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04.28 유토피아가 임하는 방식
  2. 2012.08.07 독사(doxa)라는 말에 관한 오남용
말씀 속에서2013. 4. 28.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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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것을 제거하고 물질만을 토대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던 것이 공산주의(communism)라면, 자본주의(capitalism) 중에 더러는 영을 물질로 바꿔치기해 유토피아를 건설한다. 둘다 물질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다는 점이 같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 영혼이 잘되는 것이지, 영혼이 잘 됨같이 어떻게 범사에 부자가 된다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유토피아는 물질로 물질을 붕괴시켰다는 점에서 이 양자와 전혀 다르다. 
이를테면, “분노”, “폭력”, “배신”,..., “죽음”, 

물질이 산출해낸 그 모든 플롯(plot)을 하나도 빠짐 없이 모두 당하고 통과해 뚫고 지나간 것, 이것이 바로 물질로 물질을 깨뜨리는 방식, 즉 그의 영광이 임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그의 유토피아가 임했다.

유다가 떡 조각을 받고서 뛰쳐 나간 직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요 13:31)고 말한 그 알 수 없는 의미도 이로써 이해될 수 있다.   


프롤로그 | 공산주의의 태동.

공산주의의 창시자 칼 막스는 1818년 프로이센 왕국에서(지금의 독일)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유대계였지만 복음주의 국교회로 개종한다. 칼 역시 6세 때에 세례를 받았며 청년기까지만 해도 그에게 그리스도교적 봉사와 희생의 의지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1835년 대학에 입학한 그는 그리스어, 로마 신화, 미술사 같은 인문학에 심취해 있었는데 암흑기를 사는 대학가가 대개 그렇듯 (오늘날로 말하면) 그는 운동권 학생이었던 것같다. 행동주의자들이 포함된 시인 클럽에도 출입했다고 한다. 친구들이 검거되거나 추방 당할 때 그는 1년 후 법률과 철학을 공부하러 베를린으로 떠난다. 이때 마르크스는 당시 베를린대(大)를 휩쓸던 헤겔철학과 만난다. 처음엔 괴리감을 느꼈으나 베를린 혁명문화에서 헤겔의 비중은 압도적인 것이었기에 그는 관련 학회 클럽에도 가입한다. 

이 클럽의 핵심인물이 바로 젊은 신학강사 브루노 바우어였다. 바우어는 근대 신학 예수 연구에 있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학풍을 연 학자로 소개되는 인물이다. 그는 복음서가 어떤 실제적인 역사의 기록물이라기 보다는 감성적 필요와 기대감에 따른 기록이며, 예수 또한 역사적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도발적 가설을 전개시켰다. 칼 막스는 예언자 이사야에 대한 바우어 강좌를 수강했다. 여기서 바우어는 새로운 사회적 파국, 즉 예수의 재림시에 닥칠 시련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파국이 다가오고 있다고 설파했다. 이와 같이 청년 헤겔 학파가 급속도로 무신론화 되면서 칼 막스는 정치적 행동들을 익혀나가기 시작했다.



프린서플 | 유토피아가 임하는 방식.

칼 막스를 경도시켰던 헤겔의 역사 인식이란, 역사 자체를 절대자로 놓고 그것은 모순과 부딪쳐가며 ‘발전’해나가는 양식일 뿐이지, 어떤 목적을 가진 신이 곧 역사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개념으로부터 공산주의 사상의 토대가 될 변증법적 유물론을 착안한 칼 막스는 모든 정신적인 것을 속임수로 간주해 부정하고 오직 물질을 토대로 된 세상을 다시 건설하려 했습니다. 영적인 모든 것을 일종의 환각으로 여기면서까지 그가 추구하고 건설하려던 세상은 한 마디로 철저하게 지상낙원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르치신 나라는 지상낙원이 아닌 하늘에 속한 것이었으며 그가 어떻게 물질세계를 뚫고 나가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사람이 예배드리러 도착했을 때.

요한복음에는 ‘예배’라는 말이 11회 나옵니다. 예배의 장소를 지목할 때 두 번(요 4:20[2]), 예배의 시간을 지목할 때에 두 번(4:21, 23), 알거나 모르고 드리는 예배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즉 예배의 질에 대한 표현으로서 세 번(4:22[2], 24), 예배하는 사람으로서 두 번(4:23, 24) 그리고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고침 받고 믿음을 받아들이는 경의의 표현에서 한 번(9:38), 그리고 끝으로 나머지 하나는(12:20) 유월절에 예배드리러 온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 예배에 왔다는 것인지 예수께 왔다는 것인지 모호하게 된 문장 속에서 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도착한 후 예수께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v. 23)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감안할 때 이들의 도착해 예배하려던 대상은 예수님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러 도착했을 때, 바로 그 때 예수께서 영광 얻는 때가 도래합니다.


사람이 떠났을 때.

오늘 본문에서는 유다가 (배신을 하러) 떠간 후에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이 앞으로 있을 십자가 형을 염두에 둔 표현인 줄 알고 개의치 않고 읽지만 “지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가 배신을 해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까, 나가버려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까? 떠났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혼자 계실 때.

사람들이 어떠한 이유에서든 당도했다가 다시 모두 다 떠나게 되면, 남는 것은 자신 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영광은 인자가 들리는 것을 말하며 들리는 것은 십자가 형을 말하는데, 그것은 철저하게 홀로 감당하심으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에필로그 | 유물론의 천적.

칼 막스는 철저하게 정신적인 것을 제거하고 물질로만 된 유토피아를 건설 했습니다. 그리고 종교는 물질에 반한 것이라며 영을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영광은 영적인 것이되 철저하게 물질로 가격한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물질로 만들어진 지상낙원의 폭력은 이같이 물질을 물질로 부순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통해 거짓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교가 유물론의 천적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미지 참조:
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2013/jan/25/karl-marx-relevant-21st-century
http://en.wikipedia.org/wiki/Judas_Iscari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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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 8. 7.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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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δοξα)라는 말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와서 <영광>이라는 말로서 그것이 단지 어떤 빛이라는 뉘앙스 견지에서만 즐겨 사용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 말은 본래 전혀 의미도 생소한, <의견>이라는 뜻으로부터 출발된다. 고대 희랍인들이 동물학을 논하면서 “동물들은 <의견>이 없다”라고 말할 때 이 단어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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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에게는 의견이 정말 없을까? 강아지나 고양이 앞에 생선과 개사료를 놔두면 무엇을 택할까? 당연히 생선을 택할 것이 아닌가? 그래도 의견이 없는 것인가? 여기서 말하는 <의견>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일종의 추론으로부터 나온 상상력을 말한다. 감각에 준거한 즉각적인 택일을 하는 식의 그런 선택으로서 의견이 아니라, 스스로 계산하거나 추론하고 상상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의견을 말한다.

그래서 고대의 희랍인들은 이 독사라는 어휘 속 사고능력을 생각할 때, 사고 그 자체, 그 사고 자신이 추론하고 상상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같다.

다시 말하면 “모든 동물들이 <의견>( δοξα)을 갖는 것은 아니다”라는 정의에 대한 그 근거를 피력할 때,

동물들은 추론으로부터 나온 상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반면 추론은 상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De Anima>

라고 해제를 내리고 있는 것은 그와 같은 독사(δοξα)의 구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반면에 추론은 상상을 필요로 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어떻게 “동물”과 “추론”이 댓구가 될 수 있는가? 전자는 생물이고 후자는 생물이 아닌데?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정신으로서 <독사> 그 자신이 그렇게 추론하고 상상을 하면서 <의견>을 개진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신체의 구속을 벗어나는 정신의 단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일종의 육체의 감각 추구와 합목된 그런 <의견>과는 완전하게 분리된 추론능력으로서 <의견>을 말하며 곧, 그 스스로 추론하고 상상하여 견해를 내리는 판단 양식으로서 <의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심판>의 양식인 셈이다.

즉 다시 말해서 <영광>에서 뉘앙스 짓는 그 빛은 어디에서 비롯된 빛의 기운인가 라고 그 출처를 따져볼 때에 그것은 전적으로 <심판>으로서 <의견>에서 도출되는 빛의 형식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 인기인이 받는 따위의 - 그런 빛의 형식과는 판이한 것이다. 이것이 독사의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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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 현대적 그리스도인은 <심판>을 전혀 두려워하지도 않지만 전혀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그 <영광>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 위선적 관념 속에 이 독사에 대한 오남용의 일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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