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2.08.27 위조된 꿈을 분별하는 방법
  2. 2012.07.14 꿈을 계시로 받는 방식에 관하여
말씀 속에서2012. 8. 27.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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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꿈 깨는 이야기

2004년9월13일 오프라 윈프리는 “여러분 소원을 이뤄줄 수백만 달러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는 말로 <꿈은 이뤄진다>회분 토크쇼를 시작합니다. 그날 방청객은 차가 꼭 필요한 사연을 써 미리 모아진 여성 276명이었습니다. 이들 중 11명만 무대로 불러내 차 키 한 개씩 주자 부러움으로 열광했습니다. 이어서 그녀는 나머지 265명에게 작은 선물상자 하나씩을 나눠주고는 말합니다. “여러분께 드린 상자 중 하나에 12번째 자동차 키가 있습니다.” 모두 그 키의 주인공이 되기를 기대하며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여는 동안 여기저기 환호성이 울렸습니다. 모든 상자 속에 자동차 키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2만8천 달러 정도하는 GM사 폰티악 G-6의 키였습니다. 총 가격은 770만 달러, 오프라 윈프리의 선물이었습니다. 며칠 후 CNN머니는 이들 각각에게 최고 7천 달러의 세금이 부과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습니다. 소득세와 소비세는 본인이 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윈프리 사무실 대변인은 “자동차를 선물 받은 사람들은 세금 내고 차를 보유하든지, 차를 팔아 그 돈으로 세금을 내든지, 아니면 차를 포기하든지 3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10월29일경에는 실제로 경매 사이트 이베이에 “오프라 윈프리가 방청객에게 준 車 선물”이라는 명칭으로 매물이 나왔습니다.

선물은 자동차였나 현금이었나... 그럼 꿈은, 그것이 선물이기에 기쁜가 환금(換金)가치였기에 기쁜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 후 2010년에 오프라 윈프리는 폭스바겐사로부터 세금 포함 차량 전체를 후원 받아 이런 이벤트를 다시 한번 합니다.  


프린서플 | 꿈에 관한 하나님의 전개 방식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천막 가운데 있구나”(삼하 7:2) 하는 마음이 다윗의 꿈이었습니다. 대적을 물리쳐주시면 내가 성전을 짓겠다거나 내가 정권을 잡으면 성전을 짓겠다는 식의 공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궤를 바라보는 작은 탄식이 바로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을 자기 대에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피를 흘린 군인이었기 때문입니다(대상 28:3). 대신 아들이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자원을 확충하고 죽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그 꿈을 이룩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는 과정은 나라 전체에 막대한 부담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분열의 불씨를 남겼습니다. 솔로몬은 본문과 같은 기도를 통해 자신의 꿈 곧, 아버지가 받았던 하나님과의 약속을 토대로 하는, 성전 중심의 비전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성실한 신앙, 건축으로 야기된 분열의 씨, 그리고 외세의 침략으로 그 모든 비전과 꿈은 사실상 붕괴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 꿈은 붕괴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꿈의 질료는 예수님의 몸을 통해 완전한 형식으로 탈바꿈 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서입니다. 

첫째, 부정하심을 통해서 입니다. 

우리의 꿈은 사실상 부정되어야 합니다. 단순한 부정적 사고가 아닙니다. 아브라함 꿈이 부정되었고 - 그는 처음 이삭의 출생을 믿지 못했습니다 - 야곱의 계획도 처음엔 부정되었고, 요셉의 꿈 또한 부정되었으며 심지어는 예수님의 뜻조차 포기되었습니다.

둘째, 긍정하심을 통해서입니다. 

하늘의 아버지 뜻이 땅에서 아들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 모든 꿈이 다시 재편된 것입니다. 아니, 아예 원래부터 그렇게 설계가 된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 꿈의 진정한 의미를 삶의 부정하심을 통해 발견했고, 야곱이 받아낸 이스라엘이라는 꿈의 이름 역시 부정하심의 역사 속에서 그 심원한 의미를 깨닫습니다. 이 긍정하심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 정말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셋째,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야곱, 요셉, 다윗, 솔로몬, 그들 모든 개인적인 꿈들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 일체를 예수님의 몸, 삶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우리는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이 과정에서 그 분이 보여주신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처음 부정되었던 것도 (우리의) 믿음이었습니다. 두 번째 긍정하심도 (하나님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따라가려는 우리의 머나 먼 미래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꿈에 관한 전개 방식입니다.


에필로그 | 쪼갤 수도 섞을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꿈

따라서 그 꿈, 곧 그 유일한 선물은 어떠한 경우에도 쪼갤 수도, 섞을 수도, 그리고 바꿀 수도 없는 그 자체로서 가치입니다. 그 선물을 성령이라고 부르며(행 2;38), 폰티악 G-6나 뉴비틀즈 같이 환금(換金) 가치 이벤트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2012년 8월 19일 성령강림 후 제13주
본문, 왕상 8:41-43, (c.f. 1, 6, 10-11, 22-30).
 (c.f. 시 84; 엡 6:10-20; 요 6:5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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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에서2012. 7. 14.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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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대한 신앙적 진술>

하나님께서 오늘 새벽에 꿈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꿈에서 내가 스케이트를 받아 신고 탑니다. 그러나 앞으로 잘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얼음을 지치는데 날이 미끄러워 잘 지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스케이트 날을 만져보니 각각 반대쪽에는 날이 쓸 만한데..., 신발을 바꿔 신고 있습니다. (신발이 미끄러워 좌우를 바꿔 신어야 하는 것인지 좌우 신발을 바꿔 신어서 미끄러운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 부분에서는 의식이 돌아왔기 때문에.)

<꿈에 대한 신앙적 해석>
// 스포츠 중에 스케이트는 내가 유일하게 잘 할 수 있는 스포츠입니다. 빠르게 달리는 것보다는 아름답게 또는 박력 있게 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아이스하키 또는 피겨 스케이트를 선호합니다.
// 유리한 종목으로 잘 할 수 있지만 결정적으로 날이 미끄러운 것은, 그리고 그것을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속에서 스케이트 신발을 “좌우 바꿔 신었다.”고 확정한 것은 “순서가 바뀌었다”는 계시로 받아들입니다.
// 그 순서가 바뀐 대상은 바로 “기도”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 아무리 잘 하는 종목으로 한다 해도 기도로 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설명: 일어나자 마자 그린 그림. 꿈에는 명확하게 피겨였음. 좌우를 더욱 헷갈리게 하는 그것 피겨]


꿈은 과연 계시인가? 

<심리론>에서는, 꿈은 심리이지 계시일 수 없다. 융이 다소 신적 계시 가능성을 타진했다고는 하지만 신앙인들이 말하는 그 하나님을 염두에 둔 게 아니다. 


계시로서 꿈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고 봐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꿈은 전제의 산물 아니겠는가? 내가 스케이트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스케이트 꿈을 꾸겠으며, 그리고 그 날(blade)에 관한 경험이 없다면 어떻게 무딘 날이 전진하는데 있어 장애인 줄 알겠는가? 심지어 그 경험의 한계를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태고> 시절까지 소급해 확장해놓는다. <태고>의 경험으로도 부족한 전제 영역을 더 나아가 <신의 영역>으로까지 소급하여 열어 놓았던 것. 그것이 바로 융의 신론(神論)이다. (그러므로 신앙적 신 개념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전제로 그려질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전제를 “바꿔 놓으라(바꿔 신으라)”는 파라독스 명령자는 나를 넘어서는 영역이다. 꿈의 재료를 경험했던 “나”가 있다. 꿈을 지어낸 “나”가 따로 또 있다. 이 양자가 자기 나름대로 재료를 구성/재구성 하지만, 그 최종적인 결과물을 깨고 (반대로) 계시하는 계시자(revealer)로서 “나”가 완전히 별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가 ‘둘 이상’이라고 일러 두었던 것이다.

그러면 꿈은 그리스도인만 꾸느냐, 꿈으로 된 그런 계시는 불신자에게는 없느냐. 물론 그들에게도 그런 계시가 있다. (만물 가운데 신성이기에.)

다만, 그 계시가 진리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그 계시가 (자기가 미처 모르는) 무의식에 거치되었다 안되었다로 정합성이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씀을 받은 자인가 아닌가 라는 정점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르트가 말하기를, “제1의적 계시를 예수에,” “제2의적 계시를 성경,” “제3의적 계시를 설교에”인 것이다.

요셉의 꿈은 꿈이기 때문에 계시인 것이 아니라 그 꿈을 통해서 그가 그리스도의 길을 깔았기 때문에 계시인 것이며, 느부갓네살의 꿈도 그것이 그의 꿈일 때에 계시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길을 까는 다니엘이 해석을 내릴 때에 계시가 정립되는 이치라 하겠다.

그래서 이 스케이트 꿈에서 “바꿔 신었다”는 판단이 무의식이었는지 의식이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였다. 어차피 최종 계시로서 판단은 말씀(성경)을 받은 “나”가 하는 것이고, 모든 질료와 형식이 이 말씀으로 재편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꿈을 통한 계시로서 형식이며 여기서 지나는 것은 모두 상상력의 범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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