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2.09.09 의인 집단의 듀얼리즘
  2. 2012.08.06 영생(하나님 나라)의 내용과 목적
말씀 속에서2012. 9. 9.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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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듀얼리즘

세상을 이중의 차원으로 보는 듀얼리즘(이원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몇 가지로 요약해보면, 우선 가장 원시적 듀얼리즘은 플라톤에게서 나옵니다. 이데아라는 이상적 세계를 현실과 분리해서 본 그는 이데아를 배척하는 물질계로서의 현실을 소개합니다. 이러한 이원적 세계관은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에 녹아들어 “두 사랑이 두 개의 도성을 만들되 하나님을 배제한 자기 사랑이 지상의 도성을 만들고, 자신을 배제한 하나님 사랑이 천상의 도성을 만든다”는 논지로써 중세교회 교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종교를 벗어난 물리학에서 블랙홀이라는 가설이 제기되면서 4차원이라는 가상의 공간적 세계가 개진되기도 합니다. 1차원은 점, 2차원은 선/면, 그리고 우리가 사는 실존세계를 3차원으로 보는 그것은 인간이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공간을 4차원으로 상정합니다. 교회로 다시 돌아와, 이 4차원을 영성이라고 소개하는 말도 간혹 듣습니다. 무엇이든 믿는 대로 된다는 논지로 상상하고, 믿고, 꿈꾸고, 말하면, 그대로 된다면서 그 꿈/상상세계를 4차원으로 명명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데아>는 현실과 정신 간 괴리를 가져오는 숱한 유사 듀얼리즘을 양산했고, <신의 도성>은 본의 아니게 신앙의 이중적 행동내지 특수주의를 재생산했으며, 물리학적 듀얼리즘은 이데아와 신의 도성을 <블랙홀>로 몰아넣어버렸고, 뭐든 상상대로 된다던 영성은 4차원 세계에 있던 <황금>을 이 실존세계로 가져오는데 성공합니다.

프린서플 | 의인 집단의 듀얼리즘

원적 세계의 문제는 그것이 철학적인가, 종교적인가, 과학적인가, 아니면 그 복에 귀납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관점과 판단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어떤 이원적 양식이든 그 속에서 우리가 결부 짓는 선악의 구도와 그에 따른 양심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떠한 구도에 직면하든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을 선으로, 그리고 타자를 그 모든 악으로 간주하는 경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의인들의 세계

이스라엘은 야웨께서 “우리 편”에 계시다고 말합니다(시 124:2). 그 편은 바로 시온 산이요 예루살렘으로서 흔들리지 않고 영원한 세계로 받아들여졌습니다(125:1-2). 시온과 예루살렘에 준거하는 이들은 선한 자들로서 마음이 정직한 자들이기에 선대를 받아 마땅하고, 그 신앙적 성지에 준거치 아니하는 자들은 야웨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신 이들이라고 믿었습니다(vv. 4-5).

둘째, 의인들의 행실

그 준거집단 곧 그 의인들의 행실은 세월이 흘러 규정적으로 변모합니다. 부정한 손, 씻지 아니한 손으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시장 통을 돌아다니다 올라치면 물이라도 한번 뿌려야만 뭔가 의인이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막 7:4-5). 자신의 신체를 통해 영혼이 오염되었을까봐 그토록 주의를 기울일 정도이니, 자기와는 다른 사람들(이방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은 당연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 의인들이 지니고 있는 행실이었습니다.

셋째, 의인들의 세계 붕괴

예수님과 수로보니게 여인의 대화를 통해서 “자녀들”과 “개들”로 전통 속에 자리 잡힌 두 세계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자녀 곧 유대인들 자신과, “개들”인 이방인들 세계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해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는 말씀을 통해 그 전통적 구속사 입장도 듣게 되지만, 아울러 우리는 “상 아래 개들로서 그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라도 먹겠다”는 말에 대한 예수님의 인준을 통해 그 두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인준의 근거를 “이 말을 하였으니...”(막 7:29)라고 밝히심으로써 그 벽을 허물고 두 세계를 이은 그것은 바로 <믿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c.f. 마 15:28).

에필로그 | 듀얼리즘의 해제(解除)

우리에게 명백한 듀얼리즘 세계는 “과거와 현재”뿐 입니다. 또한 그것은 “현재와 미래”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연결되어 있는 세계입니다. 그 ‘사이’의 붕괴가 예수님의 신체를 통해 이룩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그분의 몸으로 이룩된 회개를 통해서만 그 과거와 현재의 인과관계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악을 뿌린 자들은 재앙을 거둔다고 본문을 말합니다. 또 본문은 말합니다. 복을 받는 자는 단지 복을 4차원에 넣고 흔들어 뽑아내는 자들이 아니라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주는 자들이라고-.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자’ 속에는 우리가 생각하기를 “개들”이라고 간주하는 그들도 포함 시키지 않으면 안될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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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
말씀 속에서2012. 8. 6.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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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플라톤의 국가

신약성서보다도 더 오랜(380 B.C경) 플라톤의 저서 <국가>라는 책의 주제는 ‘정의’입니다. 그는 정의를 “조화”라고 가르칩니다. 정의가 개인에게는 덕이지만 전체 속에서는 조화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조화를 위해 사회의 계급을 크게 둘로 나눕니다. 수호자 계급과 기술자 계급. 수호자 계급은 외부 침입을 방어하는 임무를, 기술자 계급은 생산을 담당하는 임무를, 그들이 각각 가슴과 배로 상징됩니다. 한편 철학자 자신들은 최상단 머리 위치에 둠으로써 통치 그룹으로 상정합니다. 원시적 분할 같지만 사실 이러한 계급 단위는 인류가 창설한 모든 국가 체제에 상시로 반영되어왔습니다. 때로는 귀족주의 사회에서, 때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체계가 채용되는 현상을 보여 왔습니다. 심지어는 전통적 공산주의의 사유재산 금지 제도도 플라톤의 국가 속에 이미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대목은 개개인의 재산 공유를 넘어 (아직까지 실현된 국가는 없지만) “처자(妻子)의 공유”라는 제도도 그 이상 안에 들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내와 자식도 국가를 위해 공유한다는 발상입니다. 과연 이런 조화 속에서 개인이 얼마나 행복할 수 있겠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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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하나님 나라의 내용과 목적

복음의 내용과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 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생애를 직접 묘사하고 있는 복음서들 외 바울의 서신서들에서도 중요한 주제 입니다. 물론 이 ‘하나님의 나라’는 구약 유대인들의 신앙에 까지 소급되는 개념입니다. 그렇듯 중요한 이 주제어가 다른 세 복음서에는 다 나오는데 요한복음에서만 빠져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기만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 대신에 ‘영생’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전혀 다른 표현인데 어떻게 대체될 수 있을까. 그것은 다시금 하나님 나라의 내용과 목적이 무엇인지 살필 때에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첫째, 영생은 하나님 나라의 내용과 목적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내용과 목적은 오해되고 오용된 사례들이 많습니다. 그 나라를 정치적인 나라로 이해했던 사람들은 허리에 검을 차고 다녔으며, 그 나라를 황금의 나라로 이해했던 사람들은 허리에 전대를 차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영생 곧 영원히 사는 것을 그 내용과 목적으로 갖습니다.

둘째, 영생은 다른 차원의 양식으로 가능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뜻인 ‘영생’에 대해 오해한 사람들이 진시황의 불로초나 희랍 신화의 넥타르를 구하듯 신앙생활을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오해했듯이 오병이어를 체험한 사람들이 그 떡에 대해 잘못 이해를 하고 있지만, 영생 할 수 있는 떡이란 예수님의 몸입니다.

셋째, 영생은 말씀으로 사는 ‘삶의 체계’를 일컫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그 영생의 떡이자 곧 하늘에서 온 떡이라고 한 것은 그 떡/몸이 어떤 불사(不死)의 효능을 지닌 재료라는 뜻이 아니라, 일종의 체계(system)라는 말입니다. (1) 광야에서 먹었던 떡 곧 만나의 질료도 예수님의 몸을 가리키고 있고, (2) 오병이어의 떡도 예수님의 몸을 가리키고 있고, 신령한 떡인 (3) 하나님의 말씀도 예수님의 몸을 가리키고 있다면, 그 몸은 일종의 실천, 실행, 행위로 표명될 수 있는 ‘삶의 체계’ 말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것입니다(요 1:14).

에필로그 | 영생의 내용과 목적

플라톤이 꿈꾼 <국가> 역시 일종의 체계였습니다. 머리, 가슴, 배로 이루어진 체계.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철인이 아닌 예수님께서 머리 되시고 그 아래로 가슴, 팔, 다리, 손, 그 모든 것들이 (계급이 아닌) 독특한 개성과 은사를 지닌 지체로서 서로 화합하고 사랑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밝혀진 바, 사실상의 영생의 내용과 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예형이라 할 수 있는 교회에서 성공적인 몸을 형성해내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의 궁극인 하늘에 가서도 그리 행복을 느끼지 못할 것이 자명합니다. 어떻게 좋아하지도 않던 공동체 생활을 영생토록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8월 5일 성령강림 후 제10주
본문, 요 6:24-35.
 (c.f. 삼하 11:26-12:13a; 시 51:1-12; 엡 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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