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2. 10. 22.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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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신분제 사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분제 없는 사회란 없었지만 특히나 현 우리사회에 남아있는 신분적 잔재의 모체는 조선시대라 하겠다. 다음과 같은 과정이 있었다. 그 시대 초기에는 천인(노비)을 제외한 양반, 중인, 서민들이 역(役)과 세(稅)를 부담하는 사회였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양반만 지위가 상승하고 나머지는 노비와 함께 지위가 격하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회가 그렇게 편 방향으로 가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국토를 일구기 위해서는 개량 농법, (수)공업 발달을 장려할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그러한 경제적 출구가 신분적 출구를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어떤 음성적 신분세탁은 차치하더라도, 경제 중심 구조 자체가 그것을 이완시키고 재편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속에 빚어지는 신분 갈등이란 사실 그 특권을 영속시키고자 했던 양반의 욕망과 그 천한 역할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상민들의 욕구의 충돌이 낳은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마치, 이미 16세기 유럽이 종교개혁 전후로 세속영주와 주종관계가 없는 경제인 - 상인, 선원, 기업가, 은행가 등 도시의 신흥 자유 시민들 - 중심으로 계층 구조가 재편되었던 것과 일반이다. 우리나라나 유럽이나 격변을 겪은 이들 사회가 어떤 경제적 역동을 통해 이전의 불합리한 족벌 체제를 이완 시키고 쇄신했다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특권을 향유하고 영속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여전히 족벌의 또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단지 그 중심이 경제라는 체계로 바뀌었을 뿐이다.

프린서플 | 족보가 없는 사람들

유대인들의 사회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미 성경에서는 바리새파나 사두개파가 소개되고 있으며 그 파벌 내에서도 스승에 따라 갈리었다. 바울은 가말리엘이라는 이름을 문파로 소개한 바 있으며(행 22:3) 자신을 베냐민 지파로 자부하기도 했다(롬 11:1). 왕을 배출한 지파로서 그것은 회심 전까지만 해도 자부할 만한 것이었듯이, 유대인들에게도 왕의 혈통은 제사장 혈통과 함께 전통적 최상위 계급층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들이 신앙으로 대망했던 메시야 정체성과도 일치를 이루는 관념이었다. 구약시대로부터 왕 또는 제사장으로서 메시야가 이미지화가 되어 투명되어 온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헤롯 왕이 가지고 있던 콤플렉스에서 잘 반영되어 나타난다. 그는 현직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혈통 면에 있어서 언제나 열등감이 있었다. 동방박사 말을 듣고 메시야 출신지를 추적하고 또 그를 제거하려고 시도하는 행위는 그 정치적 열등감을 잘 대변해주는 대목이다. 한편, 그는 그러한 자신의 핸디캡을 <멜기세덱>이라는 당대의 인물 상(像)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는 사료가 있다(F. F. Bruce). 헤롯이 그를 통해 자기 약점을 극복하고 자신에게는 미비한 그 어떤 ‘전통’을 확보하고자 했던 데에는 다음과 같은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이 갖는 위치에 기인한다.  

첫째, 그는 살렘의 왕이었다.

살렘이라는 지명은 정경 속에서는 희미하게 그 발음으로만 남아 있지만 예루살렘과 연관을 맺고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예루살렘은 다윗 왕의 성지로서 하나님과의 계약을 상징하는 터전이며 결국에 가서는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야 상과 연결지을 수 있는 선재 된 지명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아브라함을 만난 자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마치 우리나라의 단군 시조와도 같은 지위이다. 열두 지파의 할아버지이다. 왕을 배출한 지파든 제사장을 배출한 지파든 모든 지파들이 그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그 아브라함을 이미 앞서 만났고, 또 그에게 복을 빌어주었던 제사장이 현현 한다면 그는 그 모든 지파 서열보다도 앞선 제사장인 것이다.

셋째, 그는 족보가 없는 자이다. 

멜기세덱의 정체성은 왕이자 제사장이라는 사실 뿐이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신을 섬기는 제사장이었는지에 관한 정보는 알 길이 없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족보 없음>을 예수님의 메시야 정체성으로 주석하고 있는 것이다. 

에필로그 | 누가 멜기세덱인가

그러나 한편에서 헤롯 왕과 같은 세속의 왕 역시 자기에게 그 정체성을 참칭으로 활용했던 것처럼, 세상의 왕 곧 으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방식대로 스스로 메시야 콤플렉스에 빠져서 산다. 그렇지만 그가 투영한 것이 세속의 왕인지 아니면 우리 살렘 왕/대제사장 예수님의 제자인지는 금방 판별할 수 있다. 바로 <섬김>이다. 

그러므로 <족보 없음>이란 어떤 서열을 무시해도 좋다거나 전통과 근본을 무시해도 좋다는 뜻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섬김을 통해서 그 차별을 극복하는 영원한 관계라는 점에서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과 연결 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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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8. 27.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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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꿈 깨는 이야기

2004년9월13일 오프라 윈프리는 “여러분 소원을 이뤄줄 수백만 달러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는 말로 <꿈은 이뤄진다>회분 토크쇼를 시작합니다. 그날 방청객은 차가 꼭 필요한 사연을 써 미리 모아진 여성 276명이었습니다. 이들 중 11명만 무대로 불러내 차 키 한 개씩 주자 부러움으로 열광했습니다. 이어서 그녀는 나머지 265명에게 작은 선물상자 하나씩을 나눠주고는 말합니다. “여러분께 드린 상자 중 하나에 12번째 자동차 키가 있습니다.” 모두 그 키의 주인공이 되기를 기대하며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여는 동안 여기저기 환호성이 울렸습니다. 모든 상자 속에 자동차 키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2만8천 달러 정도하는 GM사 폰티악 G-6의 키였습니다. 총 가격은 770만 달러, 오프라 윈프리의 선물이었습니다. 며칠 후 CNN머니는 이들 각각에게 최고 7천 달러의 세금이 부과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습니다. 소득세와 소비세는 본인이 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윈프리 사무실 대변인은 “자동차를 선물 받은 사람들은 세금 내고 차를 보유하든지, 차를 팔아 그 돈으로 세금을 내든지, 아니면 차를 포기하든지 3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10월29일경에는 실제로 경매 사이트 이베이에 “오프라 윈프리가 방청객에게 준 車 선물”이라는 명칭으로 매물이 나왔습니다.

선물은 자동차였나 현금이었나... 그럼 꿈은, 그것이 선물이기에 기쁜가 환금(換金)가치였기에 기쁜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 후 2010년에 오프라 윈프리는 폭스바겐사로부터 세금 포함 차량 전체를 후원 받아 이런 이벤트를 다시 한번 합니다.  


프린서플 | 꿈에 관한 하나님의 전개 방식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천막 가운데 있구나”(삼하 7:2) 하는 마음이 다윗의 꿈이었습니다. 대적을 물리쳐주시면 내가 성전을 짓겠다거나 내가 정권을 잡으면 성전을 짓겠다는 식의 공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궤를 바라보는 작은 탄식이 바로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을 자기 대에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피를 흘린 군인이었기 때문입니다(대상 28:3). 대신 아들이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자원을 확충하고 죽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그 꿈을 이룩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는 과정은 나라 전체에 막대한 부담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분열의 불씨를 남겼습니다. 솔로몬은 본문과 같은 기도를 통해 자신의 꿈 곧, 아버지가 받았던 하나님과의 약속을 토대로 하는, 성전 중심의 비전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성실한 신앙, 건축으로 야기된 분열의 씨, 그리고 외세의 침략으로 그 모든 비전과 꿈은 사실상 붕괴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 꿈은 붕괴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꿈의 질료는 예수님의 몸을 통해 완전한 형식으로 탈바꿈 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서입니다. 

첫째, 부정하심을 통해서 입니다. 

우리의 꿈은 사실상 부정되어야 합니다. 단순한 부정적 사고가 아닙니다. 아브라함 꿈이 부정되었고 - 그는 처음 이삭의 출생을 믿지 못했습니다 - 야곱의 계획도 처음엔 부정되었고, 요셉의 꿈 또한 부정되었으며 심지어는 예수님의 뜻조차 포기되었습니다.

둘째, 긍정하심을 통해서입니다. 

하늘의 아버지 뜻이 땅에서 아들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 모든 꿈이 다시 재편된 것입니다. 아니, 아예 원래부터 그렇게 설계가 된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 꿈의 진정한 의미를 삶의 부정하심을 통해 발견했고, 야곱이 받아낸 이스라엘이라는 꿈의 이름 역시 부정하심의 역사 속에서 그 심원한 의미를 깨닫습니다. 이 긍정하심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 정말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셋째,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야곱, 요셉, 다윗, 솔로몬, 그들 모든 개인적인 꿈들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 일체를 예수님의 몸, 삶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우리는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이 과정에서 그 분이 보여주신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처음 부정되었던 것도 (우리의) 믿음이었습니다. 두 번째 긍정하심도 (하나님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따라가려는 우리의 머나 먼 미래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꿈에 관한 전개 방식입니다.


에필로그 | 쪼갤 수도 섞을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꿈

따라서 그 꿈, 곧 그 유일한 선물은 어떠한 경우에도 쪼갤 수도, 섞을 수도, 그리고 바꿀 수도 없는 그 자체로서 가치입니다. 그 선물을 성령이라고 부르며(행 2;38), 폰티악 G-6나 뉴비틀즈 같이 환금(換金) 가치 이벤트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2012년 8월 19일 성령강림 후 제13주
본문, 왕상 8:41-43, (c.f. 1, 6, 10-11, 22-30).
 (c.f. 시 84; 엡 6:10-20; 요 6:5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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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7. 16.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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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인디아나존스: 잃어버린 성궤

1981년 <인디아나존스: 잃어버린 성궤>가 발표된 이후 성궤의 실존에 관심이 고조된 적이 되었습니다. 이미 1913년 성궤를 찾아 떠난 고고학자가 존재했던 사실이 이 영화로 재고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료 속에서 “성궤는 이스라엘에서 이집트로 옮겨졌다”는 단서를 잡고 카이로에 거처를 잡은 그는 기록을 탐독하던 중 성궤 운반 시간대를 대조해 “성스러운 금괴는 시오니 제국(현재 에티오피아)으로 옮겨졌다”는 문장을 찾아내 에티오피아까지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는 대학 친구에게 보낸 1919년9월13일자 편지를 마지막으로 행방불명됩니다. 친구는 그를 찾아 에티오피아까지 와서 ‘악섬’이라는 지역에서 에티오피아 정규군 복장이 아닌 이상한 복장에 창을 든 경비병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악섬의 지도자로부터 “네 친구는 성스러운 곳을 들어갔다가 천벌을 받아 죽었다.” 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는 친구의 시신 수습을 위해 한 지하교회를 찾아갔다가 그곳서 ‘천벌을 받아 죽었다’는 수많은 유골들과 함께 구부린 채 죽어있던 자기 친구를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실제로 솔로몬 왕으로부터 위임 받았던 성궤가 악섬의 20여개의 지하교회들 중 어딘가 한 곳에 숨겨져 있다는 비밀을 전해 듣게 됩니다. 여러 분은 이 이야기를 믿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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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야웨의 궤(櫃)   

본문에서는 다윗이 매우 위험천만한 일 하나를 시도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지금까지 모든 신앙의 초점이었던 ‘하나님의 궤’를 특정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작업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작업 도중에 그만 웃사라는 사람이 부주의로 죽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이 사건 속에서 우리는 이 성궤에 얽힌 다음 세 가지를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성궤(법궤)를 중심한 신앙은 터부인가 믿음인가.

성궤는 요단강 강물을 끊는 능력이 있었습니다(수 3:13). 뿐만 아니라 여리고라는 철옹성을 함락시키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수 6:16). 그리고 엘리 제사장 말기에 가서는 이 성궤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적이 있는데, 당시 성궤 스스로가 그들의 우상의 머리와 손목을 끊고 그 스스로가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기이한 힘을 보여준 바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비롭고 신성한 힘의 근원이 과연 터부 신앙에 반응하는 것인지 아니면 믿음 신앙에 반응하는 것인지, 이것이 이 본문이 갖는 핵심입니다.

둘째, 성궤로 인한 저주가 복으로 바뀌는 시점은 언제인가. 

성궤를 이동 시키다가 발생한 불상사로 겁을 먹은 다윗은 그것을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에 두게 했습니다. 오벧에돔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왜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을까? 웃사는 만졌기 때문에 저주 받았고 오벧에돔 은 만지지 않았기 때문에 복 받은 것일까? 웃사는 단지 뛰는 소 때문에 궤가 떨어질까 봐 붙든 것뿐인데 왜 그는 죽고 오벧에돔은 복을 받았을까? 물론 ‘웃사는 죄 있었고 오벧에돔에게는 없었고’ 라는 식이면 그만이겠지만, 오히려 오벧에돔이 정통 레위지파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관심해야 할 중요점은, 하나님께서 성궤가 그 집에 머무는 동안 전혀 저주가 없었고 도리어 복 받은 것으로 타인의 이목에도 띄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즉, 오벧에돔 집에 머무는 동안 성궤에 대한 터부가 해제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터부의 완전한 해제는 다윗이 그 궤 앞에서 하체를 드러내고 춤 춰도 (웃사처럼) 급사하지 않는 담대함의 예배로 드러납니다. 이를 질타하는 미갈이 오히려 터부에 걸립니다. 그리고 다윗의 그 시도적인 찬양과 오벧에돔의 직책이 다름 아닌 찬양이었다는 사실은 이 성궤의 터부 해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예배가 갖는 의미입니다.

셋째, 성궤의 행방은 어디로 갔는가.

오벧에돔이 석 달간 받은 복은 석 달로만 끝나지는 않았던 것같습니다. 세례 요한의 목을 친 헤롯 왕이 에돔의 자손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그 복은 나름대로 유구했던 것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복이 복의 재생산으로 이어지는 지 아니면 새로운 터부로 재생산 되는 지, 그 지점에 성궤의 행방이 감춰져있다 하겠습니다. 바로 여기에 다윗이 받아낸 약속의 영원함, 곧 성궤의 행방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에필로그 | 어디에도 없다는 어디에든지 있다

성궤는 영어로 the Ark입니다. 노아의 방주도 Ark라고 부릅니다. 구별된 에덴동산도 일종의 Ark였습니다. 솔로몬 성전도 Ark일 수 있습니다. 성전 되신 예수님의 몸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에덴동산도 성전도, 예수님의 육체도 또 그의 무덤도, 그리고 성궤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디에도 없다는 말은 어디든지 있다는 개념으로 치환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흑암 속에서 빛으로 틈을 벌린 이 지구도 일종의 알, 즉 Ark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지구를 성궤로 인정하지 않는 이치에서 그 성궤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7월 15일 성령강림 후 제7주
본문, 삼상 6: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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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6. 18.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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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프로메테우스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조물주를 만나봐야겠어. 만들어 놓고 대체 왜 파괴하려는지...,” 

이런 반신(反神)적 다이얼로그에 기인해 반기독교 이야기로 규정받기도 하지만, 그 말은 어떤 면에서 이 세상 환경들로부터 우리 인간들이 들어야 하는 목소리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어낼 수 없는 환경을 우리가 만들어낸 것으로써 상당부분 파괴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 파괴는 물과 공기와 토양뿐 아니라 생명 패턴에까지도 미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이미 그들의 조물주인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이름 짓는 권능이 그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진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면 모든 언어의 궁극점인 ‘이름,’ 즉 그 존재들이 사는 집(세계)인 그 ‘이름’을 짓는 능력은 이미 조물주에 상응한 권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로써 단지 “이름을 짓도록 하셨다”는 행위에서 그 깊으신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이며(시 92:5), 반면 “왜 만들어 놓고 파괴하려느냐”라는 어떤 이들의 소리를 통해서는 그 얄팍한 마음 됨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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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잘 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만들어 놓고 파괴하는 분이 아니라 “잘 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역사 모델로 합니다. 한 가정으로 출발해 국가의 형성과 성장 그리고 쇠락과 패망의 역사과정뿐 아니라 그 너머에 재건에까지 이르는 흥망성쇠의 장구한 ‘반복’을 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지파동맹에서 왕정 단계로 들어서는 대목은 그 역사를 감싸고 계시는 하나님 손길의 의도를 읽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청원 할 때 청원의 직접 대상은 마지막 사사 사무엘이고 하나님은 최종 결정권자였습니다. 사무엘은 왕의 제도를 좋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최고 실력자였던 사무엘이 자신의 일가가 누리는 절대 지위를 놓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내 그의 태도는 우리를 혼돈스럽게 만듭니다. 왕의 청원을 반려하고 싶어 하면서도 왕을 엄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제도를 ‘기피한다,’ ‘선호한다’라는 관점 보다는 백성들이 처한 모든 환경 속에서 항상 새로운 기대를 놓지 않으시고 복을 주신다는 그분의 속성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을 세워주셨습니다(삼상 10:24; 11:14).

왕의 제도를 반대했기에 이후에 쳐다보지도 않으셨던 게 아니라 합당한 인물이 그 자리를 맡을 수 있도록 엄선하시고, 그리고 기쁨으로 그 환경을 새롭게 열어주십니다. 왕이 되기 전의 사울은 수줍을 정도의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된 이후 그 위치를 감당하기에 몇 가지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세상 관점에서는 그만한 리더가 없을 것입니다. 체격과 그리고 용맹함, 그는 전사답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다 죽습니다. 그에게서 기름부음이 떠난 건 어디까지나 신앙적 문제 때문입니다.

다윗 왕을 세워주셨습니다(삼상 15:34-16:1).

사울이 지도자로서 실격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때에도 왕의 제도 자체를 둘러엎으시고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좋은 제도/환경이 될 수 있도록 일하십니다. 사무엘은 다윗이 소년일 때에 기름을 부어 예비시킵니다. 다윗은 시상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 깊은 시상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중요한 연관을 맺게 됩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미완의 삶으로 다음 세대를 맞습니다.

솔로몬을 세워주셨습니다(삼하 12:25).

솔로몬의 왕 됨은 자연스런 ‘세습’ 같지만 많은 역경을 거쳐서 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력 이전에, 앞서 모든 왕들에게 그러했듯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는 그 어떤 한 부분이 그에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왕이 된 후 재물과 복수가 아닌 지혜를 구하는 한 장면으로 압축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여디디아, 그는 하나님에게 사랑받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도 쇠락을 걷습니다.


에필로그 | 새로움의 하나님

이는 ‘모든 인생은 쇠락할 수밖에 없구나’를 가르치는 내용이 아닙니다. (1) 이미 예고된 왕의 제도가 지닌 속성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의 새로움/회복을 노력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3) 우리 자신의 장점을 쇠락시켜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우리는 언제나 그 새로움을 파괴해왔다는 점에서 우리 스스로가 파괴를 일삼는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6월17일 성령강림 후 제3주
본문, 고후 5: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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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4. 30.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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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슈퍼맨

어려서부터 공상과학 소설에 빠져 살던 두 친구가 만화를 만들었습니다. 글을 주로 쓴 친구는 주인공에게 자기처럼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입혔습니다. 좋아하는 여성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것도 자기를 닮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엄청난 초능력자입니다. 가슴에는 역삼각형의 S자를 새겨줬고, 악당들과 싸울 땐 더 멋져 보이라고 망토도 달아줬습니다. 그림을 맡은 친구가 모든 걸 멋지게 그려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을 알아주는 출판사가 없었습니다. 번번이 퇴짜를 맞자 상심한 나머지 그림을 몽땅 찢어 불태우고 다시는 그리지 않겠다고 다짐 하다가 Detective Comics라는 한 출판사 잡지를 통해 간신히 빛을 봅니다. 그 해가 1938년입니다. 처음에 이 회사 사장은 이 만화를 신통치 않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출판사가 이 만화를 표절하자 가치를 인지하면서 지면 할애를 늘렸고 평균 25만 달러였던 매출은 두 배로 늘어납니다. 그렇지만 원저자인 두 사람은 회당 500달러밖엔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 주인공 캐릭터 저작권까지 같이 넘긴 바람에 훗날 이 캐릭터 가치가 엄청나게 상승했음에도 둘에게는 별 소득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회사와 소송을 거듭하다 전 재산까지 날리게 됩니다. 후일 만화계의 설득으로 회사로부터 소정의 연금도 받고 책에 이름이 나올 정도로 명예도 회복되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캐릭터만큼 부를 거두진 못하고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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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렸던 친구 조 슈스터는 1992년 78번째 생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고, 글을 썼던 친구 제리 시겔은 4년 후 LA에서 82세 나이로 그 뒤를 따릅니다. 이 만화책 주인공이 바로 슈퍼맨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슈퍼맨은 이들 자아가 담긴 원작 위 에 여러 사람의 갈망이 덧입혀진 영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프린서플 | 버린 돌

누군가를 고대하는 대망(待望) 사상은 모든 민족이 지닌 보편적 사조입니다. 인도의 하누만 이야기를 리메이크 했던 중국의 서유기 주인공이 돌에서 태어난 것처럼 우리나라 동(東)부여의 왕 금와(金蛙)도 돌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심지어 미국판 손오공인 슈퍼맨마저 운석, 즉 돌을 기원으로 합니다. 서로 물리적 교류가 가능한 범위 내의 지역 문화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도저히 교류가 불가능한 지역 간 문화 속에서도 이러한 사조가 보편적으로 분포되어 있다는 것은 그 대망에 응할 누군가가 실제로 정말 존재한다는 객관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돌이 “버려진 돌”이라는 역설로서 그 돌의 진위를 가려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버린 돌입니다(행 4:11; 벧 2:7b; 시 118:22).

세상이 대망하는 돌은 최후에 가서는 사람들의 환호와 영광을 한 몸에 받는 돌이지만 이 돌은 최후의 순간까지 도리어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서 그 이야기가 완전히 종결됩니다. 그렇게 끝난 것을 하나님께서 땅 속으로부터 다시 꺼내 머릿돌로 쓰십니다. 

약속의 돌입니다(c.f. 창 28:18; 31:45).

다윗은 여느 왕들처럼 왕의 혈통에서 낳고 자라다가 등극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가 혁명을 통해 보좌에 올랐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울 왕과 사람들로부터 거부되면서도 끝까지 인내하다가 이스라엘을 통일해낸 인물입니다. 그의 고통이 시편 면면에 묻어나고 있으며 특히 118편 본문 속 <버린 돌>도 이때를 상징하는 시어(詩語)입니다. 이스라엘의 돌이 야곱의 베개였다면(창 28:11, 18) 그의 돌은 버려진 돌인 것입니다. 이 돌의 약속대로 대망의 예수께서 오셔서는 똑같이 <버린 돌>로서 삶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며 그를 거부 했습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 19:15).

그 돌이 머릿돌 된 집에 의(義)의 문이 달렸습니다(시 118:19-24).

다윗 자신이 그러한 삶을 통해 실제로 아들 솔로몬 성전의 머릿돌 역할을 한 것처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야를 대망하는 모든 민족의 머릿돌이 되어 주셨습니다. 오로지 그가 머릿돌로 계신 하나님의 집에만 의의 문이 나 있으며, 반대로 의의 문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집이기도 합니다.


에필로그 | 머릿돌

다윗은 혈통도 혁명도 아닌 방법으로 왕에 등극한 특별한 인물이지만 통치 과정에서 자신의 탐욕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우리와 같은 보통의 사람이었습니다. 왕으로서 그의 종말, 그리고 빛바래 스러져 가는 후손들로 얼룩진 그의 가계를 볼 때 그는 버려진 돌인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돌에 임했던 하나님의 약속이 다시 숨을 쉬면서 모든 민족을 품는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2012년 4월 29일 부활 후 제4주
본문, 행 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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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