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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8.14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결혼의 텔로스 1
말씀 속에서2012. 8. 14.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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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스칼렛 오하라

스칼렛 오하라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당차고 강한 여성입니다. 그녀는 짝사랑 애슐리를 마음에 품은 채 총 세 번의 결혼을 합니다. 애슐리가 착하디착한 멜라니와 결혼했을 때 홧김에 자기 여동생 약혼자와 처음 결혼하고, 쓰러진 가업을 일으키려는 목적에서 동생의 또 다른 약혼자를 한 번 더 가로채 결혼합니다. 첫 남편은 이미 전쟁에서 죽었고, 이 둘째 남편 역시 아내 스칼렛의 명예를 지키려다 총에 맞아 죽습니다. 세 번째 결혼은 거부가 된 레트 버틀러와 합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짝사랑에 대한 망상을 못 버리는데 환멸을 느낀 그마저 떠나자 자신이 힘의 원천으로 믿는 타라 땅에서 꿋꿋이 홀로서기 한다는 내용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작가는 그녀의 패기를 칭송하지만 세 번의 결혼을 단지 땅을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는 그녀와는 구별된 몇 사람들이 이 책에서 목격됩니다. 전쟁 통에 온갖 희생을 다하다 죽는 멜라니, 그런 숭고한 인품을 흠모해 도우면서도 자신을 천하게 여기는 유곽 여인,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지도 않는 아내의 명예를 위해 죽은 두 번째 남편. 중심축을 당찬 그녀가 아닌 이들의 희생에 맞출 때, 흑인 생존권 투쟁을 진압한 백인들 잘못을 정당화했다는 이 책에 대한 비평은 옳다 하겠습니다.


프린서플 | 하나님을 모방하는 자 되라.

“하나님을 모방하는 자가 되라”(엡 5:1)고 번역해야 명확한데 대부분 “닮으라”든지 “따르라”는 번역이 대신하고 있는 이유는 현대적으로 모방이라는 말이 ‘위조’라는 의미로 전용되는 까닭일 것입니다. “닮으라,” “따르라”고 해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마치 도덕적 강령으로만 국한되어 들리기에 ‘모방’ 또는 ‘모방하는 자’의 진정한 의미전달이 될 수 없습니다. 모방은 일종의 행동 메커니즘으로 그 반복된 행위를 통해 그 모방 대상의 질료가 지닌 진정한 목적에 도달케 한다는 명확한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본문은 모방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그리고 모방의 내용은 ‘제물’과 ‘희생제물’이라고 말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첫째, 제물(offering)과 희생제물(sacrifice)은 다른 것입니다.

전자는 포괄적 예물로서 제물이지만 후자는 명확한 ‘희생’으로서 제물입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제물의 식물성과 동물성 차이로 설명될 수도 있습니다. 식물성, 동물성 제물의 차이는 경제력의 차이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전자는 한 해의 안녕과 소출의 풍요를 주로 기원하는 반면 후자는 죽음과 밀접하게 관계 맺어 죄와 직결된 사안을 제사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드러냅니다.

둘째, 오늘날의 제물과 희생제물은 달라져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곡물로도 동물로도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제물이 확연히 달라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질료의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형식의 변화가 온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대다수가 현재 곡물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통화(通貨)로 그것을 대신하고 있는 이 행위는 완전히 거짓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제물과 희생제물의 목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동물의 숨을 끊어 제사를 드리는 양식은 두렵고도 떨리는 <희생> 그 자체를 나타낸 데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동물의 희생보다도 월등한 희생을 마치신 ‘예수님의 희생’이 진정한 목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더 이상은 피의 제사를 하지 않도록 예배를 창설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드려야 할 그 희생 제물이 현대적 가치의 통화(通貨) 수단으로 대체되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분 피의 희생에 상응할 만한 우리 삶의 헌신이 반영되어야만 그 모방의 의무에 다가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에필로그 | 결혼의 텔로스

스칼렛 오하라의 세 번의 결혼이 오늘날 부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생산으로서 결혼의 텔로스에 응하지 않고, 토지를 소유하고 유지하려는 자기 텔로스에 결혼을 이용하는 것은 오늘날도 부도덕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여자>로서 추구했던 <모방> 행위는 자연적 생산이 아닌 인공적 생산 입니다.

스칼렛 오하라가 등장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이 되는 남북전쟁은 노예 인구의 90%가 몰려있던 남부 지역에 반해 절대 부족한 북쪽 지역의 노동인력 부족으로 발발한 전쟁이었음을 감안할 때, 스칼렛 오하라가 추구하는 미학 속에 억류당하고 있는 노예는 신분으로서 노예가 아니라 정당한 생산 활동에서 제외 당하는 노예라는 사실 역시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현대사회 속에서 숨쉬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빠지기 쉬운 <모방>의 기술은 자기 안녕과 풍요에만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소유와 성장의 정당성이 자아내는 미학 속에 자연적 생산이 함몰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인공적입니다. 하나님을 모방함에 있어 절대 질료인 희생(제물)이 빠져있기에 그렇습니다. 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마는 것들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2012년 8월 12일 성령강림 후 제11주
본문, 엡 4:31-5:2.
 (c.f. 삼하 18:5-9, 31-33; 시 130; 요 6:35, 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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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