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속에서2014. 3. 26.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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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2014)는 비 기독교인이 관람하기에는 상당한 성서 지식을 전제한 영화이고,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본문에 대한 고민과 체험이 없다면 이해가 어려울 정도로 성서에 집중한 수작이다. 특히, 평소에 노아를 사랑의 교회 장로님이나 순복음 교회 장로님 정도로 연상했던 기독교인에게는 꽤나 실망을 안겨줬을 법하다.


이 노아는 러셀 크로우가 그동안 배역 맡아온 글레디에이터의 ‘막시무스’, 장 발장의 ‘자베르’와 거의 같은 타입의 인물상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는 부리나케 다메섹을 지나고 있는 바울,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버린 아브라함에 더 가깝다.


영화 초반에 노아와의 격투에서 패한 무리 중 하나가 노아에게 벌벌 떨며 “늬늬...니가 원하는 게 (대체) 뮈냐?” 라고 물었을 때 노아가 하는 말,


“JUSTICE”


이것이 이 영화를 끌고나가는 주제이며, 그것은 다음 세 가지 틀 속에서 전개된다. 첫째 정의에 대한 노아의 오해와 이해, 둘째 죄악의 전이와 그 경로, 셋째 종말에 임하는 자세이다.


본 글은 이들 세 가지 틀 속에서 성서 내적 요소와 바깥 요소들을 오가며 작은 플롯들을 정리해나가는 식으로 적을 것이다. 본인의 교리적 입장이라기보다는 문학적, 특히 해석학적 분석임을 밝혀둔다.



(1) 노아의 의(righteousness) 이해


노아의 가정을 구원시킨 성경본문,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를 원문에서 직역해오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눈(들) 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다.”


이 본문에 담긴 노아의 능동적 태도는 그 계시와 싸인이 노아가 워낙에 완.벽.해.서.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라디오처럼 들려온 게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삶의 자리 속에서 어렵사리 인식해나간 것이라는 이 영화 구도를 뒷받침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읽은 성경과 다르게만 읽히는 이유는 동물구원이 인간구원에 종속되는 게 아니라, 인간구원을 도리어 동물구원에 종속시키는 노아의 이해 때문이다. (그나마 구원시킬까 말까를 고민한다.) 그러나 그것은 “노아가 동물 보호주의자냐!”라는 항의를 하기에 앞서, 그동안 우리 인간이 환경구원을 얼마나 자기네 구원사에 종속시켜 읽어왔는지 그 이기심과 인본주의를 드러내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2) 손녀들을 죽이려는 노아


심심한 선비나 신선 같은 노아가 아니라, 자기 손녀들을 죽이려는 광기의 노인으로 등장하는 노아는 우리에게 실로 충격적이지만 ‘인간은 다 사멸의 대상’으로 확정내린 노아의 입장에서 일차적 고뇌는 단연 자신의 가족이다. 자신의 가족을 구원의 대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마지막 심판의 도구로 볼 것인가.


이를 초반부터 확정 짓고 나간 것은 아니고, 방주 축조 과정에 인식해나간 요소 가운데 하나다. 처음에 그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자신을 포함 8식구를 동물과 함께 구원받을 한 종족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며느릿감 고르러 나갔다가 목격한 인간시장의 광포는 이내 자기 가족도 예외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임무수행을 끝으로 더 이상 종족확산 없이 사멸해갈 것으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큰 아들 셈의 짝 일라의 ‘불임’은 당초에는 승선 못할 사유였지만 - 생산능력이 없으므로 - 도리어 승선의 자격으로 변한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일라의 임신으로 빚어진 임무 상 차질은 노아를 광기로 몰아넣는다. 그것은 마치 이삭을 죽이려는 아브라함에 다름 아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산으로 갔다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사라가 죽었다는 랍비 문헌이 있다.



(3) 며느리 셋 중 둘은 태아

 

허리우드 작품에서 ‘성경적’ 작품을 요구한다는 자체가 무리지만 작가와 감독이 심어둔 해석학적 기도(企圖)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노아의 가족이 방주로 들어갈 때의 순서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부인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부인들-”(7:7)


다음은 나올 때 순서의 직역이다.


“너와 너의 부인, 그리고 너의 아들들 그리고 너의 아들들의 부인들-”(8:16)


들어갈 때는 남·여가 따로 남자끼리 여자끼리, 나올 때는 남·여가 한 쌍씩 나란히!

‘생명 보존’ 공간에서의 ‘생육 금지’라는 이 신학적 의도를 이보다 - 두 여성을 잉태한 며느리 - 더 잘 표현해낸 작품이 또 있을까?.



(4) 방주 축조를 타락 천사가 도왔다


따라서 ‘두 여성’을 잉태한 며느리 플롯과 마찬가지로 ‘타락천사’에 대해서도 교리적 입장을 가하기보다는 <네피림>에 관한 감독/작가군의 놀라운 이해와 상상력을 칭찬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네피림에 관한 거의 모든 성서 안팎 문헌을 섭렵한 듯하다.


빛의 운반자였으나 타락한 천사로 사실상 루시퍼처럼 보이기에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눈살 찌푸릴 만한 플롯이지만 인간을 도운 그들은 마치 프로메테우스인 것만 같다.

 

에녹서 상의 명칭인 감시자(watcher)로 명명되는 이들은 인간처럼 진흙에 버무려져 사람처럼 땅에서 살아간다. 단, 사람이 아닌 괴물 혹은 기간테스로-.

이들은 천사인가? 사람인가? 괴물인가?




올림푸스 신들이 등장하기 이전 소위 ‘황금시대’를 지배했던 티탄족, 그리고 홍수(새 시대) 이전의 시대를 호령하던 이들이 과연 타락천사인지 괴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땅에서 힘으로 군림했던 어떤 종족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홍수 이후에도 최후의 르바임 족속으로 - 키 4.5m(신 3:11) - 혹은 가드 지역 용병들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거인은 골리앗 하나만이 아니었던 셈이다.


게다가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다윗이 통일왕국 설립 직전 부하들과 소탕한 ‘기간테스’에 대한 묘사를 보면 그들의 손가락 발가락이 각각 여섯씩이나 된다는 사실이다(cf. 삼하 21:18-22). 이 영화의 거인들은 팔이 여섯 개다.


이들이 블레셋 편에 서서 용병으로 이스라엘/다윗을 대적했다면, 반대로 노아 편에 선 용병도 될 수 있는 것이다.



(5) 두발가인과 므두셀라


두발가인과 므두셀라의 등장도 사람들을 심란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역시 의미 있는 구조를 구축하는 심볼이다.



땅에 번진 죄악의 궁극적 기점을 가인의 때로 지목하고 있는 이 영화가 두발가인을 등장시킨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두발가인은 가인의 6대손이다. 반면 므두셀라는 셋의 7대손이다. 7대손은 마지막 끝을 고하는 세대지만 6대손인 두발가인은 미완(악)의 세대이며 도구로 파괴를 일삼는다. 셋의 8대손 라멕도 그가 죽인 것으로 나온다. 불완전 수 ‘6’이 완전수 ‘7’의 종결 후 들여올 새로운 세계를 저지하거나 오염시키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두발가인의 아버지도 라멕이지만, 두발가인이 죽인 노아의 아버지도 라멕이라는 사실은 정경적 족보가 말하는 구조다.



(6) 두발가인이 방주에


나는 과거 홍수 이후에도 등장하는 겐 족속(Kenites)을 발견하고는 이들에 관해 추적한 일이 있다. 민수기 24:21; 삼상 15;6; 27:10; 30:29; 대상 2:55에 등장하는 이들 Kenites란 다 가인(Cain)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노아 8식구를 제외하고 호흡 있는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가인의 후예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노아의 홍수는 국지적인 홍수였단 말인가? 세상 전체를 덮었다면 가인의 후예가 대체 어떻게 홍수를 건너올 수 있었단 말인가?


이 영화에서 정의(Justice) 다음으로 공을 들이고 있는 ‘죄악의 전이와 경로’ 플롯에 그 해답이 담겨있다. 그 죄의 씨앗는 어떻게 홍수를 넘어왔을까? 바로 방주를 타고 넘어왔던 것이다.


밀항한 두발가인?

아니다.


바로 가나안의 아비 함의 심장을 타고 홍수를 건너온 것이다.

이는 노아가 인간이라는 종족을 세상에서 사멸시키려던 의도와 부합한다.



두발가인의 밀항은 함과의 ‘접촉’의 상징인 셈이다. 함을 통상 가나안의 아비라고 부른다. 가나안의 음가는 ‘케난’이다. 겐 족속과 가나안 족속의 영어 음가는 각각 Kenites와 Canaanite, 다 같은 것이다. 이것이 홍수를 타고 넘어온 죄의 절대 경로인 것이다.



(7) 종말: 노아가 찾아낸 은혜


홍수를 중심에 놓고 벌이는 노아의 신 인식 구조는 이 영화 플롯들 가운데 가장 탄탄하고 안전한 구조다.


특히 당대에 완전하다던 노인네가 난데없이 술에 취해 하체를 드러내고 누워있는 성서에서의 모습은 이 영화를 통해 잘 해명된다. 그 인식의 벽에 부딪친 일탈이었던 것이다. 모든 가족이 살아남은 해피앤딩에 왜 일탈이 찾아들었나.


그것은 홍수의 종결에서 오는 나태와 방탕함이 아니라 하나님 인식의 실패에서 오는, 일종의 바울의 눈에 씐 비늘과도 같은 것이다. 즉, 의(義)의 실패에서 오는 좌절. 모조리 다 죽였어야 했는데. 나는 내 가족만 살렸노라-.


하지만 그는 이 인식의 벽을 지나 비로소 하나님의 ‘눈들’ 속에서 ‘은혜’를 찾아낸다(창 6:8). 과연 이것이 인본주의라면 그 신본주의자들이 믿는 믿음은 대체 어떤 것일까.



(8) 끝으로 팔뚝에 뱀 껍질


이 영화에서는 뱀이 심상찮게 등장한다. 에덴의 원죄 회고도 회고지만, 방주로 몰려드는 수많은 뱀들이 문제다. 일루미나티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들은 이를 두고 그 일루미나티 상징이라고 하는데 여기서의 ‘많은 뱀’은 노아 부부의 대화에 나타났듯 땅으로 기어다니는 종족으로서 ‘많은 뱀’인 것이지 결코 ‘뱀 사랑’이 아닌 것이다. 일종의 파충류 종들도 구원했다-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축복 기도하는 팔목에 찬 뱀 껍질... 사실 기독교인들을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돌아서게 만든 부분. 이에 관하여는 내가 존경하는 고(故) 이윤기 번역가의 글 하나를 내 설명 대신 올릴까 한다. 길지만 그대로 옮기겠다.


“한 독실한 크리스천 의사 친구의 결혼 축하연에서의 일이었다. 한 군의관 친구도 참석한 자리였다. 축하 예배를 이끌던 목사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설교거리를 찾아내었다고 생각했던지, 그 군의관의 군복 깃에 달린 지팡이를 감고 오르는 뱀의 형상이 수놓인 기장을 가리키면서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 이 군의관의 기장을 보세요. 지팡이와 뱀을 보세요. <구약성경>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와 아론의 지팡이랍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지요? 애굽 왕이 너희에게 이적을 보일 것을 요구하거든 그 앞에다 지팡이를 던져라. 그러면 내가 그 지팡이로 하여금 뱀이 되게 하리라. ’십계‘라는 영화에서도 보셨지요? 모세와 아론이 이 지팡이를 던지자 지팡이는 애굽 왕 앞에서 정말 뱀으로 변하지 않던 가요? 애굽 마술사들이 마술로 만들어낸 뱀을 모조리 잡아먹지 않던가요? 군의관의 기장에 있는 지팡이와 뱀은 바로 이 지팡이와 뱀인 것입니다..’

나는 속으로 아닌데, 그것은 아닌데...싶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목사는 설교를 계속했다.

‘...<구약성경> 민수기를 보세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지요? 불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고 뱀에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 모세가 어떻게 하던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구리로 뱀을 만들어 매달아 놓으니 뱀에 물렸어도 그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어요. 군의관의 기장에 있는 기둥과 뱀은 바로 이 기둥과 구리뱀이랍니다. 사악한 시대가 뱀에 물려 고통을 받거든 여러분도 기둥에다 구리뱀을 매달아놓으세요...그러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끝내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상징해석을 그렇게 마구잡이로 하면 안된다’는 투로 한마디를 건넸다가 독실한 기독교인들이자 용한 의사들인 친구들로부터 성경의 말씀을 잡학으로 해석한 독신자로 몰려 말 몽둥이에 오지게 조리돌림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억압된 본능의 충동에 눈을 돌린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다른 것을 도외시함으로써, 말하자면 억압된 본능에만 현미경을 들이대는 바람에 인간에게 상처를 입히고 만 것같다는 느낌을 나는 뿌리치지 못한다.

그 목사가 현미경으로 성경을 들여다보듯 하는 태도에서도 나는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현미경으로 보아야 할 것이 따로 있고 망원경으로 보아야 할 것이 따로 있다. 현미경으로 보아야 할 것을 망원경으로 보아서도 안 되겠지만, 그날 그 목사의 말을 듣자니 망원경으로 보아야 할 것을 현미경으로 본다는 느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 친구 의사들이 뱀의 상징적 의미에 무지하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상징 해석의 전문가여야 할 사제인 목사가 신화가 지니는 보편적인 의미에 무지한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일이다. 사제의 직분이 무엇이던가? 세멜레가 제우스의 본 모습을 보고는 그 광명의 열기에 타죽고 말았다는 신화가 암시하듯이, 인간은 맨눈으로는 절대자의 광명을 볼 수 없다. 절대자와 인간 사이에는 상징이 있다. 사제가 서야 할 자리는 바로 이 상징의 자리인 것이다.

신화 시대 그리스의 의신 아폴론에게는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아들이 있었다. 아폴론은 이 아들을 당시의 용한 의사이자 현인이었던 케이론에게 맡겨 의술을 가르치게 했다. 아스크레미오스는 케이론의 가르침을 받아 대단한 의사가 되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트라카라는 도시에다 요즈음의 의과대학 겸 부속병원 비슷한 걸 세우고 의술을 가르치는 한편 환자를 보았는데, 어찌나 용했던지 ‘아스클레피오스는 죽은 사람도 능히 살려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한다....... 이 아스클레피오스의 의과대학은 수많은 명의를 배출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이름 높은 명의가 바로 오늘날 의성으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이다. 의과대학과 그 부속병원과 아스클레피오스의 사당을 두루 겸하는 곳에다 제관들은 흙빛 뱀을 기른 것으로 전해진다. 제관들이 이 흙빛 무독사를 아스클레피오스의 사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팡이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 뱀은 바로 아스클레피오스의 사자인 흙빛 무독사인 것이다. 의술을 상징하는 엠블렘에 지팡이와 뱀이 그려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뱀은 결국 무엇을 상징하는가?

조금 더 전문적으로 말해도 좋다면 그리스 신화는 뱀을 일단 죽음의 상징으로 기록한다. 의신 아폴론은 어린 나이에 죽음을 상징하는 거대한 뱀 퓌톤을 죽인다. 바로 이 때문에 아폴론은 <퓌티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퓌톤을 죽인자> 즉, <죽음의 정복자>라는 뜻이다. 영웅 헤라클레스는 생후 아흐레 만에 두 마리의 뱀을 죽이고 장성한 뒤에는 머리가 아홉 개나 되는 거대한 물뱀 휘드라를 죽임으로써 인간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구해낸다. 헤라클레스 역시 <헤라클레스 칼리니코스> 즉, <죽음으로부터의 빛나는 승리자 헤라클레스>라고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파충류 시대에 인간의 유전자에 찍혀버린 파충류에 대한 공포 때문일까? 그리스 신화는 죽음의 상징으로 무수한 뱀을 등장시킨다.

그리스 신화는 뱀을 재생의 상징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홀뤼이도스라는 사람은 죄를 지어 석실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가 어느날 우연히 수뱀이 몸에 약초를 문질러 죽은 암뱀을 소생시키는 것을 본다. 다음날 석실에는 그 나라 왕자가 뱀에 물려죽었다는 소문과 왕자를 살려내는 사람에게는 큰 상을 내린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폴뤼이도스는 뱀이 남긴 약초를 거두어 왕자를 살리고 자신도 석실에서 살아나온다.

<구약성경> 요나가 그랬듯이, 그리스의 영웅 이아손도 거대한 뱀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새 생명을 얻어 나오고, 헤라클레스도 거대한 뱀이 삼키는 바람에 그 뱃 속에 들어가 있다가 사흘 만에 그 뱀의 배를 가르고 나온다. 뱀이 허물을 벗는 것을 목격하는 데서 시작된 것일까? 그리스 신화는 재생의 상징으로 무수한 뱀을 등장시킨다.

그리스신화는 뱀을 이승과 저승을 번차례로 오르내리는 상징으로 기록한다.

...십자가를 타고 오르던 뱀이 무엇을 상징하던가? <생명의 나무>를 타고 오르는 예수의 원형이 아니던가? 초대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예수를 <선한 뱀>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의사들 앞에서 목사가 한 말은 경솔했다. 병통에 사로잡힌 그의 대롱 시각견은 사악하기까지 했다. 그 병통의 대중요법에는 상징사전의 <뱀/serpent> 항목 하나만으로도 탁효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상징을 향하여 마음을 여는 일이다. 상징을 향하여 마음을 열어야 보편적인 우주를 향한 마음도 비로소 열릴 것이므로...“(J. C. Cooper의 All Illustrated Encyclopaedia of Traditional Symbols의 번역 후기 중에서) 



에필로그.


이 영화의 하나님은 시종일관 ‘창조주’다.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 ‘야웨’... 전통적 이름은 - 특히 오경의 전통적 하나님 이름은 - 불리지 않는다. 이 이름을 통해 그 모든 신앙 요소의 프로토(proto) 타입을 유지한다. 믿음도 프로토, 하나님도 프로토, 구속사도 프로토이다. 그렇기에 성서는 이 구간을 proto-history 즉, 원역사(primeval history)라고 규정하지 않던가. 이제 이 프로토 타입의 세계를 아브라함이 끝내고 새로운 진정한 구속사 세계를 여는 것이다. 노아가 하늘과 땅이 섞여버린 그 프로토 세계를 끝냈듯이.


영화중에 두발가인이 하늘을 보면서 이런 기도를 올린다.


“나도 인간입니다. 당신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 근데 왜 나와는 대화를 안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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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에서2013. 10. 5.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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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란 걸 하게 되면 통상 녹취 자격 있는 사람이 받아적더라도 그 대화에 등장하는 각종 용어를 모를 경우가 있다.

그러면 그에 대해 잘 아는 관계자에게 초안을 건낸다. 맞는 단어인지 수정하라고.

(들리는 빠롤은 같아도 몬 말인지 모르니 랑그로 조율하는 셈이다.)

그런 다음 그 녹취 기록자에게 다시 돌려주면 수정한 빠롤이 자기(녹추자)가 들은 빠롤과 같은지 확인하고는 자기 면허 및 자격으로 인증을 해준다.

바로 요 과정을 대화/녹취의 초안이라고 부른다. 이런 수준의 초안을 DB에 넣고 관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초안 개념을 잘 모르는 것 같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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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에서2012. 10. 3.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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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심론[唯心論], 유물론[唯物論] 강의를 위한 두 번째 영화로 <트루먼 쇼>를 학생들에게 소개했다. 


기독교인들은 아마 이 강도 높은 반신론적 코드에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지만 그 코드를 되감아 도리어 신론에 종사시킬 수도 있다.


#1_ 트루먼은 우리처럼 반복적 일상을 살아간다. 앞집 부부를 만날 때 하는 인사도 같고, 가판대 신문/잡지를 살 때, 건널목을 지날 때, 항상 같은 사람, 같은 장면, 아무런 의심 없이 마주친다. 약간 의심스런 일들 몇 가지만 빼고는-.


#2_ 어느 날 맑은 하늘 위에서 별안간 무대 조명 하나가 뚝 떨어진다거나 - 거기엔 “시리우스(큰 개 자리 #9)”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다 - 하늘의 비가 고장 난 샤워기처럼 내 머리 위에만 쏟아지거나, 행인들 중 한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와 내게 달려든다거나.


#3_ 이 영화는 한 신생아를 방송국에서 입양하여 출생으로부터 전 생애에 이르는 과정을 생중계 하는 리얼TV 프로그램이다. 그 신생아는 물론 트루먼이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이미 시청자들이 시청해 왔으며, 트루먼 자신만 그 사실을 모른 채 세트장 스튜디오 세계에서 살아간다. 

#4_ 하늘에서 떨어졌던 조명등은 별자리 역할을 하던 9번 조명이었고, 비가 그에게만 퍼부었던 것은 비 내리는 기계가 잠시 고장 났던 것이며, 달려든 행인은 엑스트라로 참여했던 일반인이 트루먼을 보고 너무 좋은 나머지 달려든 것이었다.


#5_ 그렇게 전모가 서서히 드러난다. 엄마도 가짜고 대학시절 만나 지금까지 살아온 아내도 가짜이며 친구도 가짜다. 그들 모두 배우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막연한 의구심 속에서 트루먼은 짜인 프로그램을 삶으로 살아갈 뿐이다. 우리들 모두가 그런 것처럼.


#6_ 특히 바다와 배는 그의 강한 트라우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배를 타다 그만 아버지가 물에 빠져 죽었을 때 생긴 심리적 장애다. 이후 물에 잠긴 쪽배만 봐도 멀미가 난다. 아예 ‘바다’라는 생각을 거세시켜 바다엔 얼씬도 못하게 해버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화는 트라우마의 정체란 ‘만들어지는 것임’을 폭로한다. 


#7_ 하지만 아버지 역시 배우였다는 사실을 트루먼만 모른다. 


#8_ “바다”가 프로그램 된(programmed) 그의 트라우마라면 옛 여자 친구 실비아가 남기고 간 추억과 말들은 일탈을(unprogrammed) 가르치는 의심이다. (“모두 너에 대해 알고 있어. 모르는 척 할 뿐이지, 알겠어? 다들 널 알고 있어!”라는 힌트를 던져주고는 아버지[다른 배우]에게 붙잡혀가버린 그녀를 다신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믿음>은 트라우마요 <의심>은 트라우마를 벗어날 유일한 희망인 셈이다. 


#9_ 어느 날 라디오 채널에 잡힌 방송국 스텝들 간의 무전기 소리를 들으면서 그동안 우연인줄만 알았던 모든 사건들을 재구성해내고는 드디어 확신한다.

#10_ 여성 잡지 모델들의 눈․코․입 사진조각들을 오려붙여 옛 여자 친구 실비아의 얼굴 꼴라쥬에 성공해낸 것처럼 이제는 모든 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이 이 세상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11_ 트라우마 엄습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일한 탈출구 바다로 향한다. 


#12_ 비상이 걸린 방송국은 더 이상 은밀하지 않게, 노골적으로 그 위용을 드러낸다. 아직 새벽 시간인데도 해를 중천에 띄우고, 바다의 달은 이미 그를 찾아 움직이는 서치라이트로 변해있다. 그를 찾아낸 프로그램 PD는 풍랑을 내보내고 그 수위를 점점 높여 생명을 위협한다. 

 

#13_ 이런 사태가 그대로 생방송 되고 있는 가운데 시청자들은 트루먼을 응원한다. 그가 극복하고 떠나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14_ 이러한 교감은 어느새 최종 관객인 우리를 향해서도 자기 스스로를 묶어두고 있던 일상의 정체가 무엇인지 직시할 것을 촉구한다. 억압하던 일상은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으며 억압하는 인맥은 정략적 배우에 불과하다며 선동한다. 무엇이 진정한 가치인지 부추기는 것이다.


#15_ 목숨을 위협해도 굴하지 않자 PD는 풍랑을 멈추고 직접 마이크를 붙잡는다. 그 사이 트루먼의 배는 고요해진 바다를 떠가다가 ‘쿵-’ 소리와 함께 뭔가에 부딪친다. 지평선, 아니 벽에 그려진 지평선 그림에 부딪친 것이다. 그 때, 구름이 반쯤 가린 창공의 태양 속에서 그동안 숨어있던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16_ “트루먼.., 얘기 하게. 다 들리니까.” “누구시죠?” “난 수백만 명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프로를 만들지.” “난 누구죠?” “자넨 스타야.” “전부 가짜였군요.” “자넨 진짜야.” “내 얘기 들어.” “이 세상에는 진실이 없지만... 내가 만든 이곳은 다르지.”


#17_ 이쯤에서 우리는 이 목소리는 더 이상 PD가 아닌 어떤 신(神) 존재의 목소리임을 알아차린다. “이 세상은 거짓말과 속임수뿐이지만 내가 만든 세상에선 두려워할게 없어” “난 누구보다 자넬 잘 알아.” 트루먼이 외친다. “헛소리 집어 치워요.” 신의 음성이 계속된다. “두렵지? 그래서 떠날 수 없지?” “괜찮네.” “다 이해해.” “난 자네 인생을 지켜봤어.” “자네가 태어나는 것도, 첫걸음마를 떼는 것도.” 


#18_ 이제야 우리 최종 관객들은 트루먼을 부추기는 저 목소리가 단지 자아회복이라는 권고를 넘어선, 아예 그 주신(主神)을 극복하라는 지령에까지 닿아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트루먼은 더 이상 트루먼이 아니라 신을 배격하라는 지령을 받는 그 모든 자들의 군상이다.


#19_ 트루먼의 출생도 생방송했으니 사망도 생방송 할 권리까지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과 탐욕에 찬 PD는 우리에게 과중한 프로그램을 강요했던 신일뿐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20_ 우리는 여기에서 그 선동의 목소리 이면에서 진정한 목소리 하나를 더 추출해낼 수 있다. 이 신은 도대체 어떤 신인가-? 라는 반문이다.


#21_ “두렵지? 그래서 떠날 수 없지?”라고 묻는 신. 스튜디오에 가두어 놓고서는 자유라고 가르치는 신. 트라우마를 심어 놓고선 그것으로 협박하는 신. 또한 만들어진 트라우마를 <믿음>이라고 가르치는 신. 그 신은 과연 누구인가?


#22_ 우리가 믿어온 신을 한낱 오만과 탐욕에 젖은 프로듀서 정도로 교훈하려고 시도하는 지령을 배격하고, 실상 우리가 믿어온 신은 도리어 저 그림으로 된 지평선 장벽 바깥 세상에 있음을 이 영화에 은폐된 파라독스가 기도(企圖)한다.


#23_ 우리는 프로그램 된 트라우마를 <믿음>으로 가르치고, 프로그램 밖 진정한 믿음을 도리어 <의심>이라고 찍어 누르지는 않는지. 


#24_ 진정한 믿음이 스튜디오 바깥인지 안인지, 그리고 어떤 신이 참된 신인지,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신의 얼굴에 대한 개개인의 꼴라쥬 능력에 달려있다 할 것이다. 


#25_ 스튜디오 바깥에서 생방송에 갇힌 트루먼을 보면서 실비아가 기도하는 장면이 하나 나온다. “(트루먼을) 도와주세요-” 굳이 지목하자면 그가 바로 스튜디오 바깥에 계시는 신이다.


#26_ 트루먼은 언제나 그가 일상 속에서 인사했던 방법대로 그동안 자신을 길러준 프로듀서에게 작별을 고한다. “못 뵐지 모르니깐 한번에 인사드리죠. Good afternoon, Good evening, Good night!”


(* 이 영화는 스튜디오 밖과 안을 어떤 구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유심론[唯心論] 혹은 유물론[唯物論]과 연결 지어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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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에서2012. 9. 27.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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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과 유심론(唯心論)을 강의하기 위해 영화 밀양(密陽)을 학생들에게 소개했다. 

이 영화의 중심축이 용서에 관한 피상적 이해와 비판인 것은 맞지만, 그 피상성(superficiality)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와 달리 가해자 보다 피해자인 신애(전도연)에게 더 노출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1_ 그녀는 극한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후 용서를 실천한다. 하나님을 만났다고는 하지만 자식 잃은 사람으로서 그리 할 수가 없는 것인데도 그녀는 아들 죽인 살인자를 찾아간다. 용서하러.


#2_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해주러 왔어요.” “나도 전에는 몰랐어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도 안믿었어요.” “안보이니까 안믿었죠.” “우리 준이 때문에 하나님 사랑을 알고 새 생명을 얻었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하나님 사랑을 전하러 왔어요.”


#3_ 그녀가 쏟아내는 이런 꽃말들은 일종의 ‘준비되고 학습된’ 대사이다. 게다가 자기 아들 살인자에게 그 꽃말들과 함께 전하기 위해 들꽃까지 꺾어 온 것을 볼 때 그녀는 반드시 둘 중에 하나다. 정말로 그녀가 하나님을 만나 극락에 출입하고 있거나 아니면 거짓말 하고 있거나.


#4_ 그녀가 감행하는 용서의 목적은 자신의 새로운 삶을 위한 것이다. 그 비현실적인 용서의 언어들과 거기에 보태어진 들꽃이 그녀가 지닌 철저한 자기애를 반영한다. 그 자기애적 이상이 그 대사들을 창조하고 학습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한마디로 나르시시스트다.


#5_ 그녀의 자기애적 새 삶에 대한 몽환은 그것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영화 전반부에서 포착된다.


#6_ “왜 밀양에 왔는가”라는 물음에, 남편이 당한 불의의 사고를 설명하고는 “죽은 남편의 꿈이었던 밀양으로의 귀향을 통해 새 삶을 일구러 왔노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일찍부터 그 피상성을 눈치 챘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그런 이상을 제공할만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외도와 불륜으로 도리어 그녀의 이상을 파괴한 인물이었다. 


#7_ 이것이 그녀가 지니고 있는 꿈의 실체인 동시에 그가 구현해내고자 했던 용서의 피상성이다.


#8_ 영화의 초반부에 밀양 토박이(송강호)에게 “밀양”의 뜻 말(은밀한 볕)을 일러주면서 “멋있지 않나요-” 하며 나른한 느낌을 만끽하는 표정은 그야말로 나르시시즘을 전조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9_ 그러므로 이후 그녀의 반신론적 실천들은 살인자의 뻔뻔스런 속죄와 구원에 대한 응답이라기보다는 그녀가 구축하려던 이상적 새 삶의 초석이 되고 있는 그 나르시시스틱한 용서를 선점 당해 빼앗긴데 대한 분노와 보복인 셈이다.


#10_ 그러므로 그동안 기독교 안팎에서 비판하고 자성했던 그 살인자가 지녔던 용서받은 자로서 초연한 자태는 무엇이라 딱히 규정하기는 사실 어렵다. 불안정한 그녀의 눈에 비쳐진 기독교 일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만, 나르시시스트였던 그녀가 그리스도교로 귀의하려다가 아예 <유물론>과 교섭을 이루어 급선회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살인자가 보여준 확신에 찬 용서는 차라리 <유심론>에 가깝다 하겠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갇힌 육체를 통해서 상상하기 가장 쉬운 천국은 육체를 완벽하게 배제한 유심론적 구원 밖에 달리 없지 않았겠는가.


#11_ 한편 그 모든 물질적 실체를 부인하는 이 유심론적 용서에 맞서기 위해 내밀 수 있는 카드란 역시 유물론적 용서 밖에 달리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유물론에 종사하는 한 맥락이다. 그래서 유독 이 영화의 여주인공 신애는 구토를 많이 한다. 정신이 아닌 물질이라는 것이다.


#12_ 그녀는 마지막을 거울로 마치려 한다. 미용실에서 그 살인자의 딸에게 머리칼을 맡겼다가 이내 거부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자기 혼자만의 거울 앞에 다시 앉는다. 그리고는 자기 스스로 머리칼을 자른다. 나르시시스트들의 종착지인 것이다. 


#13_ 이 영화의 감독이 칸에 가서 “우리가 살아야 할 의미는 하늘이 아니라 두발을 딛고 서 있는 땅에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고 인터뷰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빛을 담은) 창공의 하늘로 시작해서 (빛을 담은) 땅바닥의 더러운 개숫물로 마치는 구도에 그토록 많은 해석들이 있었던 것같다.


#14_ 그의 말대로 하늘이 아닌 땅에 역점을 두고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영화 자신이 지니고 있는 해석학적 기도는 시종일관 나르시시즘에 더 종사한다. 주인공을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고통의 궁지에 몰린 절대 약자로 산출해내는 것도 나르시시스트의 전통적 자기애 형식이다. 하나님의 장로를 유혹하여 배 위에 올려놓고는 그 하늘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보고 있느냐”며 나직이 그렇지만 비장하게 쏘아붙이는 프레임은 영락없는 <To Die for> 니콜 키드먼의 나르시시즘이다. 


#15_ 나르시시트를 주인공으로 상정하는 바람에 이 영화가 꾀하려 했던 종교적 경계가 무너지고 만 것이다. 세상엔 실제로 기독교와 반기독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윗물(창공)과 아랫물(개숫물), 그리고 그 사이에 빛들, 또 그리고 여러 가지 나르시시스트들이 있을 따름이다.


#16_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신이 없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단지 거울을 가지고서 조절을 할 뿐. 


#17_ 그렇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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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에서2012. 9. 24.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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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사람만 가능하다. 나를 일종의 타자로 볼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는 이 능력을 통해 나 자신을 어디론가 던질 수 있는 것이다. 과거 혹은 미래로.


여기서 말하는 과거와 미래의 구체적 실체는 죽음이다. 두려움도 여기서 발생한다. 죽음은 통증이 아닌데도 두려움인 것은 그것이 종료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강박을 타고 산출 되는 것을 우리는 ‘시간’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죽음을 망각하려고 현재에 몰입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그 죽음을 숭배함으로 현재를 회피한다. 이러한 도식 속에서 숭배의 대상을 그때그때 탈바꿈 시킬 수 있도록 그 산출된 시간이 그 일을 돕고 있다. 대개는 일차적으로 죽음을 시간으로 바꾼 다음, 그 시간으로부터 다시 나 자신을 치환해내는 방식의 기술이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신의 자아는 시간으로 협박을 하거나 시간으로 달래는 신이 아니라 그 시간의 허리를 끊은 존재자다(요 4:23; 5:25). 시작과 끝을 거머쥔 것이다. 과거와 미래에 대해 그가 구현하는 소급 원리이기도 하다.


이 원리에 입각하여 나는 과거의 나에게로 몸을 던져 그 자아와 함께 죽을 수도 있는 것이며, 그리고는 다시 미래의 나에게로 몸을 내던져 그 자아와 더불어 살아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는 무엇인가?”라는 사고가 갖는 유적(有的) 권능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어느 날 갑자기 나 자신이 벌거벗었음을 발견하는(창 3:10; c.f. 2:25) 인식 상태로 내던져지는 그 무적(無的)인 힘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포지티브 내지 내거티브인 셈이다. 


이렇게 하여 그 분 자신은 악의 어떤 대항(립)자로서 선이 아니라 그 모든 선과 악의 초월자 지위를 또한 구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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