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 속에서2012. 5. 27.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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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에게는 세 가지 오류가 있었다. (1) 살인한 오류. (2) 내가 아우 지키는 자냐고 반문한 오류. 그리고 (3) 자신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음성을 들은 오류. 이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세 번째로서, 결국 그것이 그의 후예를 골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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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 속에서2012. 5. 26.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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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댈수록 망쳐요-
적당할 때 손 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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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 속에서2012. 5. 2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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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동안 원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환상에 젖어 있었다. 사람이 착하면 얼마나 착할 수 있으며, 악하면 얼마나 악할 수 있겠는가...라는. 도덕주의자나 이상주의자도 아닌 주제에 이런 이상을 품었던 자체가 확실히 사치였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그런 이상주의적인 명제를 마련했던 근거는 이러하다. 사실, 내가 무척이나 선한 것 같지만 필경 나는 누군가의 악인일 것이며, 이처럼 도저히 선해 뵈지 않는 저 사람도 반대 저편에서는 누군가의 선인일 것이므로 사람에 대한 선악의 절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였다.
우습거나 무섭지 아니한가. 내 눈엔 지금 날 선하게 봐주는 이들만 눈에 띄지만 저 곳에선 난 악인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나는 나의 악인에 대해 여러 번에 걸쳐 선의로 보고자 마음 고쳐먹은 적이 있다. 내가 바보스러워서인지는 몰라도 그것은 실로 외식이 아닌 진심어린 회심(回心)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러나 이내 그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 후에도 나는 몇 차례를 ‘이번만 더... 이번 한번만 더...’하는 심정으로 그 저주스러운 ‘회심’를 거듭 시도했다. 그러다 또 후회에 젖어들고... 또 후회하고... 그 후에도 그런 허망한 짓이 몇 차례 더 시도되었다. 나는 그 신(神)이 아니므로 ‘차라리 나지 말았어야 할...’이란 저주문만은 채용치 못한다. 그러나 정녕...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이란 정말 존재하는가보다. ‘진실은 통하게 마련이라’는 어리석은 이상에 사로잡힌 모든 생각을 이제 접으려고 한다. 당신은 당신을 축복하는 이들의 축복을 많이 받으라. 넉넉함을 택하며 당신과 함께 하느니... 빈궁함을 받아들이고 당신과 원수를 맺기를 택하겠노라.
내가 분개하는 것은 나의 진실을 진실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농단하려드는 그대의 그 사악한 협잡과 사술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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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이 지난 지금 그 때의 악인(惡人)들은 어느새 내 곁의 선인(善人)이 되어 있으며, 그 때 내곁의 선인(善人)들은 더러 악인이 되어있다. 그렇기에 심판이란 악인이나 선인으로서 임하는 게 아니라, 그 때에 뱉었던 말들에 대한 심판이라고 일러두지 않았던가.

2001년 12월 8일자 텍스트 앞에서
나의 자아를 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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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 속에서2012. 5. 24.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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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생(life), 사(death), 화(cursing), 복(blessing)을 놓으셨다고 한다(신30:19). 선/악이라는 이원론에서 볼 때 생명과 복이 한 종으로 묶어지고 사망과 화는 그 반대가 되는 한 종이지만 여기서는 반드시 <생명> 택할 것을 명하고 있어 우리를 혼돈스럽게 한다.
이 말에 의하면 우리 만사는 생/사/화/복 넷으로 분류되게 마련이다. 사노라면 이들 네 분화점을 분간할 겨를이 없지만, 그래서 우리는 망각하고 살지만, 그래도 한 순간도 쉼 없이, 이들 넷은 우리 둘레를 늘 회전한다. 가령, 주일(일요일)에 교회 안 나가면 당장 죽는가? 지옥 가는가? (그런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여기서 패쓰-) 그렇지는 않다. 다만, 그는 사망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 다음 주에 또, 교회에 안가면 당장 죽는가? 지옥 가는가? 역시 그렇지는 않다. 다만, 또다시 (혹은 전보다 좀 더 쉽게) 사망을 선택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매 순간마다 생/사/화/복에 놓인다. 설령 생명 아닌 다른 것들을 택했더라도 그 시제 그 단계에 맞는 생/사/화/복이 또 깔린다는 원리다. 그렇다면 우린 지금 생명을 택하지 않고 내일 택해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근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오늘 생명을 택하지 않고 내일 택하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사실 그것은 전보다 더 낮은 확률 속에 진입한 것이므로 생명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오기는 전보다도 훨씬 어렵다. 반대로 오늘 생명을 택하면 내일은 생명으로의 택일 확률이 훨씬 높아지는 이치다.
문제는 “생명을 택하라” 함으로써 <복>도 그들 <죽음>과 <저주>에 묶어 대별했다는 데에 있다. 과연 우리 가운데 삶 속에서 생명과 복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론적으로는 안다 해도 매 순간 속에서 명백하게 생명을 차고 오를 자 몇이나 될까? 난 사실 이 본문이 선과 악을 이원화 한 게 아니라 생명과 복을 이원화했다는 사실에 심한 충격과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이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복은 복일뿐이고 생명만이 생명”이라는 말 아니겠는가?
에서가 비록 장자권을 팔아먹었지만 곧 거지가 되었는가. 여전히 야곱의 형이 아니던가. 하갈과 이스마엘도 이적을 보았다. 그 이적이 영원한 생명이던가. 가인은 타인이 해치 못하게 하는 놀라운 표를 자기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 그렇다고 그 표가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이었던가. 아..., 내가 오늘도 내게 일어나는 수많은 하나님의 표적을 보면서도 두려움에 떠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혹시 내 일생이 이미 가인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닌가? 차라리 하나님과의 교신이 아예 두절되면 좋으련만 내가 어느 자리에 섰든지 간에 생/사/화/복이 또 놓이는 바람에 그 교신은 여전히... 도대체 내가 와있는 곳은 어디쯤 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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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와있는 곳은 어디쯤 된단 말인가” 라고 말한 그 때는 내가 아버지를 잃은 지 1주년 되기 삼일 전이었고 지금은 그로부터 약 11년이 지났다.

나는 꼭 살아 있는 것만 같다. life.  


2001년 5월 5일자 텍스트 앞에서
나의 자아를 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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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 속에서2012. 5. 17.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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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군주들은 잔인하다기보다는 인자하다는 평가 받기를 원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인자함 역시 서투르게 사용하면 못 쓴다. 예컨대 체자레보르지아는 잔인한 인간으로 통했었다. 하지만 그의 잔인함은 로마니아 질서를 회복하고 그 지방을 통일하여 평화와 충성을 지키게 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 피렌쩨 시민들이 냉혹 무도하다는 악명을 듣지 않으려고 피스토이아의 붕괴를 막지 않던 것에 비하면 보르지아가 훨씬 더 자애로웠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군주는 자기 백성을 결속하고 이들이 충성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는 잔인하다는 악평쯤 조금도 개의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너무도 자애심이 깊어 오히려 혼란 상태를 초래하고 급기야는 살육이나 약탈을 횡행케 하는 그런 군주에 비하면 약간의 엄격한 시범을 보이는 군주 쪽이 결과적으로 훨씬 더 인자스럽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는 군주가 내리는 엄격한 재판이 개인을 다치는 데에 그치지만 전자의 경우는 사회 전체에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 <군주론(君主論)> 제 17장.
그 자신이 목자(牧者)가 되고 싶었던 것인지 군주(君主)가 되고 싶었던 것인지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 다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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