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2.09.17 진화의 시작, 지혜의 기원
  2. 2012.09.17 세 단계의 지혜
  3. 2012.08.20 지혜의 본성
상상 속에서2012. 9. 17.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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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다음 세 단계 분류를 갖는다.

첫째 지능, 둘째 꾀, 셋째 이해.

지능은 보편이고 꾀는 혁신이라면, 이해는 공감이다.


보편은 주어진 것이지만

혁신은 오류에서 비롯된다.


혁신은 일종의 혁명이지만

혁명은 일종의 반란이기 때문이다.


사단이 혁신이라는 문화와

반역이라는 혁명 속에서

공존하는 원리이다.


그래서 사단은 도깨비가 아니라

혁신과 문화라고 이르는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진화의 시작>인 셈이다.


또 그것은

사회적 개혁이나 군사적 혁명,

그리고 심지어는 종교개혁이

곧바로 부패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혁신과 문화의 발원점인 꾀는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에 기인했지만

세 번째 단계 지혜인 <이해>는 

다시 회귀하고픈 미련에서 잔존된 것이다.


절대자가 이들 중 어느 것은 쓰고

어느 것은 쓰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세 가지 모두 섭리다.


다만, 이와 별개로 지혜의 실체는 따로 있다. 배워서 이르는 것이 아니다.


c.f. 함께 보기 http://www.mimoonchurch.com/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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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9. 17.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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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동심

내가 위그던씨 사탕가게에 처음 들어섰던 것은 4살 때의 일이다. 그는 여러 종류의 총천연색 사탕을 팔았다. 그 멋진 사탕들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은 어린애에게 쉽지 않았다. 고른 것을 담을 때면 늘 후회했다. 딴것은 더 맛있지 않을까? 더 오래 먹지 않을까? 위그던씨는 언제나 마지막까지도 바꿀 기회를 주셨다. 우리 어머니는 장을 다 볼 때마다 위그던씨네에 날 데려가곤 하셨는데, 그 때 난 돈이란 게 뭔지를 몰랐다. 어떤 봉지를 건네주는 사람들에게 어머니가 뭔가 건네는 것을 지켜보면서 교환이라는 개념이 서서히 마음에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혼자서 위그던씨를 찾아갔다. 나는 그 곳에 있는 사탕들 중 쵸코땅콩, 왕사탕, 그리고 총천연색 아기모양 젤리를 골랐다. 위그던씨는 작은 봉지에 그것들을 담아 카운터에 올려놓고는 물었다. “너 이것들 살 돈은 가지고 있니?” “아, 네. 저 돈 많아요.”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주먹을 펴 위그던 아저씨 손에다가 체리 씨 6개를 건넸다. 그는 자기 손에 놓인 그 체리 씨들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부족한가요?”라고 묻자 그는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좀 많구나.” “네가 거스름돈을 받아가야겠다.” 그리고는 2센트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그 일은 몇 년이 지나면서 잊혔다. 

내가 6~7살 될 때 우리 가족은 다른 도시로 이사를 했고 그곳에서 자라나 나는 결혼도 했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열대어 가게를 열었다. 모든 종류들이 한 쌍에 5달러 정도 했다.

해가 쪼이는 어느 날 오후 작은 소녀 하나가 남동생을 데리고 왔다. 5-6세 정도 되어 보였다. 내가 어항 청소를 바쁘게 하고 있을 때 그 애들은 물속에서 노는 아름다운 물고기들을 보았다. “우와,” 소년이 소리쳤다. “이거 우리가 좀 살 수 있나요?” “그럼, 살 수 있지.” 나는 대답했다. “너희들이 그 값만 지불한다면-” “물론이에요. 우리 돈 많아요.” 그 작은 소녀는 말했다. 그 아이가 그렇게 말하는 중에 뭔가가 나에게 이상한 낯익은 느낌을 주었다. 

얼마동안 물고기를 지켜본 후 그 애들은 다른 종류의 열대어 몇 쌍을 내게 주문했다. 나는 아이들이 고른 것들을 작은 비닐봉지에 넣어 소년에게 건넸다. “조심해서 가져가라.”고 말하자 소년은 “네, 그럴게요.”라면서 돌아서서는 “돈 드려.”라고 누나에게 말했다. 난 내 손을 건넸고, 그리고 그 소녀가 주먹을 펼 때 갑자기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다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 소녀가 무슨 말을 할지도 알고 있었다. 그 아이는 주먹을 펴 나의 손바닥에 동전 3개를 떨어뜨렸다.

순간 나는 위그던 아저씨가 생각났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 노인에게 어떤 곤란을 안겨주었는지, 또 그가 자신이 직면한 그 상황을 얼마나 훌륭하게 대처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내 손에 있는 그 동전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가 그 작은 사탕가계에 다시 서 있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 두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그리고 그 순수함을 지켜줄 수도, 또 파괴할 수도 있는 힘에 대해 이해가 갔다. 오래전에 위그던 아저씨가 그랬던 것처럼... 이 메어 오르는 기억이 내게 차올랐다. 

“부족한가요?” 그 소녀가 말했다. “조금 많구나.” 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네가 거스름돈을 받아가야겠다.” 그리고 2센트를 그 아이 손에 쥐어주었다. 그 아이들이 길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당신이 그 애들에게 준 열대어가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아내가 말했다. “30달러 정도...”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소.” 내가 위그던씨에 관해 아내에게 이야기 해주자 그녀의 눈에 이슬이 맺히면서 나를 뜨겁게 안아주었다. “여전히 그 사탕 냄새가 나...” 나는 숨을 내쉬었고, 마지막 어항 청소를 마쳤을 때 내 어깨너머로 위그던 아저씨 웃음소리가 들렸다는 확신이 들었다. <The Gift of Understanding 번역>

프린서플 | 세 단계의 지혜

지혜를 세 종류로 나누었을 때, 그 중 가장 우월한 지혜를 예화로 보았습니다. 그들 세 가지 지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지능으로서 지혜 (창 2:19)

아담에게는 각종 생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둘째, 꾀로서 지혜 (창 3:13; c.f. 시 1)

뱀은 꾀를 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지혜는 속이는 것입니다. 특별히 파괴를 하기도 합니다.

셋째, 이해로서 지혜 (막 9:36-37; c.f. 잠 31:10-31)

어린 아이를 이해하고 그들처럼 되라는 것은(c.f. 마 18:3) 애들 흉내를 내란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 곧, 과거와 미래를 잇는 중요한 지혜를 지표하기 때문입니다. 

에필로그 | 최종적 지혜의 목적(Telos)

이 세 번째 지혜가 없다면 그리스도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가 한 일이 뭔지를 알지도 못하게 되므로 그분처럼 살아갈 수도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지혜는 아직 최종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바로 동심(the innocence)이며, 그 자신이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그것을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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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8. 20.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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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이혼에 성공한 사람

이화여대 영문과를 3년만에 조기 졸업하고, 도미, 변호사 자격 취득, CA주(州) 검사에까지 임용되는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그녀 이면에서는 벗을 수 없는 고통들이 따라다녔습니다. 결혼 5년만의 이혼, 갑상선암, 망막 파손으로 인한 실명, 첫 남편과 사이에서 난 장남의 돌연사, 둘째 아들의 자폐아 판정까지, 이어령 전 장관의 딸 이민아 목사님의 삶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친의 회심이 있었고, 시력도 되찾고 갑상선암도 완치되는 이적이 있었습니다. 원래 호르몬 질병인 갑상선암엔 완치란 게 없지만 암세포가 모두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후 목사 안수도 받고 활발한 사역도 했습니다. 그러나 2011년 그녀는 다시 위암 판정을 받습니다. 그녀가 죽기 한 달 전인 이듬해 2월15일자 인터뷰에서 그녀는 밝은 얼굴빛으로 지난 날 아들을 잃었던 곳 일본을 다시 여행한데 대한 이런 소회를 남겼습니다. 

“제가 이번에 놀란 것이, 회복이 있고 완전한 회복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3월15일 사망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녀와 이혼했던 첫 남편이 남긴 소회도 기록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와 이혼 직후 소회를 책에다가 그는 이렇게 남겼습니다. 

“...결혼생활 5년 동안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은 그 절반쯤이었을 것이다. 그 절반의 절반 이상의 밤을 나나 그녀 가운데 하나 혹은 둘 다 밤을 새워 일하거나 공부해야 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서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모든 기쁨과 쾌락을 일단 유보해두고, 그것들은 나중에 더 크게 왕창 한꺼번에 누리기로 하고, 우리는 주말여행이나 영화구경이나 댄스파티나 쇼핑이나 피크닉을 극도로 절제했다... anyway 미국생활 5년 만에 그녀는 변호사가 되었고 나는 신문사 지사장이 되었다. 교포사회에서는 젊은 부부의 성공 사례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방 하나짜리 셋집에서 벗어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3층짜리 새집을 지어 이사한 한 달 뒤에, 그녀와 나는 결혼생활의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혼에 성공했다. 그때그때의 작은 기쁨과 값싼 행복을 무시해버린 대가로.” 

여기서 우리는 이혼에 성공한 사람과 완전한 회복에 성공하는 사람, 두 사람을 목격합니다.


프린서플 | 지혜의 본성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엡 5:15b)는 말씀과 같이 지혜는 우리의 세월, 즉 삶과 관련 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의 본성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와의 지혜. 

하와는 금제의 나무를 보고서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창 3:6)고 여겼습니다. 그녀가 그 열매를 먹기도 전에 상상으로 갈망했던 그 지혜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의 행동으로써 다 나타납니다. 대다수가 금제의 경계선을 지키고 있는 동안, 담대하게 넘어가서는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낸 지혜였습니다. 하나님이 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지혜로 규정됩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지혜.

근대에 들어서 예술보다 기술을 천시 여기는 경향이 나타났지만 본래 ‘예술’은 기술에서 온 말입니다. 기술의 범주가 더 크고 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 설계를 보이셨을 때, 이것을 실물로 제작하려면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이를 주도한 이들의 기술을 하나님께서 주신 영으로 그 지혜를 소개합니다. 재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지혜는 모세가 안수하여 자신의 사역을 승계 시킬 여호수아를 위해 구합니다(신 34:9). 그런가하면 미련한 여인과 대비된 슬기로운 여인에게도 이 지혜가 있습니다(잠 14:1). 우리에게 호크마로 알려진 지혜가 이것입니다.

솔로몬의 지혜.

솔로몬의 지혜는 앞의 두 지혜와 구별됩니다. 어떤 이성적 아이디어나 예술적재능이 아니라, “이해하는 마음” 혹은 “듣는 마음”이라는 표현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왕상 3:11b 부분을 직역하면 “재판을 듣고서 이해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재판 곧 심판은 어떤 원리로 실행됩니까? 법조문을 가지고서 하와의 이성적 지혜로 적용합니까? 아니면 법에 달통한 기술적 재능을 가지고 합니까? 솔로몬은 “듣고,” “이해”한 지혜로 심판을 했습니다. 오늘날의 법정이 이런 재판을 했다간 당장에 주관적 재판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세월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어쨌든 이 지혜를 가지고서 두 창기의 아이를 가르는 그 유명 재판을 주도합니다. 세 가지 지혜 중 가장 우월한 지혜입니다.

프롤로그 | 완전한 회복에 성공한 사람

유대인들은 솔로몬의 모든 영광이 지나가버린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바로 이 하나님의 지혜가 언제나 함께 한다고 믿었습니다. 욥기가 그 종말의 세월을 잘 반영합니다. 욥기에는 “지혜”로 번역될 수 있는 어휘가 약 35회 정도나 등장합니다. 어떤 때는 이성적 사칼로, 어떤 때는 호크마로..., 그러나 욥은 자신의 최후 종말에 가서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라고 고백하면서 그 종말을 솔로몬이 재판할 때 사용했던 “듣는 마음”에서 오는 깨달음으로서 지혜로 마무리 짓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지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장 우월한 지혜는 법도를 마지막 순간까지 충실하게 따르는 것일 텐데, 여기서  “법도”라 함은 어떤 성문 된 율법 내지 그 율법의 세부조항으로서라기 보다는 자신에게 불가항력적인 - 회피할 수 없는 - 삶의 장벽 내지 장애인 것이며, - 우리는 율법/법도를 지나치게 멀리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그것을 끝까지 완주하는 자들이 바로 이 지혜를 구사하는 자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민아 목사님이 남긴 말, “제가 이번에 놀란 것이, 회복이 있고 완전한 회복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에서 깨달음은 이 세 가지 중에 가장 우월한 세 번째 지혜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2012년 8월 19일 성령강림 후 제12주
본문, 엡 5:15-20.
 (c.f. 왕상 2:10-12, 3;3-14; 시 111; 요 6:5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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