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속에서2014. 3. 26.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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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2014)는 비 기독교인이 관람하기에는 상당한 성서 지식을 전제한 영화이고,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본문에 대한 고민과 체험이 없다면 이해가 어려울 정도로 성서에 집중한 수작이다. 특히, 평소에 노아를 사랑의 교회 장로님이나 순복음 교회 장로님 정도로 연상했던 기독교인에게는 꽤나 실망을 안겨줬을 법하다.


이 노아는 러셀 크로우가 그동안 배역 맡아온 글레디에이터의 ‘막시무스’, 장 발장의 ‘자베르’와 거의 같은 타입의 인물상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는 부리나케 다메섹을 지나고 있는 바울,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버린 아브라함에 더 가깝다.


영화 초반에 노아와의 격투에서 패한 무리 중 하나가 노아에게 벌벌 떨며 “늬늬...니가 원하는 게 (대체) 뮈냐?” 라고 물었을 때 노아가 하는 말,


“JUSTICE”


이것이 이 영화를 끌고나가는 주제이며, 그것은 다음 세 가지 틀 속에서 전개된다. 첫째 정의에 대한 노아의 오해와 이해, 둘째 죄악의 전이와 그 경로, 셋째 종말에 임하는 자세이다.


본 글은 이들 세 가지 틀 속에서 성서 내적 요소와 바깥 요소들을 오가며 작은 플롯들을 정리해나가는 식으로 적을 것이다. 본인의 교리적 입장이라기보다는 문학적, 특히 해석학적 분석임을 밝혀둔다.



(1) 노아의 의(righteousness) 이해


노아의 가정을 구원시킨 성경본문,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를 원문에서 직역해오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눈(들) 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다.”


이 본문에 담긴 노아의 능동적 태도는 그 계시와 싸인이 노아가 워낙에 완.벽.해.서.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라디오처럼 들려온 게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삶의 자리 속에서 어렵사리 인식해나간 것이라는 이 영화 구도를 뒷받침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읽은 성경과 다르게만 읽히는 이유는 동물구원이 인간구원에 종속되는 게 아니라, 인간구원을 도리어 동물구원에 종속시키는 노아의 이해 때문이다. (그나마 구원시킬까 말까를 고민한다.) 그러나 그것은 “노아가 동물 보호주의자냐!”라는 항의를 하기에 앞서, 그동안 우리 인간이 환경구원을 얼마나 자기네 구원사에 종속시켜 읽어왔는지 그 이기심과 인본주의를 드러내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2) 손녀들을 죽이려는 노아


심심한 선비나 신선 같은 노아가 아니라, 자기 손녀들을 죽이려는 광기의 노인으로 등장하는 노아는 우리에게 실로 충격적이지만 ‘인간은 다 사멸의 대상’으로 확정내린 노아의 입장에서 일차적 고뇌는 단연 자신의 가족이다. 자신의 가족을 구원의 대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마지막 심판의 도구로 볼 것인가.


이를 초반부터 확정 짓고 나간 것은 아니고, 방주 축조 과정에 인식해나간 요소 가운데 하나다. 처음에 그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자신을 포함 8식구를 동물과 함께 구원받을 한 종족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며느릿감 고르러 나갔다가 목격한 인간시장의 광포는 이내 자기 가족도 예외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임무수행을 끝으로 더 이상 종족확산 없이 사멸해갈 것으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큰 아들 셈의 짝 일라의 ‘불임’은 당초에는 승선 못할 사유였지만 - 생산능력이 없으므로 - 도리어 승선의 자격으로 변한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일라의 임신으로 빚어진 임무 상 차질은 노아를 광기로 몰아넣는다. 그것은 마치 이삭을 죽이려는 아브라함에 다름 아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산으로 갔다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사라가 죽었다는 랍비 문헌이 있다.



(3) 며느리 셋 중 둘은 태아

 

허리우드 작품에서 ‘성경적’ 작품을 요구한다는 자체가 무리지만 작가와 감독이 심어둔 해석학적 기도(企圖)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노아의 가족이 방주로 들어갈 때의 순서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부인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부인들-”(7:7)


다음은 나올 때 순서의 직역이다.


“너와 너의 부인, 그리고 너의 아들들 그리고 너의 아들들의 부인들-”(8:16)


들어갈 때는 남·여가 따로 남자끼리 여자끼리, 나올 때는 남·여가 한 쌍씩 나란히!

‘생명 보존’ 공간에서의 ‘생육 금지’라는 이 신학적 의도를 이보다 - 두 여성을 잉태한 며느리 - 더 잘 표현해낸 작품이 또 있을까?.



(4) 방주 축조를 타락 천사가 도왔다


따라서 ‘두 여성’을 잉태한 며느리 플롯과 마찬가지로 ‘타락천사’에 대해서도 교리적 입장을 가하기보다는 <네피림>에 관한 감독/작가군의 놀라운 이해와 상상력을 칭찬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네피림에 관한 거의 모든 성서 안팎 문헌을 섭렵한 듯하다.


빛의 운반자였으나 타락한 천사로 사실상 루시퍼처럼 보이기에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눈살 찌푸릴 만한 플롯이지만 인간을 도운 그들은 마치 프로메테우스인 것만 같다.

 

에녹서 상의 명칭인 감시자(watcher)로 명명되는 이들은 인간처럼 진흙에 버무려져 사람처럼 땅에서 살아간다. 단, 사람이 아닌 괴물 혹은 기간테스로-.

이들은 천사인가? 사람인가? 괴물인가?




올림푸스 신들이 등장하기 이전 소위 ‘황금시대’를 지배했던 티탄족, 그리고 홍수(새 시대) 이전의 시대를 호령하던 이들이 과연 타락천사인지 괴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땅에서 힘으로 군림했던 어떤 종족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홍수 이후에도 최후의 르바임 족속으로 - 키 4.5m(신 3:11) - 혹은 가드 지역 용병들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거인은 골리앗 하나만이 아니었던 셈이다.


게다가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다윗이 통일왕국 설립 직전 부하들과 소탕한 ‘기간테스’에 대한 묘사를 보면 그들의 손가락 발가락이 각각 여섯씩이나 된다는 사실이다(cf. 삼하 21:18-22). 이 영화의 거인들은 팔이 여섯 개다.


이들이 블레셋 편에 서서 용병으로 이스라엘/다윗을 대적했다면, 반대로 노아 편에 선 용병도 될 수 있는 것이다.



(5) 두발가인과 므두셀라


두발가인과 므두셀라의 등장도 사람들을 심란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역시 의미 있는 구조를 구축하는 심볼이다.



땅에 번진 죄악의 궁극적 기점을 가인의 때로 지목하고 있는 이 영화가 두발가인을 등장시킨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두발가인은 가인의 6대손이다. 반면 므두셀라는 셋의 7대손이다. 7대손은 마지막 끝을 고하는 세대지만 6대손인 두발가인은 미완(악)의 세대이며 도구로 파괴를 일삼는다. 셋의 8대손 라멕도 그가 죽인 것으로 나온다. 불완전 수 ‘6’이 완전수 ‘7’의 종결 후 들여올 새로운 세계를 저지하거나 오염시키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두발가인의 아버지도 라멕이지만, 두발가인이 죽인 노아의 아버지도 라멕이라는 사실은 정경적 족보가 말하는 구조다.



(6) 두발가인이 방주에


나는 과거 홍수 이후에도 등장하는 겐 족속(Kenites)을 발견하고는 이들에 관해 추적한 일이 있다. 민수기 24:21; 삼상 15;6; 27:10; 30:29; 대상 2:55에 등장하는 이들 Kenites란 다 가인(Cain)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노아 8식구를 제외하고 호흡 있는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가인의 후예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노아의 홍수는 국지적인 홍수였단 말인가? 세상 전체를 덮었다면 가인의 후예가 대체 어떻게 홍수를 건너올 수 있었단 말인가?


이 영화에서 정의(Justice) 다음으로 공을 들이고 있는 ‘죄악의 전이와 경로’ 플롯에 그 해답이 담겨있다. 그 죄의 씨앗는 어떻게 홍수를 넘어왔을까? 바로 방주를 타고 넘어왔던 것이다.


밀항한 두발가인?

아니다.


바로 가나안의 아비 함의 심장을 타고 홍수를 건너온 것이다.

이는 노아가 인간이라는 종족을 세상에서 사멸시키려던 의도와 부합한다.



두발가인의 밀항은 함과의 ‘접촉’의 상징인 셈이다. 함을 통상 가나안의 아비라고 부른다. 가나안의 음가는 ‘케난’이다. 겐 족속과 가나안 족속의 영어 음가는 각각 Kenites와 Canaanite, 다 같은 것이다. 이것이 홍수를 타고 넘어온 죄의 절대 경로인 것이다.



(7) 종말: 노아가 찾아낸 은혜


홍수를 중심에 놓고 벌이는 노아의 신 인식 구조는 이 영화 플롯들 가운데 가장 탄탄하고 안전한 구조다.


특히 당대에 완전하다던 노인네가 난데없이 술에 취해 하체를 드러내고 누워있는 성서에서의 모습은 이 영화를 통해 잘 해명된다. 그 인식의 벽에 부딪친 일탈이었던 것이다. 모든 가족이 살아남은 해피앤딩에 왜 일탈이 찾아들었나.


그것은 홍수의 종결에서 오는 나태와 방탕함이 아니라 하나님 인식의 실패에서 오는, 일종의 바울의 눈에 씐 비늘과도 같은 것이다. 즉, 의(義)의 실패에서 오는 좌절. 모조리 다 죽였어야 했는데. 나는 내 가족만 살렸노라-.


하지만 그는 이 인식의 벽을 지나 비로소 하나님의 ‘눈들’ 속에서 ‘은혜’를 찾아낸다(창 6:8). 과연 이것이 인본주의라면 그 신본주의자들이 믿는 믿음은 대체 어떤 것일까.



(8) 끝으로 팔뚝에 뱀 껍질


이 영화에서는 뱀이 심상찮게 등장한다. 에덴의 원죄 회고도 회고지만, 방주로 몰려드는 수많은 뱀들이 문제다. 일루미나티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들은 이를 두고 그 일루미나티 상징이라고 하는데 여기서의 ‘많은 뱀’은 노아 부부의 대화에 나타났듯 땅으로 기어다니는 종족으로서 ‘많은 뱀’인 것이지 결코 ‘뱀 사랑’이 아닌 것이다. 일종의 파충류 종들도 구원했다-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축복 기도하는 팔목에 찬 뱀 껍질... 사실 기독교인들을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돌아서게 만든 부분. 이에 관하여는 내가 존경하는 고(故) 이윤기 번역가의 글 하나를 내 설명 대신 올릴까 한다. 길지만 그대로 옮기겠다.


“한 독실한 크리스천 의사 친구의 결혼 축하연에서의 일이었다. 한 군의관 친구도 참석한 자리였다. 축하 예배를 이끌던 목사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설교거리를 찾아내었다고 생각했던지, 그 군의관의 군복 깃에 달린 지팡이를 감고 오르는 뱀의 형상이 수놓인 기장을 가리키면서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 이 군의관의 기장을 보세요. 지팡이와 뱀을 보세요. <구약성경>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와 아론의 지팡이랍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지요? 애굽 왕이 너희에게 이적을 보일 것을 요구하거든 그 앞에다 지팡이를 던져라. 그러면 내가 그 지팡이로 하여금 뱀이 되게 하리라. ’십계‘라는 영화에서도 보셨지요? 모세와 아론이 이 지팡이를 던지자 지팡이는 애굽 왕 앞에서 정말 뱀으로 변하지 않던 가요? 애굽 마술사들이 마술로 만들어낸 뱀을 모조리 잡아먹지 않던가요? 군의관의 기장에 있는 지팡이와 뱀은 바로 이 지팡이와 뱀인 것입니다..’

나는 속으로 아닌데, 그것은 아닌데...싶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목사는 설교를 계속했다.

‘...<구약성경> 민수기를 보세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지요? 불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고 뱀에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 모세가 어떻게 하던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구리로 뱀을 만들어 매달아 놓으니 뱀에 물렸어도 그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어요. 군의관의 기장에 있는 기둥과 뱀은 바로 이 기둥과 구리뱀이랍니다. 사악한 시대가 뱀에 물려 고통을 받거든 여러분도 기둥에다 구리뱀을 매달아놓으세요...그러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끝내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상징해석을 그렇게 마구잡이로 하면 안된다’는 투로 한마디를 건넸다가 독실한 기독교인들이자 용한 의사들인 친구들로부터 성경의 말씀을 잡학으로 해석한 독신자로 몰려 말 몽둥이에 오지게 조리돌림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억압된 본능의 충동에 눈을 돌린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다른 것을 도외시함으로써, 말하자면 억압된 본능에만 현미경을 들이대는 바람에 인간에게 상처를 입히고 만 것같다는 느낌을 나는 뿌리치지 못한다.

그 목사가 현미경으로 성경을 들여다보듯 하는 태도에서도 나는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현미경으로 보아야 할 것이 따로 있고 망원경으로 보아야 할 것이 따로 있다. 현미경으로 보아야 할 것을 망원경으로 보아서도 안 되겠지만, 그날 그 목사의 말을 듣자니 망원경으로 보아야 할 것을 현미경으로 본다는 느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 친구 의사들이 뱀의 상징적 의미에 무지하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상징 해석의 전문가여야 할 사제인 목사가 신화가 지니는 보편적인 의미에 무지한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일이다. 사제의 직분이 무엇이던가? 세멜레가 제우스의 본 모습을 보고는 그 광명의 열기에 타죽고 말았다는 신화가 암시하듯이, 인간은 맨눈으로는 절대자의 광명을 볼 수 없다. 절대자와 인간 사이에는 상징이 있다. 사제가 서야 할 자리는 바로 이 상징의 자리인 것이다.

신화 시대 그리스의 의신 아폴론에게는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아들이 있었다. 아폴론은 이 아들을 당시의 용한 의사이자 현인이었던 케이론에게 맡겨 의술을 가르치게 했다. 아스크레미오스는 케이론의 가르침을 받아 대단한 의사가 되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트라카라는 도시에다 요즈음의 의과대학 겸 부속병원 비슷한 걸 세우고 의술을 가르치는 한편 환자를 보았는데, 어찌나 용했던지 ‘아스클레피오스는 죽은 사람도 능히 살려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한다....... 이 아스클레피오스의 의과대학은 수많은 명의를 배출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이름 높은 명의가 바로 오늘날 의성으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이다. 의과대학과 그 부속병원과 아스클레피오스의 사당을 두루 겸하는 곳에다 제관들은 흙빛 뱀을 기른 것으로 전해진다. 제관들이 이 흙빛 무독사를 아스클레피오스의 사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팡이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 뱀은 바로 아스클레피오스의 사자인 흙빛 무독사인 것이다. 의술을 상징하는 엠블렘에 지팡이와 뱀이 그려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뱀은 결국 무엇을 상징하는가?

조금 더 전문적으로 말해도 좋다면 그리스 신화는 뱀을 일단 죽음의 상징으로 기록한다. 의신 아폴론은 어린 나이에 죽음을 상징하는 거대한 뱀 퓌톤을 죽인다. 바로 이 때문에 아폴론은 <퓌티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퓌톤을 죽인자> 즉, <죽음의 정복자>라는 뜻이다. 영웅 헤라클레스는 생후 아흐레 만에 두 마리의 뱀을 죽이고 장성한 뒤에는 머리가 아홉 개나 되는 거대한 물뱀 휘드라를 죽임으로써 인간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구해낸다. 헤라클레스 역시 <헤라클레스 칼리니코스> 즉, <죽음으로부터의 빛나는 승리자 헤라클레스>라고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파충류 시대에 인간의 유전자에 찍혀버린 파충류에 대한 공포 때문일까? 그리스 신화는 죽음의 상징으로 무수한 뱀을 등장시킨다.

그리스 신화는 뱀을 재생의 상징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홀뤼이도스라는 사람은 죄를 지어 석실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가 어느날 우연히 수뱀이 몸에 약초를 문질러 죽은 암뱀을 소생시키는 것을 본다. 다음날 석실에는 그 나라 왕자가 뱀에 물려죽었다는 소문과 왕자를 살려내는 사람에게는 큰 상을 내린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폴뤼이도스는 뱀이 남긴 약초를 거두어 왕자를 살리고 자신도 석실에서 살아나온다.

<구약성경> 요나가 그랬듯이, 그리스의 영웅 이아손도 거대한 뱀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새 생명을 얻어 나오고, 헤라클레스도 거대한 뱀이 삼키는 바람에 그 뱃 속에 들어가 있다가 사흘 만에 그 뱀의 배를 가르고 나온다. 뱀이 허물을 벗는 것을 목격하는 데서 시작된 것일까? 그리스 신화는 재생의 상징으로 무수한 뱀을 등장시킨다.

그리스신화는 뱀을 이승과 저승을 번차례로 오르내리는 상징으로 기록한다.

...십자가를 타고 오르던 뱀이 무엇을 상징하던가? <생명의 나무>를 타고 오르는 예수의 원형이 아니던가? 초대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예수를 <선한 뱀>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의사들 앞에서 목사가 한 말은 경솔했다. 병통에 사로잡힌 그의 대롱 시각견은 사악하기까지 했다. 그 병통의 대중요법에는 상징사전의 <뱀/serpent> 항목 하나만으로도 탁효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상징을 향하여 마음을 여는 일이다. 상징을 향하여 마음을 열어야 보편적인 우주를 향한 마음도 비로소 열릴 것이므로...“(J. C. Cooper의 All Illustrated Encyclopaedia of Traditional Symbols의 번역 후기 중에서) 



에필로그.


이 영화의 하나님은 시종일관 ‘창조주’다.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 ‘야웨’... 전통적 이름은 - 특히 오경의 전통적 하나님 이름은 - 불리지 않는다. 이 이름을 통해 그 모든 신앙 요소의 프로토(proto) 타입을 유지한다. 믿음도 프로토, 하나님도 프로토, 구속사도 프로토이다. 그렇기에 성서는 이 구간을 proto-history 즉, 원역사(primeval history)라고 규정하지 않던가. 이제 이 프로토 타입의 세계를 아브라함이 끝내고 새로운 진정한 구속사 세계를 여는 것이다. 노아가 하늘과 땅이 섞여버린 그 프로토 세계를 끝냈듯이.


영화중에 두발가인이 하늘을 보면서 이런 기도를 올린다.


“나도 인간입니다. 당신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 근데 왜 나와는 대화를 안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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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