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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7.19 설교가 지닌 한계
단상 속에서2012. 7. 19.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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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시작된 이후로 줄곧 설교 본문을 성서일과(Common Liturgy)라는 것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평신도들 가운데는 이런 것이 있는 지조차도 모르는 분들이 적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임의 본문을 삼가고 있습니다.

한 주간 속(俗)에 거하다가 지쳐서 교회 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고서 사람의 입 타고 나오는 말을 들려줘야 하는데 그것이 일개 개인 자의로 선택된 것이라면 그것이 과연 얼마나 대언력을 갖출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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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박학다식하고 성서 지식이 남다른 목사라 하더라도 그가 구사하는 언어의 캐시 용량과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비유가 좀 그렇습니다만, 이 세상에 동물들의 종류가 그렇게 많은데 사자나 표범 이런 건 다 빼고서 쥐나 뱀 따위의 십이 간지만 가지고 사람 운수를 진단하는 한계와 같은 것입니다.  

무슨무슨 세미나나 성장 기술에 사로잡힌 사람의 언어 캐시에는 그 어휘들만 들어 있습니다. 2-3주간 읽은 책의 어휘에 그 모든 캐시가 사로잡히는 이치입니다. 우리들의 성도들은 2-3년 전에 써먹은 설교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특정 성도들을 향해 표적 설교를 하는 경우도 지겹도록 보아 왔습니다.

일장일단은 있겠으나 내가 임의로 선택한 본문이 아닌, 철저하게 교회력에 입각한 검증된 본문 위에 설교자 자신도 함께 올라섰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정합성이 몇 갑절은 더 상승된다는 장점이 그 모든 단점을 상쇄하고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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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개신교는 설교라는 도그마로 그 얼마나 성서 위에 군림해 왔는지, 깊은 반성을 해야 할 시점에 오지 않았는가 하는 자성과 함께 하르낙(Adolph von Harnack)의 역작 History of Dogma(1885) 중 한 소절을 떠올려봅니다.

...도그마는 모든 교회의 배경에 있어 왔다. 동방교회는 제의의 공간적 측면을 강조했고, 서방교회는 교권적 측면을, 그리고 개신교회는 복음서 본질을 추구하는 측면에서 그러했지만 역설적인 것은 개신교회들이 가장 후대 멀리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그 이점으로 도그마들을 일시에 제거하는 데 아무런 문제될 게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 와서 그것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직접적으로 말하는 방식의 설교라는 도그마로 치환되어 와 있게 되었다. 카톨릭 교회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르낙은 도그마가 복음을 방해한다는 입장에서 이런 진술을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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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