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2.05.24 나, 가인 아닌가? [리바이벌 III]
  2. 2012.05.04 섭생과 생식 능력
  3. 2012.04.14 부활의 다듬어짐
공상 속에서2012. 5. 24. 01:38

 

저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생(life), 사(death), 화(cursing), 복(blessing)을 놓으셨다고 한다(신30:19). 선/악이라는 이원론에서 볼 때 생명과 복이 한 종으로 묶어지고 사망과 화는 그 반대가 되는 한 종이지만 여기서는 반드시 <생명> 택할 것을 명하고 있어 우리를 혼돈스럽게 한다.
이 말에 의하면 우리 만사는 생/사/화/복 넷으로 분류되게 마련이다. 사노라면 이들 네 분화점을 분간할 겨를이 없지만, 그래서 우리는 망각하고 살지만, 그래도 한 순간도 쉼 없이, 이들 넷은 우리 둘레를 늘 회전한다. 가령, 주일(일요일)에 교회 안 나가면 당장 죽는가? 지옥 가는가? (그런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여기서 패쓰-) 그렇지는 않다. 다만, 그는 사망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 다음 주에 또, 교회에 안가면 당장 죽는가? 지옥 가는가? 역시 그렇지는 않다. 다만, 또다시 (혹은 전보다 좀 더 쉽게) 사망을 선택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매 순간마다 생/사/화/복에 놓인다. 설령 생명 아닌 다른 것들을 택했더라도 그 시제 그 단계에 맞는 생/사/화/복이 또 깔린다는 원리다. 그렇다면 우린 지금 생명을 택하지 않고 내일 택해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근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오늘 생명을 택하지 않고 내일 택하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사실 그것은 전보다 더 낮은 확률 속에 진입한 것이므로 생명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오기는 전보다도 훨씬 어렵다. 반대로 오늘 생명을 택하면 내일은 생명으로의 택일 확률이 훨씬 높아지는 이치다.
문제는 “생명을 택하라” 함으로써 <복>도 그들 <죽음>과 <저주>에 묶어 대별했다는 데에 있다. 과연 우리 가운데 삶 속에서 생명과 복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론적으로는 안다 해도 매 순간 속에서 명백하게 생명을 차고 오를 자 몇이나 될까? 난 사실 이 본문이 선과 악을 이원화 한 게 아니라 생명과 복을 이원화했다는 사실에 심한 충격과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이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복은 복일뿐이고 생명만이 생명”이라는 말 아니겠는가?
에서가 비록 장자권을 팔아먹었지만 곧 거지가 되었는가. 여전히 야곱의 형이 아니던가. 하갈과 이스마엘도 이적을 보았다. 그 이적이 영원한 생명이던가. 가인은 타인이 해치 못하게 하는 놀라운 표를 자기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 그렇다고 그 표가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이었던가. 아..., 내가 오늘도 내게 일어나는 수많은 하나님의 표적을 보면서도 두려움에 떠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혹시 내 일생이 이미 가인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닌가? 차라리 하나님과의 교신이 아예 두절되면 좋으련만 내가 어느 자리에 섰든지 간에 생/사/화/복이 또 놓이는 바람에 그 교신은 여전히... 도대체 내가 와있는 곳은 어디쯤 된단 말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내가 와있는 곳은 어디쯤 된단 말인가” 라고 말한 그 때는 내가 아버지를 잃은 지 1주년 되기 삼일 전이었고 지금은 그로부터 약 11년이 지났다.

나는 꼭 살아 있는 것만 같다. life.  


2001년 5월 5일자 텍스트 앞에서
나의 자아를 대하며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개별 복합 게시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Unported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Pentalogia
상상 속에서2012. 5. 4. 06:18
Aristotle은 생물들이 자신들과 비슷한 다른 존재를 만드는 섭생과 생식 능력을 영속적이며 신적인 것에 참여하는 가장 기본적인 능력으로 보았다(c.f De Anima 415a:25).

그러나 인간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비슷한 자기 존재들을 인공적으로 낙태시키는 방법을 구사함으로써 스스로 신적 능력을 거부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기술을 이용하여(공학 따위의) 자신들과 비슷한 다른 존재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신적 권능에 도전하고자 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생명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상상 속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분노에 관한 물리학자와 논리학자의 시각차  (0) 2012.05.04
불화(Strife)에 대한 인식  (0) 2012.05.04
시력의 형식  (0) 2012.05.04
잠의 원인  (1) 2012.05.04
영혼의 구조  (0) 2012.05.04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개별 복합 게시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Unported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Pentalogia
말씀 속에서2012. 4. 14. 01:49

 

저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프롤로그 | 늑대소녀

1920년 10월 인도에서 한 목사 부부가 아말라(2세)와 카말(8)이라는 두 여자 아이를 늑대 굴에서 구출하여 양육한 일이 있습니다. 발견될 당시 이 아이들은 모습만 사람이었지 행동은 완전히 늑대였다고 합니다. 두 부부의 헌신적인 노력 끝에 이들은 서서히 걷기를 배웠고, 울부짖는 소리 대신 말을 배웠고, 어둠을 싫어하고 빚을 찾게 되었으며, 날것이 아닌 익은 음식을 좋아하게 되었고, 사람들에게 정도 느껴 의지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아말라는 아이는 이미 1년 이내에 죽었고 카말라는 그로부터 9년 후에 죽게 됩니다. 두 손으로 그릇 잡는데 1년 반, 꼿꼿이 설 수 있는데 1년 반, 그리고 5-6세 수준의 언어가 죽기 전까지 9년 동안 배운 전부였습니다. 인간이 그 특유한 기능을 개발하지 못하고 다른 습성에 길들여지면 차라리 백지 상태에서 형성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시간도 훨씬 오래 걸린다는 보고로서 예이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은 결국 일종의 그들의 사인(死因)이 된 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프린서플 | 부활은 다듬어질 때 이룰 수 있는 것. 다듬어지지 않은 자들에게 부활이란?

오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고의 절기인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절이 오늘만 있는 건 아닙니다. 지난해도 있었고 내년에도 올 것이며 매해 그렇게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맞는 이 부활주일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유일한 날입니다. 그러므로 올해 부활절에 내가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이 부활절에 내가 술친구와 더불어 마시고 있다면 이 부활은 영원히 술친구와 함께 한 부활이며, 이 부활주일에 내가 온전한 성만찬의 의미에 응하고 있다면 이 부활은 그렇게 영원히 남습니다. 이러한 반복(mimesis)을 통해 우리의 부활은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첫째, 부활은 고통을 통해 다듬어집니다.

유아에서 아동으로, 아동에서 청소년으로, 청소년에서 청/장년이 되어가는 것은 결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과 학교를 오가면서 사회로 진입할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하게 되는데 “교육”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것은 한마디로 고통, 곧 통증입니다. 이 통증의 고충을 상당량 부모님들이 받아내 줍니다. 이 고통을 이해해 주시는 분들을 우리는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이 과정을 간과했을 때 삶에 들이닥치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는 이미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상적으로 사회에 진입한 사람들 중에 어릴 때의 고충을 통증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로 가는 고통입니다. 

둘째, 부활은 죽음을 통해 다듬어집니다.

부활의 전제는 죽음입니다. 죽음을 전제 하지 않으면 부활은 존재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사회에서 이해하는 살상(殺傷) 개념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생명으로서 죽음 입니다. 죽을 것만 같은 어머니들의 해산의 고통이 생명과 맞닿고 있는 이치입니다.

셋째, 부활은 생명을 통해 다듬어집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죽이고 싶다는 생각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은 모두 살상입니다. 부활이 고통과 죽음을 통해 다듬어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은 모두 살고 싶어 하지, 죽고 싶다는 속성은 아예 갖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간절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죽고 싶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이와 같이 살고 싶은, 생명력을 통해 우리 부활이 다듬어집니다.


에필로그 | 다듬어지지 않은 자들에게 부활은 전혀 행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과정이 일체 필요가 없는 분이신데 우리를 위해 몸소 보여주심으로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다듬어진 자들만이 부활과 그 너머에 있는 세계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자들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이 과정 없이는, 이 과정이 전혀 없는 그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의) 부활이란 뒤늦게 다듬기에도 아주 더디고, 그리고 그것은 도리어 그의 사인(死因)이 되고 말 것입니다. 늑대소녀들에게서처럼.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4월8일 부활주일
본문, 마 28:1-10 .


'말씀 속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희는 가지니  (0) 2012.05.07
버린 돌  (0) 2012.04.30
의인과 죄인의 상대성 원리  (0) 2012.04.24
무엇이 기쁜가, 무엇이 부끄러운가  (0) 2012.04.18
창조의 모범 예수  (0) 2012.04.16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개별 복합 게시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Unported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