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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5.30 왜 소망 너머에 희망이 있는가 1
  2. 2012.07.09 두 종류의 믿음, 절망과 희망
말씀 속에서2013. 5. 30.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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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소망 Vs. 희망.


소망(所望)과 희망(希望)은 다른 말일까? 국내 개신교에서는 희망이라는 말 보다는 소망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공동체에서의 사용 빈도수도 그렇지만 성서번역에도 그러하다. 신약성서 기준으로 개역한글에서 48회 정도가 소망으로 번역되는 동안 희망은 단 한 번 쓰였고, 표준새번역에서는 소망이 45회 희망이 13회 채택되었다. 그리고 새번역의 소망은 45회이고 희망은 14회다. 공동번역만이 59회 모두 희망이라고 번역했고 소망은 단 한 건도 채택하지 않았다. (개역개정은 개역한글과 같다.) 


참고로 히틀러 치하의 유대인들을 도왔던 래지스탕스 출신 자끄엘륄은 소망과 희망을 구분해서 쓰는 학자다. 에스뻬랑스(espérance)와 에스쁘아(espoir)가 그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에 espérance를, 그리고 무의미한 현대인들의 기대를 espoir로 구별하는데, 그의 책을 번역하면서 관련 학회는 역시 긍정적 전자의 기대감을 ‘소망’으로, 후자는 ‘희망’으로 구별해 번역한 듯하다(c.f. 한국자끄엘륄협회 주).


아마도 그것은 한자로만 볼 때 앞의 ‘소(망)’는 공간적 목표점을 가르키는 뉘앙스가 강하지만 ‘희(망)’는 공간적 지형을 배제한 유토피아 뉘앙스가 강한 낱말로 판단해서인 것같다. 그러나 유토피아 utopia는 분명 “장소”(τοπος)라는 말에 “없다(ου)”라는 부정 접두가 붙은 말로서 실제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뜻하기에 “도달할 수 없는” 허구를 가르키는 현대적 허구와 부합할 수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강한 의지로 반영될 때 기대에 대한 강도는 전자보다 더 증가될 수 있다 하겠다. 즉 에스빼랑스가 되는 셈이다.


프린서플 | 왜 소망 너머에 희망이 있는가.


고대 희랍인들은 인간이 지닌 기대감의 종류를 ‘욕구’, ‘욕망’, ‘갈망’ 그리고 ‘희망’ 순으로 열거했다. 욕구(όρεξης)는 appetite(배고픔)이다. 갈망(επιθυμία, desire)은 wish 같은 것을 말한다. 그리고 욕망(θυμός)은 anger(분노)와 동의어다. 분노가 욕망인가? 분노는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유추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희망(βούλησης)이다. “will”, “의지”, “뜻”을 이르는 말이다. 나머지 셋은 모두 처음 것인 욕구를 가장 밑에 깔고 있다. 희망 역시 욕구의 일종인 셈이다. 하나의 공이 다른 공을 쳐내듯이 무절제한 경우 하나의 욕구는 다른 욕구를 넘어서는 차원에서의 희망이다.


그러나 희랍인들의 언어를 사용했던 신약성서 저자들은 이와 같이 ‘내다보고’ ‘기대하는’ 감정과 행위를 표현할 때, 이상 모든 낱말들과는 별개의 엘피스(ελπίς)라는 말을 채택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본문(롬 5:1-5)에서 희망을 산출하고 있는 방법을 묵상할 때 이해될 수 있다.  

환란은 인내를 산출한다.


초대교회의 환란은 물리적 박해에서 비롯되었다. 물리적 박해를 받는다고 정신이 편안한 것은 아니다. 물리적 고통은 당연히 정신적 고통도 수반한다. 그러나 정신적 고통은 그 물리적 환란이 두 번, 세 번... 계속되는 ‘반복’ 속에서 물리적 고통을 압도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정신이 처한 상태를 ‘인내’와동일 상태로 보는 것이다. 이로써 물리적 환란이 정신적 환란을, 정신적 환란이 인내를 산출한다.


인내는 연단을.


정신적 환란에서 산출된 인내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은 시간이다. 인내가 시간을 상실했을 때 그것은 굳는다. 다시 물리적 상태 즉, 인내가 견고함(steadfastness)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는 이유다. 이로써 최초의 환란은 연단이라는 제과정으로 완전히 탈바꿈 되어 이제는 새로운 것을 바라볼 준비를 완료하게 된다. 그래서 인내라는 말은 ‘증거’라는 말도 되는 것이며(고후 2:9), 연단이라는 말은 ‘체험’이라는 말로도 치환되는 것이다. 왜? 체험이 증거이고 증거가 체험이니까.


연단은 희망을.


소망, 희망에서 ‘소’와 ‘희’는 다르지만 ‘망’은 같다. ‘망’은 亡과 月과 王이 합쳐 된 말이다. ‘망함’과 ‘달’과 ‘왕’. 이 한자어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달’일 것이다. 주기적으로 새롭게 되는 달의 ‘새로움’은 유서 깊은 관조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달아나 버릴지라도 언제나 새로음이 싹트고 있는 것이다. 


에필로그 | 희망의 내용.


아이러니하게도 성서 저자가 채택한 엘피스(ελπίς)라는 단어는 좋은 것(good)뿐 아니라 나쁜 것(evil)에 대한 기대감이라는 뜻을 함께 갖고 있다. 왜 나쁜 것에 대한 기대감일까? 그리고 또 왜 그런 어정쩡한 단어를 채택했을까? 예컨대 엘피스는 호기심으로 상자를 연 판도라가 슬픔, 질병, 싸움, 고뇌 등 온갖 나쁜 것들이 튀어 나오는 바람에 절망의 늪에 빠져있을 때 가장 마지막으로 뒤늦게 올라온 것, 바로 그것이다. 그때 엘피스라는 단어를 썼다. Hope의 또 다른 희랍어인 블레세스(βούλησης)의 경우는 가장 밑바닥에 욕구를 깔고 있지만 엘피스는 그 자신이 가장 밑에, 가장 마지막 순서로 깔려있다. 엘피스는 언제나 그러하다. 누구에게나 미래는 판도라다. ‘pan’은 ‘모든’이며, ‘dora’는 ‘선물’이다. 모든 선물. 슬픔, 질병, 싸움, 고뇌, 우리는 고를 수 없다. 다만 가장 마지막에 엘피스가 깔려 있다.


그래서 환란, 인내, 연단, 희망 순인 것이다. 이것이 엘피스라는 희망이 두려움이라는 의미를 갖는 이유이며, 신약성서 저자가 엘피스를 채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아울러 본문 v.5에서는 그 희망의 궁극적 내용을 말하고 있다. 바로 “성령으로 사랑을 부어주셨다”는 내용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 곧 엘피스인 것이다. 


* 그런 점에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 이라는 말을 믿음과 소망 보다 나은 것이 사랑이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은 넌센스다. 가장 마지막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미지 참조:

www.historyforkid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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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7. 9.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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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마지막 잎새

워싱턴 광장 옆 그리치니라는 주택가는 집값이 싸 화가 촌이 자리 잡은 곳입니다. 어느 해 겨울 그곳에 폐렴이 나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습니다. 몸 쇠약한 화가 존지도 이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쇠잔한 그녀는 창밖의 담쟁이를 바라보며 그 잎들이 모두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자신의 생명도 꺼져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녀가 겨울을 넘기기 어렵다는 의사의 말을 그녀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친구 수우는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병간호 하느라 의뢰받은 그림을 기간 내에 그릴 수 없던 차 수우는 아래층 화가 노인 베어먼을 모델로 청하면서 그에게 존지 이야기를 건넵니다. 명색만 화가였지 별 볼일 없는 그 노인 역시 병약한 그녀의 망상을 꾸짖습니다.
단풍잎들이 하루하루 떨어져 드디어 마지막 한 개가 남았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병마와 싸우는 마지막 고비의 긴 밤을 넘긴 존지는 다음 날 밖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여전히 한 개만은 지지 않고 있던 것입니다. 곧이어 베어먼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풍잎이 질 것이라고 말한 그날 그가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담벼락에 잎을 그려놓았던 사실도 알게 됩니다.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희망과 절망.

사용자 삽입 이미지

프린서플 | 두 종류의 믿음

반도(半島) 특성상 1,000여 회에 가까운 외세침입을 받아 왔던 우리나라만큼이나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인들 역시 바람 잘 날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크게 다섯 제국으로부터 - 앗수르 제국(지금의 이라크 북쪽지역), 바벨론 제국(이라크 남부), 페르시아(이란), 헬라(희랍 중심), 그리고 로마 제국 - 침탈을 겪습니다.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에 그들이 시도했던 문화 삭제의 잔상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성서적 이스라엘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이 성서만큼 미치지 못하는 현상은 그들의 오랜 침탈 기간을 반증하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역사에서 삭제된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 처했던 그들을 다시 살려낸 건 어디까지나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상황 속에서 믿음은 두 가지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희망’이라는 형식입니다.

패망하여 나라도, 가정도, 성전도 모두 파괴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그 모든 것들이 무산되어 버렸는데도 몇몇은 그 상황을 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당초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약속들이 진정 무엇을 의미했던 것인지를 거듭 묵상하고, 또 그 묵상을 통해 반성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믿음 즉 ‘희망’을 발견하고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둘째는 ‘절망’이라는 형식입니다.

모두가 희망을 선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쇠락해가는 상황을 바라보며 하나, 둘...., 무너져 내리는 낙엽의 개수를 세는 듯한 믿음도 있었습니다. 마치 그 잎새들, 특히 마지막 잎새가 살아남기를 바라는 희망처럼 마음에 깃들지만 명확하게도 그것은 ‘절망’입니다. 저 잎들이 다 떨어져버리고 나면 “난 더 이상 살지 않겠노라.”는 <시한부 신념>을 기저로 갖기 때문입니다. 신념은 체념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시한이 지나면 산화해버리고 맙니다.

셋째, ‘없어지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없어질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깨뜨리거나 부술 수 있는 게 아니며, 녹이거나 불처럼 끌 수 없는 독특한 형식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없어질 것’들은 애당초 믿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에필로그 | 절망이라는 믿음의 형식이 아닌 희망이라는 믿음의 형식으로 

우리나라가 이 시대에 쓰임 받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과 같이 우리 민족의 믿음을 보신 것이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또한 여러 번 없어졌던 나라였는데도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 것은 다 그 믿음의 덕택입니다. 많던 잎사귀들이 하나 둘 떨어져나가듯이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하나, 둘..., 사라져갔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야고보, 다대오,... 바울도 죽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친 믿음이 여전히 우리 속에서 살아 숨 쉽니다. 이 믿음의 형식에서 바로 영생의 개념이 산출된 것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7월 8일 성령강림 후 제6주
본문, 고후 1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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