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13. 12. 9.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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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거 종말론에 관심을 가졌을 당시 세상에 곧 종말이 임한다는 계시를 받았었다. 그러나 얼마안가 그 꿈이 헛된 것으로 판명 되었다. 그 후로도 의미심장한 이미지가 꿈에서 인식되곤 했지만 전과는 달리 그것을 가급적 ‘읽으려고’ 노력한다. 그림을 ‘읽다보면’ 당초 전제된 심상과는 전혀 다른 뜻에 도달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그런 경우를 주로 계시로 인준하는 편이다. 


(1)


과거 종말론이 전국을 강타했을 당시 대부분의 집회에서는 이 노래가 빠지지를 않았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함께 뒹구는 //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 ... 사막이 낙원되리라 //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그즈음 어느 날인가 꿈에 보이기를, 정각 6시를 가리키는 한 대형 괘종시계가 보이더니 “이제 곧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생생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시한부 종말론 서적에서 나오는 식으로 나도 뭔가 신령한 계시를 받은 것 같은 냄새를 풍기며 사람을 대하곤 했다. 그러나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2)


미문(美門)을 시작한 이후 꾼 의미 있는 꿈은 세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① 날이 서지 않은 스케이트를 타며 무디디 무딘 날로 얼음을 지치느라 애를 쓰다 깬 적이 한 번 있었고, 또 한 번은 ② 광폭 타이어 달린 멋진 차를 타다가 차 뒤로 돌아가 보니 뒷 타이어 모두 펑크 나 있는 걸 보고 깬 적이 있다. 두 이미지 모두를 나의 부족한 영성으로 읽는 데 활용하였다. 



그리고 ③ 서로 맞붙은 두 개의 방에 얽힌 꿈을 하나 더 꾸었다. 직사각형인 한 쪽 방에서는 벽에 사람들을 둘러 세우고 하나씩 조준 사격을 하며 공포에 몰아넣고 있었고(내가 그런 게 아니다), 계단 식 풀장을 갖춘 정사각형으로 된 바로 옆방에서는 갓난아기를 안은 부부가 있었는데 그 갓난아기를 풀장에 담그자(내가 안았을 것이다) 아기의 머리 뒤를 통해서 붉은 피 같은 것이 물에 퍼져나가는 이미지를 본 것이다. 처음에는 직사각형의 방을 나쁜 교회, 정사각형의 방을 미문(美門)교회 라는 식으로 읽었었다. 그러나 아기 머리에서 퍼져나간 피를 이해할 수 없었다. 피도 나쁜 것이라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생명일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 하게 되면서 좋아했다. 그렇지만 조준사살을 하고 있는 직사각형 방은 여전히 ‘나쁜 교회’로 규정했었다.

이런 내용을 설교에서 한 후 성도들과 교제하는 중에 그 두 방 모두가 나 자신이라는 개정된 방향으로 읽는데 동의하게 되었다. “생명을 배양하려는 나”와 “이성으로 뭔가를 조준하려는 폭력성의 나”가 언제나 공존한다는 사실에 동의하게 된 것이다.


(3)


위와 같이 그림을 읽는 방법은 비교적 심리학적인 측면이 농후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최초의 이콘(Icon)으로 소개되는 성 카트리나 수도원의 예수상의 경우, 읽을 수 있는 그림으로서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두 눈이 짝짝이로 보이는 그 예수님 상은 하나님의 진노의 얼굴과 사랑의 얼굴로 읽히는 그림이다. 이것을 이콘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그들이 사는 집의 실내는 집이 아니라 ‘동물들의 동굴’인 것만 같고, 뼈들이 돌출된 그 그림 상의 인물들 역시 사람이 아니라 ‘야수’인 것만 같은 것도 모두 그 그림을 ‘읽을 때’에 알 수 있는 도상들이다.



(4)


6시를 가리키는 괘종시계를 읽기보다는 그림 그대로만 보다 보니, 그리고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함께 뒹구는...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장면을 읽기보다는 그림으로만 보다 보니, 우리는 진정한 종말을 계시로 받지 못하고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본문 이사야서 11장 1-11절은 바로 그런 종말에 대한 대표적인 도상이다.


① 이새의 줄기 한 싹, 

② 입의 막대기(세상을 침), 

③ 입술의 기운(악인을 죽임), 

④ 허리 띠(공의), 몸의 띠(성실), 


등은 모두 심판의 도상에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곧이어 평화의 도상도 전개 된다.


⑤ 이리-어린 양, 표범-어린 염소, 송아지-어린 사자, 암소-곰,

⑥ 소처럼 풀을 먹는 야수

⑦ 독사 굴

⑧ 독사 굴에 손 넣는 아이


서로 상반된 쌍이 잇따라 전개 되면서 그 평화를 표명하는 이 이미지를 대개 저 구름 속 하늘나라 이미지로 이해 하는가 하면, 여호와의 증인 같은 곳에서는 아예 지상천국 이미지로 소개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5)


신약성서 저자들이 이 그림을 어떻게 ‘읽었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도상(마 3:1-12; 눅 3:1-18)을 통해 이 그림을 읽어나갔다.


세례요한이 등장하는 도상은,


① 약대 털로 된 옷 (짐승/야수)

② 가죽 띠 (허리띠)

③ 메뚜기와 석청 (먹이) 


으로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은유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 이상만 중첩되어도 유사한 것이라 말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더 결정적인 장면들이 추가 된다. 바로,


④ 독사이다.


일반적으로 세례 요한이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외친 것을 두고 그 독사들을 나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본문에는 저 바깥에서 구경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아니라 세례를 받으러 스스로 나오는 자들을 향해 외치는 소리이다.


누가복음에는 아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없다. 세례 받으러 나오는 일반 회중들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인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⑨ “가난한 자를 심판”하고 “겸손한 자를 판단”한다는

그 알 수 없는 이사야서 본문(11:4)의 해독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심판은 부자나 우쭐대는 자들을 대상으로 해야지 왜 ‘가난한 자’와 ‘겸손한 자’를 심판하는가?


결국, 이사야서 본문이 지닌 도상은 심판이면서 평화의 잔치인 “세례 문전(門前)”의 도상으로서, 그 직사각형 방의 조준사격이 “나쁜 교회”를 향한 것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을 겨누고 있는 세례와 일반인 셈이다.


구름 속 하늘나라도 아니며, 이 땅에서의 지상천국 유토피아도 아니며,

오로지 ‘회개의 향연’이었던 것이다.



(6)

 

사람은 이처럼 다른 동물과는 달리 그림과 글씨를 사용하여 정보를 전달하고 취득할 줄을 안다. 글씨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그림을 글씨처럼 읽기도 하는 것이다. 이미지를 읽어내는 이러한 방법은 근대 들어 심리학이나 해석학 분야에서 응용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이처럼 고대 언어인 성경이 온통 그런 언어로 되어 있는 것이다.


흔히 종말론에 등장했던 666, 바코드도 그림이다. 최근의 “베리칩”도 그림이다. 


“괘종시계”, “날 없는 스케이트”, “펑크 난 고급 타이어”, “피의 세례를 준 아기”, “카트리나 수도원의 Icon”, “감자 먹는 사람들”도 모두 다 그림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계시’를 완성하는가는 어디까지나 그 읽기 능력에 달려있다 할 것이다.



에필로그 | 독사 굴에 손 넣은 아이


따라서 최종적으로 우리는 이사야서 본문 상에서 감히 “독사 굴에 손을 넣고 휘저을 수 있었던 아이”가 누구인지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아이는 다름 아닌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는, 이 종말 도상의 궁극적 해석에 다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독사 굴에 손을 넣은 아이가 말한다. “나는 그 분이 아니요, 그 분은 바로 저기 저 분이시다” 라고.




2013.12.8일자 | 독사 굴에 손 넣은 아이 | 사 11:1-10. (cf. 시 72:1-7, 18-19; 롬 15:4-13; 마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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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5. 2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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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언어의 붕괴.

“어떤 민족들이 역사에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사용한 언어를 재구성해 그들의 풍습, 제도, 계통, 인종 등을 밝힐 수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언어의 공통성으로부터 혈족 관계를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 즉 어족이 인류학적 종족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게르만 민족을 가정해보자. 그들 특색은 뚜렷하다. 금발, 긴 두골, 큰 키... 스칸디나비아형이 가장 완벽한 그들 형태다. 그러나 게르만어를 말하는 모든 주민들이 이 특징에 부합한다고 할 수는 없다. 알프스 산맥 아래 알레마니아인은 스칸디나비아인과는 아주 다른 형태다. 그렇다면 한 고유언어는 본래 한 인종에게만 속하고 그 언어가 타 민족에 의해 쓰여진다면 정복에 의해 그들에게 강요되었다고 해야하는 것일까? 물론 로마인에게 정복당한 고올인처럼 정복자 언어를 채용하거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종족들이 있음을 종종본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게르만어의 경우, 수많은 이민족을 굴복시켰다 할지라도 이들을 모두 병합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혈족 관계와 언어 공통성과는 그 어떠한 필연적 관계도 없어 보인다. 따라서 인종의 단일성이란 언어 공통성의 이차적 요인이지 필수적 요인은 전혀 아니라 할 수 있다. 다만, 다른 단일성이 있는데 그것은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서 유일하게 본질적인 것인 바, 사회적 유대에 의해 구성되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민족성이라 칭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의는 최고의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언어와 혈족 또는 민족성에 관한 정의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창세기 바벨탑 사건은 철저한 시스템의 붕괴로 이해될 수 있다.

프린서플 | 방언은 왜 이상한 말(glossolalia)인가?

“아주사Asusa) 거리에 있는 한 초라한 오두막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다. 이상한 교리를 믿는 신자들이 극도로 광적인 예배를 드리며, 대단히 급진적인 교리를 설교하고, 거의 정신이상에 가까운 극도의 흥분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 회중들은 흑인과 약간의 백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시간 동안 몸을 앞뒤로 흔들며 울부짖으면서 그 신자들이 신경을 자극하는 기도와 간구를 드리기 때문에 밤만 되면 그 지역의 주민들은 공포에 휩싸인다고 한다. 더욱이 그 신자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았으며 그 이상한 소리를 이해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Los Angeles Times Apr. 18, 1906, p. 1)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만나는 은사주의 형식의 원형으로 꼽히는 한 집회의 현장 스케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날 때는 바울의 로마서를 통해 만나듯이, 우리가 바울의 로마서를 만날 때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만나듯이, 본문에(행 2:1-21) 나오는 오순절 장면을 오늘날 만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게 보편적 교회사 시각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직전 중세교회 시스템 붕과가 있었듯이, 위의 아주사 사건 직전에는 경건주의 시스템 붕괴조짐이 보였듯이, 오늘날에는 안타깝게도 은사주의를 포함한 총체적 시스템 붕괴로 돌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붕괴된 시스템의 복원이 오로지 “듣기” 기능과 맞물려 있다고 전합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부지런함으로 듣는다.

우선 ‘눈치’라는 말로 이해하면 쉽겠습니다. 두려워 눈치를 보거나 약삭빠르게 눈치를 본다는 부정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부지런하게 듣는 사람은 보다 능동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며 관계 형성의 큰 밑거름이 됩니다.  


신뢰로 듣는다.

신뢰가 상실되면 어떤 말을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행동으로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듣기의 구조는 신뢰 입니다.


영으로 듣는다.

이것은 가장 우월한 듣기의 형식으로 설명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자기 혼자서만 들을 수 있는 듣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혼자서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혼자서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모세도 그랬으며 바울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에필로그 | 언어의 복원은 관계의 복원.

그러므로 방언의 본질은 그 말의 어떤 신비로운 해석에 있는 것같지만 실상은 이상한 말(glossolalia) 그 자체에 더 의도된 목적이 있습니다. 모든 관계의 궁극적 복원은 듣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부모 자식, 부부, 가정, 교회, 사회, 국가, 그 모든 듣기의 관계 복원에 기여해야 사도행전 2:1-21 사건의 본령에 응한다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자인 누가(Luke)가 오순절 성령강림 이 지점을 창세기 바벨탑에서 발생한 문제의 복원으로, 그렇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지 참조:

thetowerofbabel.net
S-a-q-u-a-r-i-u-s.deviantart.com
wikipedia.org
www.answersingenesis.org
images.yourdictiona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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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12. 9.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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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큐비즘과 칸바일러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은 어떤 것일까? 비싼 그림 Top10에는 언제나 반 고흐와 피카소 그림이 석 점씩은 낀다. 고흐도 비싸지만 피카소 작품이 가장 비싸다. <도라 마르 초상>이 9천5백2십만 불, <파이프 든 소년>이 1억416만8천 불에 달했다. 그러다가 클림트에게 그 자리를 내준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초상>이 1억3천500만 불에 팔렸기 때문이다. 대체 왜 이리 비싼 걸까? 실제 그 정도 가치가 있어서일까? 그림 가치는 어떻게 형성될까? 일차적으로는 무엇보다 수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중세-르네상스는 교회/공공기관이 그것을 담당했지만 근현대로 넘어오면서는 투자처를 찾아 헤매는 자본들이 그 시장을 형성한다. 그 다음 그들에게 미술사적 가치나 작가 개인사적 가치가 배당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수요와 그 가치를 연결시키는 딜러의 안목과 기획이 간과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피카소가 아무리 뛰어났다 해도 볼라르(A. Vollard)나 칸바일러(D. H. Kahnweiler) 같은 딜러의 안목이 없었다면 그가 언제 세상에 소개되었을지 알 수 없다. 큐비즘(입체파)이라는 말도 칸바일러 갤러리 전시과정에 붙여진 말이다. 딜러는 상업적이긴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좋은 화가를 남보다 일찍 발굴해 그 그림을 미리 사줌으로써 화가가 안정적으로 예술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후원도 한다. 그래서인지 화가들이 좀처럼 딜러를 그리는 일이 없는데 피카소는 볼라르와 칸바일러 둘 모두에게 초상화를 그려줬다. 고호도 일찍부터 안목 있는 후원자를 만났다면 그런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다 죽지는 않았을 것인데, 어쨌든 이런 가치의 상승과 하락에 얽힌 모든 일은 작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작가 손을 떠나서 발생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프린서플 | 종말에 준비해야 할 것들

화가들이 미술사 속에 창출해낸 각각의 화풍들은 전 역사 중에서도 각 시대가 지닌 성질과 경향을 함축적으로 재형해낸 일종의 상징 언어라 할 수 있습니다. 빛의 움직임을 색채로 갈망해내던 시대를 고흐가, 여러 전쟁으로 모든 게 헤쳐 모이게 된 시대는 피카소가 표현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각 시대에 응답했던 계시들을 모아 상징체계를 이루고 있는 언어도 있습니다. 그것을 구속사라 부릅니다. 내가 문외 해 아무리 화풍 따위는 모르고 지나친다하더라도 그 화풍이 구현해낸 역사가 사라지는 게 아닌 것처럼, 내가 구속사를 아무리 등한시 여기더라도 그 화풍이 그린 역사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구속사의 최종적 종말이 말라기에 그려졌는데, 다른 종말론과는 달리 여기서는 그리스도라는 그 화풍의 화가뿐 아니라 그를 캐스팅하는 칸바일러 같은 인물까지도 예고한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칸바일러가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 식별할 수 있었습니다. 


불을 준비하는 사람, 연단.

신구약 구분 없이 연단이라는 제련과정을 많은 비유에서 사용합니다. 제련은 불의 과정입니다. 물에 담글 때가 있지만 결국엔 불을 견고케 하는 물입니다. 두드릴 때가 있지만 그 역시 불을 두드리는 일입니다. 이런 반복은 괜한 것이 아니라 가장 순수한 결과를 얻기 위한 시간 작업이라는 점에서 우리네 인생과 닮습니다. 그 분이 우리 삶을 이같이 제련할 수 있도록 불을 준비해 그리스도의 칸바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물을 준비하는 사람, 표백.

말라기가 읽어낸 종말은 사람들이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악행하는 자를 좋게 보고 기뻐하신다고 까지 비아냥댔습니다(말 2:17). ‘정의가 없는 것’이 악이 아니라 ‘정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악으로 보는 통찰입니다. 그러므로 깨끗케 해야 할 대상 악은 바로 정의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본악인 것입니다. 이 악을 씻어낼 준비를 함으로 그리스도의 칸바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 공의.

값비싸고 기름진 제물이 공의로운 제물이 아니라 불로 연단 받고 깨끗하게 씻은 자들이 드리는 제물을 공의로운 제물이라고 말씀합니다(3:3). 결국 제물의 공의는 그 드리는 자의 성결에서 형성되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삶을 연단하고 청결케 준비 시키는 사역을 통해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칸바일러가 됩시다.

말라기 종말론의 그 ‘준비하는 자’란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말라기가 예언한 종말을 초대교회가 그렇게 확정지은 것입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은 목숨 걸고 사람들의 삶 깊숙이 파고들어 불과 성령으로 세례 주는 분이 임박했다고 외치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에필로그 | 두 무명의 칸바일러

그리고 끝으로 세례 요한처럼 젊어 활력 있는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예수의 칸바일러 두 사람을 더 소개합니다. 무명의 늙은 선지자 시므온과 안나. 이 둘은 아무것도 아닌 것같은 삶을 살다가 그 삶이 다 저물녘에 갓난아기인 예수를 한 눈에 알아봅니다. 그 ‘알아보는’ 사역을 감당하고는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이것이 바로 구속사의 진정한 화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의 세계관에 의해 예고된 종말론과 또 그것을 성취 해내고 있는 초대교회의 구속사는 살아서 유명했던 피카소 보다는 무명했던 고흐와 더 친근하다 하겠습니다.  





* 이미지 참조:

http://www.guardian.co.uk/artanddesign/2009/may/04/vincent-van-gogh-ear

http://www.vggallery.com/painting/p_0455.htm

http://twistedsifter.com/2010/11/10-most-expensive-paintings-sold-in-21st-century/

http://twistedsifter.com/2010/11/10-most-expensive-paintings-sold-in-21st-century/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most_expensive_pain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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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12. 2.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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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라는 말은 예수 재림시에 신도들이 하늘로 들림받는 성경 예언이 1992.10.28에 일어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의 캐치프레이즈였다. 그러나 당일 예언은 빗나갔고 리더였던 목사는(이장림) 구속되었다. 구속 된 사유는 예언이 빗나가서가 아니라 사기 및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였는데 그의 자택에서는 1993.5.22 만기 도래되는 환매채와 수표 1억9300만원, 그리고 미화 2만6700불이 발견되기도 했다. 반면, 신도중에는 퇴직금을 모두 바친 철도공무원, 아들과 가출해 선교회에 합류한 주부, 여기에 합류를 막는다고 음독자살한 여고생, 그리고 심지어 ‘들림’을 가볍게 하기 위해 낙태를 한 임산부도 있었다고 전한다.

                         * 사진 설명: 당시의 종말은 북한의 남침과 연계되어 나타날 것으로 주장되기도 했는데
                                                 목사들 중에는 벌거벗고 그것을 전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사야처럼?...


                                * 사진 설명: 이후 92년 11월 2일에는 동아일보에 소형광고로 사과문이 게재되기도 했다.
                                         

프린서플 | 바른 종말론

휴거(携擧)라는 한 현상에 몰입했던 이 단체의 핵심 리더였던 이장림씨의 목적이 단순 금전사기였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서에도 없는 어휘인 이 ‘휴거’라는 말이 다름 아닌 이장림 그 자신이 과거 번역 과정에서 만들어낸 것이었다는 점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생명의 말씀사 소속 번역자였을 정도로 지식에 문외가 아니었을 그가 1978년 Ernest Angley 소설 Raptured를 번역하면서 휴거라는 한자식 표기를 처음 들여온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설류를 우리는 일종의 <묵시문학>이라는 장르로 분류합니다. 성서 자체가 이러한 묵시 환경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을 정도로 그 유래가 깊은 것이지만, 올바른 이해가 없다면 얼마든지 또 그런 혼란은 반복될 것이며, 실제로 강력한 스마트 환경에 진입한 오늘날도 이미 도처에서는 동종의 현상들이 포착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묵시를 이렇게 계시로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공의의 파괴.

종말의 주제는 휴거, 바코드, 베리칩이 아니라 <공의>입니다. 왜 종말이 오는 지, 왜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종말은 실제로 유대교 형성의 배경이었습니다. 유대교는 태초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처음’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맞지만 그 창조주를 언제 기억해냈는지가 중요한데 그 때가 바로 ‘종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죄도 한 개체로서가 아닌 하나님 공의에 관한 포괄적 침범을 다룬 것이며, 이후 전개되는 모든 죄상들 역시 공의의 붕괴를 기록한 것이고, 또 그것은 오늘날의 종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의의 심판.

심판은 회피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다미선교회>의 실패는 휴거를 마치 심판 회피의 거점으로 축소한 데 있습니다. 심판의 장소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십자가 도상입니다. ‘들림’도 그곳에서 발생합니다. 계시록을 이 전제와 분리시켜 읽을 때 우리는 또 다른 심판대, 또 다른 예수를 소개 받게 되는데 십자가 도상과 그곳에서 발생한 사건보다 더 강도 높은 종말이란 있을 수도 없고 또 있어서도 안됩니다. 이단 되기 십상입니다.

공의의 회복.

성서가 남긴 묵시와 작금의 묵시현상 간 가장 큰 차이점은 ‘회복’을 말하는 가에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회복을 의미했으며, 광야 성소도 회복이었으며, 다윗 성전도, 그리고 예수의 살과 피 역시 회복을 기표로 갖는 종말이었습니다. 구속사적 종말은 언제나 공의의 회복을 목적하고 재연되어왔습니다. 파괴와 불안이 아닙니다.


에피로그 | 반복의 도그마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는” 사람들 가운데 근본적인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은 한 마디로, 성례전의 ‘반복’에 실패한 자들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초림 이후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종말과 심판은 바로 이 성례전에서만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종말에 가서도 보전해야 할 최선의 도그마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본문의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는 대목은 마가와 마태복음에 공히 나오는 본문인데 유독 여기 누가복음에서 만은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아닌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로 기록된 것을 봅니다. 왜 “모든 나무”가 추가된 것일까. 그것은 지정학적 유대교 팔레스타인 만의 독점적 사건으로서 종말이 재생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나라, 모든 시대에 발생하는 일종의 반복을 고려한 번역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 이미지 참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110200209219013&edtNo=3&printCount=1&publishDate=1992-11-02&officeId=00020&pageNo=19&printNo=21988&publishType=00020

http://history.khan.kr/176

http://wnewskorea.cafe24.com/bbs/board.php?bo_table=weekly_issue&wr_id=199

http://ndarticle.joins.com/pad/2012/10/25/2012102519441539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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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