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2. 7. 23.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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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만리장성  

B.C 246경 중국에 영정이라는 소년이 왕이 되었습니다. 섭정을 받던 그는 장성한 후 섭정 무리를 척결하고 친정 체제를 구축하여 천하통일을 꾀합니다. 우선 가장 약한 한나라부터 멸망시켰습니다. 다음 조나라(228년), 위(225), 초(223), 연(222), 그리고 제나라까지(221), 마침내 39세 나이로 중국을 통일합니다. 왕이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삼황오제라는 말에서 ‘황’과‘'제’를 따 황제라 칭하고, 자신은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라 부르도록 했습니다. 이가 바로 진시황입니다. 그는 아방궁을 위시한 무리한 토목공사 강행과 대규모 문화탄압사건(분서갱유)으로 중국 사상 최대 폭군으로 불리지만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2천년 왕조의 기본틀을 닦은 인물입니다. 만리장성도 유명합니다. 그가 150만 여명을 동원 시킨 이 공사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이 긴 성벽을 대체 왜 축성했는지는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북방 흉노의 침임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이 성이 실제 그들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평생 불노초를 찾아 헤맨 것으로도 유명한 그는 불과 49세로 죽습니다. 사실 그 보다 평균 두 배는 더 사는 우리들은 그가 볼 때 불노초 먹은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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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그리스도인들이 세우는 세 가지 담

예수님께서 자기 육체로 허물려고 했던 - 이미 허무셨지만 어떤 자들에게는 여전히 존재하는 - 담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천국과 지옥 사이의 담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관념적 장소가 아니라 육체와 관념 모두로써 인식되는 곳입니다. 특히 천국은 우리가 반드시 들어가야 할 궁극적 귀착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만 들어갈 수 있고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너희가 가는 천국이라면 함께 가고 싶지 않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천국이 잘못된 것입니까? 이슬람의 천상계는 살아생전 공로 있는 남성들의 경우 - 예를 들면 종교적 열심의 자살 테러 - 원하는 만큼의 여성들과 같이 살 수 있는 곳입니다. 여성들은 그런 천국엔 안가려 할 것입니다. 우리의 천국이 여전히 담이 쳐져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그릇된 행동 양식과 그에 따른 천국의 설명일 것입니다.

둘째, 교리라는 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가만히 덕을 쌓고만 있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그분의 행실과 태도를 소유해야 합니다. 세례(침례)가 그것입니다. 성만찬이 그것입니다. 교회라는 곳은 세례와 성만찬을 위해 가는 곳이지 다른 이유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 중요한 교리 말고 다른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그러나 이 교리는 의식과 예전이라는 미명 아래 교파적 교리보다 부차적 수준으로 격하되어 단지 천국으로 가는 일종의 수속으로 자리해 있거나, 성장 테크닉에 가려 있습니다. 담을 형성하는 교파적 교리나 성장 기술 프로그램은 본문에서 지탄하고 있는 ‘손으로 행하는 할례’에 지나지 않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사람들이 운집하는 어떤 유명한 목사의 집회에 참석해보고는 “저 목사가 나를 장로교인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말하고는 두 번 다시 그곳에 안갔다고 일기에 기록합니다. 프랭클린이 신심이 부족해서 그런 말을 했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셋째, 빈곤이라는 담입니다.

배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구원은 빈곤으로부터의 구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빈곤을 안 느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요즘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절대적 빈곤> 퇴치를 사역기치로 하는 한 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떡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떡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절대적 빈곤의 퇴치를 위해서는 무모하리만큼 도전하려고 하지만 상대적 빈곤의 문제까지 해결하려고 나설 마음은 없습니다.
<상대적 빈곤>에 처해있는 자들의 빈곤 문제를 배부른 자들의 나약해 빠진 푸념 정도로 간주하는 것은 그릇된 진단이라는 입장이 저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산업혁명 이후의 인류 빈곤은 전적으로 상대적 가치가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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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것이 상대와 상대 사이의 ‘담’을 주도하며, 그리고 그것이 결국에는 절대빈곤에까지도 맹위를 떨치게 되는 것이고, 그렇기에 ‘빈곤’ 그 자체보다도 선행된 악을 우리는 ‘사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이’가 바로 본문에서 지목하는 ‘담’입니다. 십자가가 허물고 평화를 세우려 했던 것도 이 벽들이며, 이 벽이 또한 그것을 도리어 방해하기도 합니다.


에필로그 | 담을 허무는 방법 

우선 진시황이 친 벽인 만리장성을 칭기즈 칸이 허물 때에 쓰는 방법이 있습니다. 성벽에서 잘 보이는 위치에서 큰 가마솥에 기름을 끓이고는 포로들을 그곳에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성벽 위에 있던 자들이 그것을 보고 겁먹는 바람에 사기가 꺾여 그 담이 붕괴되었다는 얘기 입니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군대는 공병의 공성전으로 유명합니다. 아무리 높고 강한 성벽도 그 곁에다가 같은 높이로 공성을 하여서는 거기서 상대 성벽 담을 공략하는 전법이었습니다.  
 
끝으로 본문의 저자 바울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는 ‘가정으로’ 제국들과 모든 세계의 담을 무너뜨렸습니다. ‘종교로’ 담을 허문 게 아닙니다. ‘가정으로’ 허문 것입니다. 로마서의 마지막 장에는 당시의 하우스쳐취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 명단이 나오고 있습니다. 몇 되지도 않은 가정이 로마제국의 담을 넘어선 좋은 예입니다. 로마제국뿐 아니라 진시황과 칭기즈칸의 나라들은 바울의 그것보다 결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종교’가 아닌 ‘가정’으로 담을 붕괴시켰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미문(美門)교회가 하우스쳐취라서 드리는 말은 아닙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7월 22일 성령강림 후 제8주
본문, 엡 2:11-22.
 (c.f. 삼하 7:1-14a; 시 89:20-37; 막 6:30-34, 5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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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