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 속에서2012. 9. 4.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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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충동과 영생에 대한 갈망은 다르면서도 같은 것이다. 

우선, 현재적 실존 세계로부터 이탈하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점에서 둘은 같고, 그리고 둘 은 죽음을 관통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도 같으며, 또한 모두 자발적이라는 점에서 같다.

마치, 나르시시즘이 나를 향하는 애착이며 이데올로기가 타인을 겨누는 집착이라는 점에서 다르지만, 둘은 그러한 ‘나’와 ‘타자’간의 모양과 크기를 측량함에 있어 오로지 ‘나’를 기준 삼는다는 점에서 동심축이 같아지는 원리를 구사한다. 

그것이 인생의 주기로 스며들어 처음에는 나를 중심으로 찾다가 나 아닌 타자를 찾는 과도기를 거쳐 결국에는 다시 ‘나’로 회귀하는 동선 속에 존재하기에, 그 주기가 죽음을 향해 그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렇게 멍청하게 웃기도 하고 떠들면서 순환적 착시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상반된 이데올로기와 나르시시즘이 나와 타자의 구별이 없는 상태로 복귀하려는 충동이듯, 타나토스(죽음)로의 충동은 세계와 하나 되려는 복귀 충동에 기원한다. 자살은 현실의 박해에서 비롯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이 영생에 이르려는 일종의 순교 장치이다.

 

그러나 교도소에서는 자살을 금한다. 징역형뿐만 아니라 사형 언도를 받은 죄수들, 다시 말해 곧 죽을 자들조차 자살은 할 수 없다. 이러한 그들의 죽음 금지는 그들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함인가 죽음을 보전하기 위함인가? “죽음 보전을 위해 죽음을 금하는 것”이라는 이 격한 파라독스를 무너뜨릴 수 없는 한, 우리는 여기서 명백한 두 개의 죽음을 본다. 내가 언도하는 죽음, 그리고 재판장이 언도한 죽음을.

언도된 죽음을 거부하는 자들이 타나토스 충동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동안, 그리스도 자신은 그 언도된 죽음과 자신의 죽음을 바꿔쳤다. 타나토스 충동이 아닌, 죽어서 영생하는 방법이 아닌, 죽지 않고 영생하는 길을 열어젖힌 것이다. 

따라서 자살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형기(刑期)를 면탈코자하는 심판주적 충동으로서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현실의 박해로 비롯되는 것처럼 가련하게 비쳐지는 이유는 그 타나토스 충동이 최후의 순간 순식간에 그것들을 분노와 연민으로 감추는 기술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분노와 연민으로 엉겨 붙어 분간할 수 없는 같은 두 개의 형식, 곧 자살과 순교를 이렇게 식별한다.

“순교는 타인에게 씌워진 죄를 벗겨내는 파라독스(paradox)가 있다면 자살은 타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파라독스가 있다.”(2009.5.28., 파라독소스넷)

자살의 충동과 영생에 대한 갈망이 다르지만 같은 것처럼, 자살과 순교는 같지만 이와 같이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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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