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2. 8. 6.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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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플라톤의 국가

신약성서보다도 더 오랜(380 B.C경) 플라톤의 저서 <국가>라는 책의 주제는 ‘정의’입니다. 그는 정의를 “조화”라고 가르칩니다. 정의가 개인에게는 덕이지만 전체 속에서는 조화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조화를 위해 사회의 계급을 크게 둘로 나눕니다. 수호자 계급과 기술자 계급. 수호자 계급은 외부 침입을 방어하는 임무를, 기술자 계급은 생산을 담당하는 임무를, 그들이 각각 가슴과 배로 상징됩니다. 한편 철학자 자신들은 최상단 머리 위치에 둠으로써 통치 그룹으로 상정합니다. 원시적 분할 같지만 사실 이러한 계급 단위는 인류가 창설한 모든 국가 체제에 상시로 반영되어왔습니다. 때로는 귀족주의 사회에서, 때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체계가 채용되는 현상을 보여 왔습니다. 심지어는 전통적 공산주의의 사유재산 금지 제도도 플라톤의 국가 속에 이미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대목은 개개인의 재산 공유를 넘어 (아직까지 실현된 국가는 없지만) “처자(妻子)의 공유”라는 제도도 그 이상 안에 들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내와 자식도 국가를 위해 공유한다는 발상입니다. 과연 이런 조화 속에서 개인이 얼마나 행복할 수 있겠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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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하나님 나라의 내용과 목적

복음의 내용과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 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생애를 직접 묘사하고 있는 복음서들 외 바울의 서신서들에서도 중요한 주제 입니다. 물론 이 ‘하나님의 나라’는 구약 유대인들의 신앙에 까지 소급되는 개념입니다. 그렇듯 중요한 이 주제어가 다른 세 복음서에는 다 나오는데 요한복음에서만 빠져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기만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 대신에 ‘영생’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전혀 다른 표현인데 어떻게 대체될 수 있을까. 그것은 다시금 하나님 나라의 내용과 목적이 무엇인지 살필 때에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첫째, 영생은 하나님 나라의 내용과 목적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내용과 목적은 오해되고 오용된 사례들이 많습니다. 그 나라를 정치적인 나라로 이해했던 사람들은 허리에 검을 차고 다녔으며, 그 나라를 황금의 나라로 이해했던 사람들은 허리에 전대를 차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영생 곧 영원히 사는 것을 그 내용과 목적으로 갖습니다.

둘째, 영생은 다른 차원의 양식으로 가능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뜻인 ‘영생’에 대해 오해한 사람들이 진시황의 불로초나 희랍 신화의 넥타르를 구하듯 신앙생활을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오해했듯이 오병이어를 체험한 사람들이 그 떡에 대해 잘못 이해를 하고 있지만, 영생 할 수 있는 떡이란 예수님의 몸입니다.

셋째, 영생은 말씀으로 사는 ‘삶의 체계’를 일컫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그 영생의 떡이자 곧 하늘에서 온 떡이라고 한 것은 그 떡/몸이 어떤 불사(不死)의 효능을 지닌 재료라는 뜻이 아니라, 일종의 체계(system)라는 말입니다. (1) 광야에서 먹었던 떡 곧 만나의 질료도 예수님의 몸을 가리키고 있고, (2) 오병이어의 떡도 예수님의 몸을 가리키고 있고, 신령한 떡인 (3) 하나님의 말씀도 예수님의 몸을 가리키고 있다면, 그 몸은 일종의 실천, 실행, 행위로 표명될 수 있는 ‘삶의 체계’ 말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것입니다(요 1:14).

에필로그 | 영생의 내용과 목적

플라톤이 꿈꾼 <국가> 역시 일종의 체계였습니다. 머리, 가슴, 배로 이루어진 체계.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철인이 아닌 예수님께서 머리 되시고 그 아래로 가슴, 팔, 다리, 손, 그 모든 것들이 (계급이 아닌) 독특한 개성과 은사를 지닌 지체로서 서로 화합하고 사랑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밝혀진 바, 사실상의 영생의 내용과 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예형이라 할 수 있는 교회에서 성공적인 몸을 형성해내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의 궁극인 하늘에 가서도 그리 행복을 느끼지 못할 것이 자명합니다. 어떻게 좋아하지도 않던 공동체 생활을 영생토록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8월 5일 성령강림 후 제10주
본문, 요 6:24-35.
 (c.f. 삼하 11:26-12:13a; 시 51:1-12; 엡 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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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