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4.01.19 수고를 헛되지 않게 하는 것
  2. 2012.07.09 두 종류의 믿음, 절망과 희망
말씀 속에서2014. 1. 19.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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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사 49:1-3)

이와 같이 한껏 용기를 북돋는 선포를 받고도 이스라엘의 응답은 다음과 같다.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사 49:4)


이러한 소회는 구원의 위업을 달성했음에도 간혹 침륜에 빠질 수밖에 없는 우리 신앙 일상과 닮았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어떤 목적(물)이 좌절 되었을 때에 주로 그렇지만 진정한 불행의 인식은 자신이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를 때에 심화되게 마련이다. 


불행은 어떤 한 사물이나 사람, 혹은 환경으로 인해 닥치는 ‘요인’이지만 그것이 오래 지속되거나 중복될 때 우리는 인식의 미아가 되고 그렇게 되고나면, 앞서 좌절의 그 원인은 사라지고 ‘불행’이라는 상태만 남는 원리이다. 


즉 자신의 시작, 중간, 끝, 이들 세 매듭을 놓친 것입니다.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회개이다. 회개는 우리가 잠긴 인식의 마비를 깰 수 있는 유일한 방법 - 그것이 첫 번째 관문이라는 점에서 - 이다. 회개는 일종의 급전(unexpected)이기 때문이다. 돌이킴이기 때문이다. 시작과 중간과 끝의 방향감각이 없어 인식의 미아가 된 상태에서 방향감각을 무엇으로 복원할 수 있겠는가? 돌이킴 아니겠는가


다음은 창조이다. 여기서 말하는 창조는 과학에서 말하는 식의 창조가 아니라 - 지구과학, 생물학 같은 - 모태의 기억으로서 창조를 말한다. 예컨대 어머니의 태중에서 안락함이나, 어머니 품속에서의 안락함은 같은 것이다. 또 성인이 되어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을 때의 안락함도 같은 회복력이다. 이러한 원리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태어나기도 전부터 “알았다”, “지으셨다”는 사실의 인식으로써 안락할 수 있는 것이며, 그 때 비로소 좌절을 철회할 힘도 생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기원을 인식해냄으로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 원리이다. 



에필로그 |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난(begotten) 사람일 때 가능한 얘기이다.



[* 포인트: 우리의 침륜이 회복될 때 아무것으로나 회복하는 게 아니라 <창조>로 회복해야 하는 당위성에 관한-]


2014.1.19일자 | 수고를 헛되지 않게 하는 것. | 사 49:1-7, (cf. 시 40:1-11;  고전 1:1-9; 요 1:2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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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
말씀 속에서2012. 7. 9.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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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마지막 잎새

워싱턴 광장 옆 그리치니라는 주택가는 집값이 싸 화가 촌이 자리 잡은 곳입니다. 어느 해 겨울 그곳에 폐렴이 나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습니다. 몸 쇠약한 화가 존지도 이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쇠잔한 그녀는 창밖의 담쟁이를 바라보며 그 잎들이 모두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자신의 생명도 꺼져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녀가 겨울을 넘기기 어렵다는 의사의 말을 그녀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친구 수우는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병간호 하느라 의뢰받은 그림을 기간 내에 그릴 수 없던 차 수우는 아래층 화가 노인 베어먼을 모델로 청하면서 그에게 존지 이야기를 건넵니다. 명색만 화가였지 별 볼일 없는 그 노인 역시 병약한 그녀의 망상을 꾸짖습니다.
단풍잎들이 하루하루 떨어져 드디어 마지막 한 개가 남았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병마와 싸우는 마지막 고비의 긴 밤을 넘긴 존지는 다음 날 밖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여전히 한 개만은 지지 않고 있던 것입니다. 곧이어 베어먼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풍잎이 질 것이라고 말한 그날 그가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담벼락에 잎을 그려놓았던 사실도 알게 됩니다.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희망과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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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두 종류의 믿음

반도(半島) 특성상 1,000여 회에 가까운 외세침입을 받아 왔던 우리나라만큼이나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인들 역시 바람 잘 날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크게 다섯 제국으로부터 - 앗수르 제국(지금의 이라크 북쪽지역), 바벨론 제국(이라크 남부), 페르시아(이란), 헬라(희랍 중심), 그리고 로마 제국 - 침탈을 겪습니다.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에 그들이 시도했던 문화 삭제의 잔상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성서적 이스라엘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이 성서만큼 미치지 못하는 현상은 그들의 오랜 침탈 기간을 반증하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역사에서 삭제된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 처했던 그들을 다시 살려낸 건 어디까지나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상황 속에서 믿음은 두 가지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희망’이라는 형식입니다.

패망하여 나라도, 가정도, 성전도 모두 파괴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그 모든 것들이 무산되어 버렸는데도 몇몇은 그 상황을 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당초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약속들이 진정 무엇을 의미했던 것인지를 거듭 묵상하고, 또 그 묵상을 통해 반성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믿음 즉 ‘희망’을 발견하고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둘째는 ‘절망’이라는 형식입니다.

모두가 희망을 선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쇠락해가는 상황을 바라보며 하나, 둘...., 무너져 내리는 낙엽의 개수를 세는 듯한 믿음도 있었습니다. 마치 그 잎새들, 특히 마지막 잎새가 살아남기를 바라는 희망처럼 마음에 깃들지만 명확하게도 그것은 ‘절망’입니다. 저 잎들이 다 떨어져버리고 나면 “난 더 이상 살지 않겠노라.”는 <시한부 신념>을 기저로 갖기 때문입니다. 신념은 체념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시한이 지나면 산화해버리고 맙니다.

셋째, ‘없어지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없어질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깨뜨리거나 부술 수 있는 게 아니며, 녹이거나 불처럼 끌 수 없는 독특한 형식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없어질 것’들은 애당초 믿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에필로그 | 절망이라는 믿음의 형식이 아닌 희망이라는 믿음의 형식으로 

우리나라가 이 시대에 쓰임 받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과 같이 우리 민족의 믿음을 보신 것이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또한 여러 번 없어졌던 나라였는데도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 것은 다 그 믿음의 덕택입니다. 많던 잎사귀들이 하나 둘 떨어져나가듯이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하나, 둘..., 사라져갔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야고보, 다대오,... 바울도 죽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친 믿음이 여전히 우리 속에서 살아 숨 쉽니다. 이 믿음의 형식에서 바로 영생의 개념이 산출된 것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7월 8일 성령강림 후 제6주
본문, 고후 1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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