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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7.30 믿음의 크기에 관하여
말씀 속에서2012. 7. 30.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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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공(空) 


공(空), “비었다”고 하는 이 글자의 뜻이 지닌 형식은 그 자체가 태생적으로 부정적 입니다. 강력한 부정을 구사합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존재론적이고도 가치론적인 그 모든 술어와 속성을 부정하는 말로서 일상에서는 덧없음의 형식으로도 나타납니다. 인도 철학은 이미 이 부정어를 통해 비로소 그 술어들과 속성이 자유롭게 되는 절대적 존재의 방식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들 말로 슌야(śūnya), 즉 부풀어 그 속은 텅 비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이 개념은 사실 사람이 실제로 입증할 수 없는 개념이었지만 인도 수학은 제로(0)라는 수의 이치를 발견함으로써 그것을 입증했습니다. 특히 그것은 부정을 통한 긍정 혹은 상대를 부정함으로 절대 직관을 의도하려는 일단의 ‘종교’로 설파되기도 했습니다. 이 <공>을 이(理)로 번역하는 학풍이 있는데 그것을 void(공허)가 아닌 absolute(절대)로도 번역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 일면으로까지 파급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교에서는 절대 악을 규정할 때 바로 이 <공> 즉, 모든 무적(無的)인 것을 - 모든 ‘없다’는 개념을 - 악으로 정의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없는 곳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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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빈 공간(空)에 관한 문제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습니다. 니체는 이 ‘비어있음’을 가능성이라고 가르침으로 적극적으로 허무를 향해 파고들었고, 프로이트는 그 ‘공’이라는 표현 대신에 ‘욕구’라는 말을 써서 마치 이 세계가 욕구라는 충동이 만들어 낸 공간인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이들은 자기 나름대로 그 공백과 실존 세계의 연관성을 밝혀내는데 종사한 면이 있지만 사람들의 불안감을 자극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공간을 통해 오직 믿음을 산출해야 합니다.

프린서플 | 믿음의 크기에 관하여

그러나 또한 그리스도인은 이 공간을 인위적으로 채워서는 안됩니다. 성서는 이 빈 공간의 용도를 그리스도의 사랑의 자리로만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공간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채우는 공간이지 자기 믿음을 채우는 공간이 아닌 것입니다. 특히 이 공간은 너비와 길이와 높이, 그리고 깊이로서 명확하게 존재하는 장소인 동시에 그 크기를 다음과 같이 잴 수 있습니다.

첫째, 믿음의 너비 입니다.

공간 구성을 할 때 너비라고 하는 요소는 “많다”도 “넓다”도 아닌 개념이지만 (믿음에 관한한) 차라리 후자에 가깝습니다. 너비는 넓음을 구성하는 요소이지 적어도 많음을 구성하는 요소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너비는 <결신>과도 같은 속성으로 제안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야웨의 궤에 관심하여 결국에는 성전을 짓겠다고 하는 다짐, 이것이 바로 너비에 해당하는 믿음의 형식이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결신도 없다면 그것은 공간의 가장 기본 단위인 너비가 확보되지 않은 것과도 같습니다.

둘째, 믿음의 길이입니다.

길이는 그 공간(입체)이 갖는 시작에서 끝에 이르는 ‘과정’으로서 단위에 해당합니다. 그렇기에 이 길이라는 단위는 너비와는 달리 시간 개념과도 연관을 맺는 것입니다. 시간 개념은 믿음의 속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위입니다. 시간적 요소가 - 오래 참음과 같은 - 결여된 믿음은 아예 그 기본 기능으로부터 실격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평생에 필적들이 있었습니다. 사울, 그리고 압살롬, 그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면서 결국에는 길이를 모두 채우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이입니다.

셋째, 믿음의 높이입니다.

사실 높이와 깊이는 같은 개념인데 본문에서는 이 둘을 분리하여 공간의 단위로 산입하고 있습니다. 높이가 깊이와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이성적으로는 같을 수 있겠지만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단적으로 그 차이를 가르는 예는, 한 마디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자는 그 높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위로는 자기 말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넷째, 믿음의 깊이입니다.

반면 깊이의 예는 이것입니다. 제 아무리 부모를 헤아리는 마음이 큰 자식도 부모가 자식을 헤아리는 만큼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섬기고 헤아린다고는 하지만 그 분이 우리를 헤아리는 것을 넘지는 못합니다. 이때에 깊이라는 단위를 씁니다. 또 다윗의 경우 비교적 여유로운 시절이 찾아왔을 때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는 그 후속 조치로 일련의 계략을 펼칩니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밧세바와 그 남편이 동침케 시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깊이>는 야웨의 궤를 전장 야전에 두고 집안에서 아내와 안락하게 지낼 수 없다는 우리아의 <깊이>에 지고 맙니다.


에필로그 | 유일한 그 공간의 용도

이와 같은 형식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를 잴 수 있습니다. 이 때 여기서 쓰이는 메코스(길이), 플라토스(너비), 휘포스(높이)는 바로 노아의 방주의 크기를 하나님께서 계시하실 때 사용되었던 단위입니다.

파스칼의 표현인 바, 이 공간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채우는 자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헛된 ‘가능성’과 ‘욕구’를 채우려다가 종국에는 파멸을 맞으며,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자기 믿음’으로 그곳을 메우려는 이들은 후일에 그것이 ‘욕망’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7월 29일 성령강림 후 제9주
본문, 엡 3:14-21.
 (c.f. 삼상 11:1-15; 시 14; 요 6: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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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