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속에서2012. 9. 17.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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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다음 세 단계 분류를 갖는다.

첫째 지능, 둘째 꾀, 셋째 이해.

지능은 보편이고 꾀는 혁신이라면, 이해는 공감이다.


보편은 주어진 것이지만

혁신은 오류에서 비롯된다.


혁신은 일종의 혁명이지만

혁명은 일종의 반란이기 때문이다.


사단이 혁신이라는 문화와

반역이라는 혁명 속에서

공존하는 원리이다.


그래서 사단은 도깨비가 아니라

혁신과 문화라고 이르는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진화의 시작>인 셈이다.


또 그것은

사회적 개혁이나 군사적 혁명,

그리고 심지어는 종교개혁이

곧바로 부패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혁신과 문화의 발원점인 꾀는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에 기인했지만

세 번째 단계 지혜인 <이해>는 

다시 회귀하고픈 미련에서 잔존된 것이다.


절대자가 이들 중 어느 것은 쓰고

어느 것은 쓰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세 가지 모두 섭리다.


다만, 이와 별개로 지혜의 실체는 따로 있다. 배워서 이르는 것이 아니다.


c.f. 함께 보기 http://www.mimoonchurch.com/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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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에서2012. 8. 4.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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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의 <5가지 신 존재 증명>에 대해 발끈하는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교롭게도 이공 계열이었다. 왜들 발끈하는지 이학적 반론은 들어도 잘 기억에 남지도 않지만 그들에게서 발견된 공통점은 하나같이 아퀴나스 증명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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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퀴나스 증명은 다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지만 사실 나머지 네 증명은 모두 첫 번째 증명이 지닌 논리에 귀속되는 것으로 볼 수 있기에 첫 번째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겠다. 첫 증명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운동으로부터 증명,” 움직이는 사물(유동자)을 인식할 때 우린 그것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모든 유동자는 그 자신 아닌 다른 무엇인가에 의해 움직이는데, 그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들을 운동시키는 그 무엇인가가(부동의 동자) 있을 것이다. 바로 그 부동의 동자(不動 動者) 즉, 원동자가 바로 신이다.
결국 운동하는 것들의 존재를 통해 운동하지 않을 법한 그 유일한 존재를 논증한 문장이다. 구시대 논증일 수밖에 없고 귀납 논리에 치중된 면도 크지만 아퀴나스가 이 아이디어를 뽑은 원안이 지닌 진술의 방식,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이 언제나 그렇듯 풍자적 과학 논술에 상당한 것쯤으로 봄이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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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저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부동의 동자는 두 곳일 것같다. 그는 동물이 대체로 운동하는 원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운동의 3요소를 정리한다. (1) 운동을 유발하는 원동자가 있어야 할 것이고, 다음은 (2) 운동의 수단, 그리고 (3) 피운동자(운동을 시키는 존재)이다.

아퀴나스가 힌트를 얻은 부분은 우선 (3)항 즉 ‘피운동자’라는 대목에서 <최종적 피운동자>을 유추함으로써 아마 신 존재와 연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동 동자”의 존재를 밝힐 수 있는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정한 풍자 대목은 바로 (1)항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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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항의 “운동을 유발하는 원동자”를 두 개로 분할하고 있다. 그들은 각각 <움직여지지 않는 자>와 <움직이며 움직여지는 자>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부동자”의 개념이 서술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우리네 같은 동물을 움직이게 하는가?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자의 일단은 바로 <욕구능력>이다. 먹잇감의 냄새를 맡은 동물은 그 먹잇감을 향해 장소를 이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욕구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희망”과 “욕망”으로 나뉜다. 양자 모두 계산능력인 동시에 추론능력이다. 그러나 지성은 추론적 사고가 아무리 명령을 해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양자를 가른다. “희망”은 지성이지만 “욕망”은 지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움직여지지 않는 자>의 실체이다.

신체에 관한 풍자로 하나를 더 들어보면 무릎의 경첩관절이 움직일 때 볼록 면은 정지되어 있고 오목 면이 움직인다. 이것이 운동이라 부를 수 있는 그 움직임의 끝과 시작이다. 한 부분은 반드시 정지해 있어야 운동이 시작된다.

이학/과학자들은 말 할 것이다. 부동자의 존재는 틀렸다. 저절로 움직이는 것이 물리학적으로 얼마든지 존재/규명된다. 그러나 이 풍자는 그런 뜻이 아니다.

이른바 운동이라 함의 전제는, 관절의 예에서 그랬듯이 <움직이는 존재>와 <움직이지 않는 존재>가 반드시 함께 존재해야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일종의 ‘테제’로서 풍자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제 아무리 스스로 운동을 시작했고 영원히 스스로 운동을 하고 있는 존재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운동>일 수 없는 것은, 정지된 그 어떤 대상이 있어야만 <운동>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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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 무중력/진공 상태에서 어디론가 계속 날아간다고 했을 때, 그것은 물리학적 운동일지는 몰라도 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운동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텔로스가 있는 운동과 텔로스가 없는 운동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풍자적 진술에 더하여 지극히 과학적 표현 하나를 덧붙여 말한다.

“희망은 미래를 볼 수 있지만, 욕망은 미래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둘 다 욕구다.”

여기에서 짐승과 인간의 분류도 갈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둘 다 동물이다.  

그러면 끝으로,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최고의 절대 지성은 누구인가? 예수 아니었던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욕망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지성 - 곧 희망이나 소망 - 으로 알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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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에서2012. 7. 14.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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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대한 신앙적 진술>

하나님께서 오늘 새벽에 꿈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꿈에서 내가 스케이트를 받아 신고 탑니다. 그러나 앞으로 잘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얼음을 지치는데 날이 미끄러워 잘 지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스케이트 날을 만져보니 각각 반대쪽에는 날이 쓸 만한데..., 신발을 바꿔 신고 있습니다. (신발이 미끄러워 좌우를 바꿔 신어야 하는 것인지 좌우 신발을 바꿔 신어서 미끄러운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 부분에서는 의식이 돌아왔기 때문에.)

<꿈에 대한 신앙적 해석>
// 스포츠 중에 스케이트는 내가 유일하게 잘 할 수 있는 스포츠입니다. 빠르게 달리는 것보다는 아름답게 또는 박력 있게 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아이스하키 또는 피겨 스케이트를 선호합니다.
// 유리한 종목으로 잘 할 수 있지만 결정적으로 날이 미끄러운 것은, 그리고 그것을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속에서 스케이트 신발을 “좌우 바꿔 신었다.”고 확정한 것은 “순서가 바뀌었다”는 계시로 받아들입니다.
// 그 순서가 바뀐 대상은 바로 “기도”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 아무리 잘 하는 종목으로 한다 해도 기도로 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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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설명: 일어나자 마자 그린 그림. 꿈에는 명확하게 피겨였음. 좌우를 더욱 헷갈리게 하는 그것 피겨]


꿈은 과연 계시인가? 

<심리론>에서는, 꿈은 심리이지 계시일 수 없다. 융이 다소 신적 계시 가능성을 타진했다고는 하지만 신앙인들이 말하는 그 하나님을 염두에 둔 게 아니다. 


계시로서 꿈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고 봐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꿈은 전제의 산물 아니겠는가? 내가 스케이트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스케이트 꿈을 꾸겠으며, 그리고 그 날(blade)에 관한 경험이 없다면 어떻게 무딘 날이 전진하는데 있어 장애인 줄 알겠는가? 심지어 그 경험의 한계를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태고> 시절까지 소급해 확장해놓는다. <태고>의 경험으로도 부족한 전제 영역을 더 나아가 <신의 영역>으로까지 소급하여 열어 놓았던 것. 그것이 바로 융의 신론(神論)이다. (그러므로 신앙적 신 개념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전제로 그려질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전제를 “바꿔 놓으라(바꿔 신으라)”는 파라독스 명령자는 나를 넘어서는 영역이다. 꿈의 재료를 경험했던 “나”가 있다. 꿈을 지어낸 “나”가 따로 또 있다. 이 양자가 자기 나름대로 재료를 구성/재구성 하지만, 그 최종적인 결과물을 깨고 (반대로) 계시하는 계시자(revealer)로서 “나”가 완전히 별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가 ‘둘 이상’이라고 일러 두었던 것이다.

그러면 꿈은 그리스도인만 꾸느냐, 꿈으로 된 그런 계시는 불신자에게는 없느냐. 물론 그들에게도 그런 계시가 있다. (만물 가운데 신성이기에.)

다만, 그 계시가 진리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그 계시가 (자기가 미처 모르는) 무의식에 거치되었다 안되었다로 정합성이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씀을 받은 자인가 아닌가 라는 정점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르트가 말하기를, “제1의적 계시를 예수에,” “제2의적 계시를 성경,” “제3의적 계시를 설교에”인 것이다.

요셉의 꿈은 꿈이기 때문에 계시인 것이 아니라 그 꿈을 통해서 그가 그리스도의 길을 깔았기 때문에 계시인 것이며, 느부갓네살의 꿈도 그것이 그의 꿈일 때에 계시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길을 까는 다니엘이 해석을 내릴 때에 계시가 정립되는 이치라 하겠다.

그래서 이 스케이트 꿈에서 “바꿔 신었다”는 판단이 무의식이었는지 의식이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였다. 어차피 최종 계시로서 판단은 말씀(성경)을 받은 “나”가 하는 것이고, 모든 질료와 형식이 이 말씀으로 재편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꿈을 통한 계시로서 형식이며 여기서 지나는 것은 모두 상상력의 범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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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에서2012. 5. 31.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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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에 <종의 기원>이 출판되었을 때, 당시 두 주류였던 <목적론>과 <기계론>은 크게 당황을 했다.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세계를 창조하셨기에 종말도 그가 주도할 것이라는 <목적론>과,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세상은 이미 그의 손을 떠나 기계처럼 저절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기계론>만으로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 하는 식으로 역동적인 변화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역동적인 변화”란, 쉽게 말해 “도태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다. 이 <도태>에 관한 가능성은 곧 급진적(혹은 급격한) 변화의 가능성이기도 했다. 그것은 이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생명 속에서 무수한 잠재력이 포함돼 있다는, 단지 상상이었던 것을 가능한 이론으로 탈바꿈 시켜주었다. 원형질 덩어리일 뿐인 원초적 생물 속에도 무한한 힘과 다양한 가능성이 미분화 된 채 존재한다는 이론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불균형,” “폭발,” “도약,” 이런 어휘들이 당위성과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즉, 다른 말로 하면 이 지구 혹은 은하계가 폭발에 의해 창설되었을 수도 있다는 상상까지도 학문적 이론이 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것을 베르그송의 말로는 <엘랑비탈> 그리고 현대과학의 말로는 <빅뱅>이라고 부른다.

인문학적으로는 “불균형,” “폭발,” “도약,” 이런 부도덕한 어휘들이 정당한 어휘들로 탈바꿈되어 공산주의 혹은 자본주의와 같은 어휘들이 생겨났다.

그러므로 경쟁력 있는 메가마트식 혹은 소비자 중심 교회가 지닌 각종 기술도 이런 정당성 속에서 개발된 면이 없지 않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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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에서2012. 5. 8.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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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 “감각에 속해 있지 않았던 ‘지각인 것’은 없다.”

2_ 우리 인식은 하나의 먼 기억에 의존한다.

3_ 겪었던 어떤 느낌을 회상 시키는 순간에야 무엇인가 의미케 된다.

4_ 아는 것만 본다.

5_ 어떤 사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 때 그것의 존재를 받아 들이지 못한다.

6_ 하나의 메시지를 해독하는 것은 곧 상징적 한 형태를 지각하는 것이다.

7_ 그러므로 장차 감정으로 인식될 먼저 존재했던 그것들과(놀람이나 두려움이나 믿음이나 사랑이라고 하는 그것들) 환경(맹수와 같은 그런 것들) 사이에서 인간은 몸짓으로 존재했던 것뿐이다.

8_ 언어는 거기에 입혀진 것이다.

9_ 그런 점에서 인간은 들숨과 날숨의 반복 속에서 떨어져 나온 외침으로서 한 존재인 것이지 자기네들끼리 만들어낸 생명이 아니다.

10_ 이것이 성서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인 것이다.

11_ 그러나 인류는 이 몸짓에서 심리를 가져오는 과정에서 우주를 자기 동일화 시켜 버림으로써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원근법을 발견해낸 이래 - 이 우주적 각인으로 결국 우주까지 날아갔다 - 한편으로는 이데올로기를 발현시켜 프로크루스테스로서 삶을 일삼았고 - 이 원리로 이웃을 죽였다 -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 자신을 향한 나르키소스로서 삶을 구현했으며 - 이것이 문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그 모든 사물에 생명과 의식을 부여함으로써 애니미즘을 거쳐 자기 형벌 체계인 토템을 구축하고서는, 그 여분으로 형법 체계를 완성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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