업하고, 도미, 변호사 자격 취득, CA주(州) 검사에까지 임용되는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그녀 이면에서는 벗을 수 없는 고통들이 따라다녔습니다. 결혼 5년만의 이혼, 갑상선암, 망막 파손으로 인한 실명, 첫 남편과 사이에서 난 장남의 돌연사, 둘째 아들의 자폐아 판정까지, 이어령 전 장관의 딸 이민아 목사님의 삶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친의 회심이 있었고, 시력도 되찾고 갑상선암도 완치되는 이적이 있었습니다. 원래 호르몬 질병인 갑상선암엔 완치란 게 없지만 암세포가 모두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후 목사 안수도 받고 활발한 사역도 했습니다. 그러나 2011년 그녀는 다시 위암 판정을 받습니다. 그녀가 죽기 한 달 전인 이듬해 2월15일자 인터뷰에서 그녀는 밝은 얼굴빛으로 지난 날 아들을 잃었던 곳 일본을 다시 여행한데 대한 이런 소회를 남겼습니다. 

“제가 이번에 놀란 것이, 회복이 있고 완전한 회복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3월15일 사망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녀와 이혼했던 첫 남편이 남긴 소회도 기록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와 이혼 직후 소회를 책에다가 그는 이렇게 남겼습니다. 

“...결혼생활 5년 동안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은 그 절반쯤이었을 것이다. 그 절반의 절반 이상의 밤을 나나 그녀 가운데 하나 혹은 둘 다 밤을 새워 일하거나 공부해야 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서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모든 기쁨과 쾌락을 일단 유보해두고, 그것들은 나중에 더 크게 왕창 한꺼번에 누리기로 하고, 우리는 주말여행이나 영화구경이나 댄스파티나 쇼핑이나 피크닉을 극도로 절제했다... anyway 미국생활 5년 만에 그녀는 변호사가 되었고 나는 신문사 지사장이 되었다. 교포사회에서는 젊은 부부의 성공 사례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방 하나짜리 셋집에서 벗어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3층짜리 새집을 지어 이사한 한 달 뒤에, 그녀와 나는 결혼생활의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혼에 성공했다. 그때그때의 작은 기쁨과 값싼 행복을 무시해버린 대가로.” 

여기서 우리는 이혼에 성공한 사람과 완전한 회복에 성공하는 사람, 두 사람을 목격합니다.


프린서플 | 지혜의 본성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엡 5:15b)는 말씀과 같이 지혜는 우리의 세월, 즉 삶과 관련 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의 본성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와의 지혜. 

하와는 금제의 나무를 보고서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창 3:6)고 여겼습니다. 그녀가 그 열매를 먹기도 전에 상상으로 갈망했던 그 지혜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의 행동으로써 다 나타납니다. 대다수가 금제의 경계선을 지키고 있는 동안, 담대하게 넘어가서는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낸 지혜였습니다. 하나님이 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지혜로 규정됩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지혜.

근대에 들어서 예술보다 기술을 천시 여기는 경향이 나타났지만 본래 ‘예술’은 기술에서 온 말입니다. 기술의 범주가 더 크고 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 설계를 보이셨을 때, 이것을 실물로 제작하려면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이를 주도한 이들의 기술을 하나님께서 주신 영으로 그 지혜를 소개합니다. 재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지혜는 모세가 안수하여 자신의 사역을 승계 시킬 여호수아를 위해 구합니다(신 34:9). 그런가하면 미련한 여인과 대비된 슬기로운 여인에게도 이 지혜가 있습니다(잠 14:1). 우리에게 호크마로 알려진 지혜가 이것입니다.

솔로몬의 지혜.

솔로몬의 지혜는 앞의 두 지혜와 구별됩니다. 어떤 이성적 아이디어나 예술적재능이 아니라, “이해하는 마음” 혹은 “듣는 마음”이라는 표현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왕상 3:11b 부분을 직역하면 “재판을 듣고서 이해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재판 곧 심판은 어떤 원리로 실행됩니까? 법조문을 가지고서 하와의 이성적 지혜로 적용합니까? 아니면 법에 달통한 기술적 재능을 가지고 합니까? 솔로몬은 “듣고,” “이해”한 지혜로 심판을 했습니다. 오늘날의 법정이 이런 재판을 했다간 당장에 주관적 재판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세월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어쨌든 이 지혜를 가지고서 두 창기의 아이를 가르는 그 유명 재판을 주도합니다. 세 가지 지혜 중 가장 우월한 지혜입니다.

프롤로그 | 완전한 회복에 성공한 사람

유대인들은 솔로몬의 모든 영광이 지나가버린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바로 이 하나님의 지혜가 언제나 함께 한다고 믿었습니다. 욥기가 그 종말의 세월을 잘 반영합니다. 욥기에는 “지혜”로 번역될 수 있는 어휘가 약 35회 정도나 등장합니다. 어떤 때는 이성적 사칼로, 어떤 때는 호크마로..., 그러나 욥은 자신의 최후 종말에 가서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라고 고백하면서 그 종말을 솔로몬이 재판할 때 사용했던 “듣는 마음”에서 오는 깨달음으로서 지혜로 마무리 짓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지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장 우월한 지혜는 법도를 마지막 순간까지 충실하게 따르는 것일 텐데, 여기서  “법도”라 함은 어떤 성문 된 율법 내지 그 율법의 세부조항으로서라기 보다는 자신에게 불가항력적인 - 회피할 수 없는 - 삶의 장벽 내지 장애인 것이며, - 우리는 율법/법도를 지나치게 멀리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그것을 끝까지 완주하는 자들이 바로 이 지혜를 구사하는 자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민아 목사님이 남긴 말, “제가 이번에 놀란 것이, 회복이 있고 완전한 회복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에서 깨달음은 이 세 가지 중에 가장 우월한 세 번째 지혜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2012년 8월 19일 성령강림 후 제12주
본문, 엡 5:15-20.
 (c.f. 왕상 2:10-12, 3;3-14; 시 111; 요 6:5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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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6. 18.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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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프로메테우스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조물주를 만나봐야겠어. 만들어 놓고 대체 왜 파괴하려는지...,” 

이런 반신(反神)적 다이얼로그에 기인해 반기독교 이야기로 규정받기도 하지만, 그 말은 어떤 면에서 이 세상 환경들로부터 우리 인간들이 들어야 하는 목소리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어낼 수 없는 환경을 우리가 만들어낸 것으로써 상당부분 파괴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 파괴는 물과 공기와 토양뿐 아니라 생명 패턴에까지도 미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이미 그들의 조물주인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이름 짓는 권능이 그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진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면 모든 언어의 궁극점인 ‘이름,’ 즉 그 존재들이 사는 집(세계)인 그 ‘이름’을 짓는 능력은 이미 조물주에 상응한 권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로써 단지 “이름을 짓도록 하셨다”는 행위에서 그 깊으신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이며(시 92:5), 반면 “왜 만들어 놓고 파괴하려느냐”라는 어떤 이들의 소리를 통해서는 그 얄팍한 마음 됨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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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잘 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만들어 놓고 파괴하는 분이 아니라 “잘 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역사 모델로 합니다. 한 가정으로 출발해 국가의 형성과 성장 그리고 쇠락과 패망의 역사과정뿐 아니라 그 너머에 재건에까지 이르는 흥망성쇠의 장구한 ‘반복’을 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지파동맹에서 왕정 단계로 들어서는 대목은 그 역사를 감싸고 계시는 하나님 손길의 의도를 읽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청원 할 때 청원의 직접 대상은 마지막 사사 사무엘이고 하나님은 최종 결정권자였습니다. 사무엘은 왕의 제도를 좋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최고 실력자였던 사무엘이 자신의 일가가 누리는 절대 지위를 놓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내 그의 태도는 우리를 혼돈스럽게 만듭니다. 왕의 청원을 반려하고 싶어 하면서도 왕을 엄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제도를 ‘기피한다,’ ‘선호한다’라는 관점 보다는 백성들이 처한 모든 환경 속에서 항상 새로운 기대를 놓지 않으시고 복을 주신다는 그분의 속성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을 세워주셨습니다(삼상 10:24; 11:14).

왕의 제도를 반대했기에 이후에 쳐다보지도 않으셨던 게 아니라 합당한 인물이 그 자리를 맡을 수 있도록 엄선하시고, 그리고 기쁨으로 그 환경을 새롭게 열어주십니다. 왕이 되기 전의 사울은 수줍을 정도의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된 이후 그 위치를 감당하기에 몇 가지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세상 관점에서는 그만한 리더가 없을 것입니다. 체격과 그리고 용맹함, 그는 전사답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다 죽습니다. 그에게서 기름부음이 떠난 건 어디까지나 신앙적 문제 때문입니다.

다윗 왕을 세워주셨습니다(삼상 15:34-16:1).

사울이 지도자로서 실격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때에도 왕의 제도 자체를 둘러엎으시고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좋은 제도/환경이 될 수 있도록 일하십니다. 사무엘은 다윗이 소년일 때에 기름을 부어 예비시킵니다. 다윗은 시상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 깊은 시상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중요한 연관을 맺게 됩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미완의 삶으로 다음 세대를 맞습니다.

솔로몬을 세워주셨습니다(삼하 12:25).

솔로몬의 왕 됨은 자연스런 ‘세습’ 같지만 많은 역경을 거쳐서 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력 이전에, 앞서 모든 왕들에게 그러했듯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는 그 어떤 한 부분이 그에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왕이 된 후 재물과 복수가 아닌 지혜를 구하는 한 장면으로 압축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여디디아, 그는 하나님에게 사랑받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도 쇠락을 걷습니다.


에필로그 | 새로움의 하나님

이는 ‘모든 인생은 쇠락할 수밖에 없구나’를 가르치는 내용이 아닙니다. (1) 이미 예고된 왕의 제도가 지닌 속성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의 새로움/회복을 노력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3) 우리 자신의 장점을 쇠락시켜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우리는 언제나 그 새로움을 파괴해왔다는 점에서 우리 스스로가 파괴를 일삼는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6월17일 성령강림 후 제3주
본문, 고후 5: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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