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속에서2012. 8. 7.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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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δοξα)라는 말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와서 <영광>이라는 말로서 그것이 단지 어떤 빛이라는 뉘앙스 견지에서만 즐겨 사용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 말은 본래 전혀 의미도 생소한, <의견>이라는 뜻으로부터 출발된다. 고대 희랍인들이 동물학을 논하면서 “동물들은 <의견>이 없다”라고 말할 때 이 단어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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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에게는 의견이 정말 없을까? 강아지나 고양이 앞에 생선과 개사료를 놔두면 무엇을 택할까? 당연히 생선을 택할 것이 아닌가? 그래도 의견이 없는 것인가? 여기서 말하는 <의견>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일종의 추론으로부터 나온 상상력을 말한다. 감각에 준거한 즉각적인 택일을 하는 식의 그런 선택으로서 의견이 아니라, 스스로 계산하거나 추론하고 상상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의견을 말한다.

그래서 고대의 희랍인들은 이 독사라는 어휘 속 사고능력을 생각할 때, 사고 그 자체, 그 사고 자신이 추론하고 상상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같다.

다시 말하면 “모든 동물들이 <의견>( δοξα)을 갖는 것은 아니다”라는 정의에 대한 그 근거를 피력할 때,

동물들은 추론으로부터 나온 상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반면 추론은 상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De Anima>

라고 해제를 내리고 있는 것은 그와 같은 독사(δοξα)의 구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반면에 추론은 상상을 필요로 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어떻게 “동물”과 “추론”이 댓구가 될 수 있는가? 전자는 생물이고 후자는 생물이 아닌데?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정신으로서 <독사> 그 자신이 그렇게 추론하고 상상을 하면서 <의견>을 개진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신체의 구속을 벗어나는 정신의 단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일종의 육체의 감각 추구와 합목된 그런 <의견>과는 완전하게 분리된 추론능력으로서 <의견>을 말하며 곧, 그 스스로 추론하고 상상하여 견해를 내리는 판단 양식으로서 <의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심판>의 양식인 셈이다.

즉 다시 말해서 <영광>에서 뉘앙스 짓는 그 빛은 어디에서 비롯된 빛의 기운인가 라고 그 출처를 따져볼 때에 그것은 전적으로 <심판>으로서 <의견>에서 도출되는 빛의 형식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 인기인이 받는 따위의 - 그런 빛의 형식과는 판이한 것이다. 이것이 독사의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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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 현대적 그리스도인은 <심판>을 전혀 두려워하지도 않지만 전혀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그 <영광>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 위선적 관념 속에 이 독사에 대한 오남용의 일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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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6. 4.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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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경남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약 800년 가까이 보전돼 온 세계문화유산입니다. 그것이 보관된 곳 바닥에는 숯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숯의 유익함을 선조들도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숯 효과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산화 방지와 환원 작용입니다. 사물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힘/복원력이 뛰어나 주위 사물을 활성화 하는 이 숯은 산성 물질이나 식품을 알칼리화 합니다. 또한 인체 체액이나 혈액을 알칼리화 시켜 신선하게 유지해 주고, 식용 숯을 먹으면 산을 중화/해독하여 장내 세균을 죽이고 유효균을 활성화 시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외 전자파차단 효과, 원적외선과 음이온 방출, 그리고 팔만대장경 주 보본기능인 습도 조절부터 곰팡이 방지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유용함을 생각하면 예나 지금이나 우리 생활 속 보물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무를 숯가마에 넣어 구워 검은 덩어리로 재가 되기 이전의 탄소덩어리를 우리는 숯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우리말로 신선하고 힘이 좋다는 뜻을 가지며 영어로는 Charcoal, 즉 China(중국)와 cool(좋다)의 합성어로서 중국에서 약으로 들여온 숯을 서구에서도 복용해보니 좋아져서 그런 단어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부정한 입을 향해 탄식하자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그 입술에 숯(불)을 가져다 대 정화시키는 대목이 나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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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숯불과 성령 

컴퓨터가 한 과업을 수행하려면 뭔가 입력할 장치가 필요합니다. 키보드, 마우스, 스캐너, 웹캠, 그래픽스 태블릿, 라이트펜 등이 그럴 때 쓰는 입력장치들 입니다. 그리고 그 과업을 결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반대로 출력장치가 꼭 필요합니다. 모니터, 스피커, 프린터, 기타 컨트롤러(로봇) 따위 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입력장치들이 있습니다. 시각․청각․미각․후각․촉각들로서 이들을 관장하는 기관들이 있고 그 가운데서도 눈과 귀와 입의 능력은 가장 탁월합니다. 눈․귀는 주로 입력을 담당하고 입은 출력을 겸합니다. 이들 셋은 특별히 마음(noun)에 직결로 달라붙어 있어 입출력 정보를 아주 빠른 속도로 운반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이 셋 중에서도 출력 장치 격인 ‘입’을 놓고 깊은 탄식 속에 회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비로운 사실은 입을 통해서만 나머지 두 기관의 통제까지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이런 순서에 의해 그렇습니다.

입이 곧 마음입니다(마 12:34; 약 3:2-6).

귀는 마음에 있는 내용을 출력할 수 없습니다. 눈도 그렇습니다. 오로지 입만 그 내용을 그대로 운반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없는 것은 입으로도 운반되지 않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입니다(마 12:34b). 입이라는 지체를 가리켜 큰 배를 움직이는 작은 키에 비유하는 야고보는 그 작은 것이 온 몸을 더럽히기도 하고 인생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기도 한다고 했습니다(약 3:2-6). 손과 발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지만 마음은 마음 그 자신이기 때문에 통제할 수 없는 것이며, 입을 제어하기 어렵다는 것은 그것이 곧 마음이기 때문이라는 반증입니다.

입에 있는 말을 고치면 마음이 고쳐집니다(사 6:7b).

이사야 선지자는 영광이 충만한 성전 앞에 서자 가장 먼저 입술의 부정함을 고백합니다. 입술이 부정한 것은 사실 이사야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영광을 본 자가 그 입술을 내놓은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성령께서는 그분의 말(Logos)을 통해서 그 마음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마음을 고치면 잘 들리고, 잘 보입니다(행 2:1-42).

마음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는 잘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마음이 단단하면 아예 들을 수도 볼 수도 없게 됩니다. 들리지도 않고 볼 수도 없게 되면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즉, 모든 입력 장치가 먹통이 된 상태인 것입니다. 마음을 고치면 잘 들리고 보이게 되며, 또 이해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에필로그 |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

입이라는 이 신비로운 지체는 이와 같이 망가진 마음의 내용을 운반하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귀와 눈을 고칠 수 있도록 그 마음을 향해 들어갈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통로를 집도(執刀)하시고 정화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그 숯불, 곧 성령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6월3일 성령강림 후 제1주
본문, 사 6: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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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 속에서2012. 5. 2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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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동안 원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환상에 젖어 있었다. 사람이 착하면 얼마나 착할 수 있으며, 악하면 얼마나 악할 수 있겠는가...라는. 도덕주의자나 이상주의자도 아닌 주제에 이런 이상을 품었던 자체가 확실히 사치였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그런 이상주의적인 명제를 마련했던 근거는 이러하다. 사실, 내가 무척이나 선한 것 같지만 필경 나는 누군가의 악인일 것이며, 이처럼 도저히 선해 뵈지 않는 저 사람도 반대 저편에서는 누군가의 선인일 것이므로 사람에 대한 선악의 절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였다.
우습거나 무섭지 아니한가. 내 눈엔 지금 날 선하게 봐주는 이들만 눈에 띄지만 저 곳에선 난 악인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나는 나의 악인에 대해 여러 번에 걸쳐 선의로 보고자 마음 고쳐먹은 적이 있다. 내가 바보스러워서인지는 몰라도 그것은 실로 외식이 아닌 진심어린 회심(回心)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러나 이내 그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 후에도 나는 몇 차례를 ‘이번만 더... 이번 한번만 더...’하는 심정으로 그 저주스러운 ‘회심’를 거듭 시도했다. 그러다 또 후회에 젖어들고... 또 후회하고... 그 후에도 그런 허망한 짓이 몇 차례 더 시도되었다. 나는 그 신(神)이 아니므로 ‘차라리 나지 말았어야 할...’이란 저주문만은 채용치 못한다. 그러나 정녕...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이란 정말 존재하는가보다. ‘진실은 통하게 마련이라’는 어리석은 이상에 사로잡힌 모든 생각을 이제 접으려고 한다. 당신은 당신을 축복하는 이들의 축복을 많이 받으라. 넉넉함을 택하며 당신과 함께 하느니... 빈궁함을 받아들이고 당신과 원수를 맺기를 택하겠노라.
내가 분개하는 것은 나의 진실을 진실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농단하려드는 그대의 그 사악한 협잡과 사술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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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이 지난 지금 그 때의 악인(惡人)들은 어느새 내 곁의 선인(善人)이 되어 있으며, 그 때 내곁의 선인(善人)들은 더러 악인이 되어있다. 그렇기에 심판이란 악인이나 선인으로서 임하는 게 아니라, 그 때에 뱉었던 말들에 대한 심판이라고 일러두지 않았던가.

2001년 12월 8일자 텍스트 앞에서
나의 자아를 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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