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으로'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03.24 열심이라는 장르에 관하여
  2. 2012.08.28 믿음의 기원, 칼 바르트가 말하는 로마서 주제
말씀 속에서2013. 3. 24.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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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스토커들

◎ 운전하다 차선을 바꿔가며 천천히 가는 앞차에 바짝 달라붙어서는 빨리 가라고 재촉하고, 일부러 갑자기 끼어들다 급기야 운전자끼리 고성이 오간다. 상대방이 사과하지 않자 화가나 아예 자신의 행선지를 포기하고 그 차를 추격한다. 신호등이 켜졌을 때 차에서 내려 창문을 막 두드리면서 욕설을 한다. 쫓기는 운전자는 저러다가 말겠지 했는데 계속 쫓아온다. 공포를 느끼게 만든다. 단순집착형 스토커다. ◎ 어떤 미남 가수를 좋아하던 10대 열성 팬이 그 가수와 스캔들이 난 여성 가수에게 혈서를 보냈다. “죽여 버리겠다, 오빤 내꺼다, 우리 오빠 건들지 마라!” 그 편지봉투에는 잘게 조각난 면도칼이 함께 들어있었다. 이 팬은 진정으로 그를 사랑한다. 자기는 그와 운명으로 맺어진 관계인데 그가 그걸 못깨닫고 있어 안타깝다고 한다. 앞서 운전자보다 좀더 심각한 망상형이다. ◎ 매력 넘치는 A는 인기가 많아 남자가 줄을 선다. 그 중 하나가 B다. 점점 B가 별로였던 그녀는 그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다 선 본 남자와 결혼 약속을 하고는 B 문제를 매듭지으려고 결혼 사실을 알렸다. B는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만나자고 해서 싫다고 했더니 약혼자랑 같이 나와서 담판을 짓자고 해 하는 수 없이 약혼자에게 얘기 했다. “가자 해결해줄게-” 했지만 그날 차가 막혀 약혼자가 조금 늦었다. B는 그 사이 A를 잡아끌고 “너를 사랑하는 건 나 밖에 없다. 그 놈 안온다”며 고함을 질러댔다. 여자가 몸부림 치니 머리채를 휘어잡고 골목에 있는 모텔 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약혼자가 이 광경을 보고 차에서 뛰어 내려 B에게 한방 날렸는데 그가 쓰러지면서 보도 블럭에 머리를 부딪혀 즉사하고 만다. 약혼자는 졸지에 살인범이 된 것이다. 세 이야기 모두 같기도 다르기도 하지만 특별히 마지막 것은 열심있는 사랑에서 사랑 빠지고 열심만 남아 질투와 분노로 돌변한 예였다

프린서플 | 바울의 오직 믿음으로

빌립보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빌립이 세웠고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도시입니다. 이 지역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직접 설립한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 사람들이 바울이 투옥된 소식을 듣자마자 뭔가 필요를 챙겨 보냈던 것같으며(c.f. 1:5; 4:10-19), 이 서신은 그것에 대한 감사의 글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다른 서신서들이 그렇듯 유대교 신앙의 그릇된 행위를 강하게 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로마서를 함께 가르며 지나가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신앙을 확립하는 중요한 문맥의 구간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그 ‘오직 믿음’에 반한, 배설물로 간주되는 것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할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매우 중요한 행위이자 표식이었습니다. 일종의 구원의 징표일 뿐만 아니라 거룩한 신분과 속된 신분을 가르는 경계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에서 선택받은 민족은 이스라엘뿐입니다. 그 이스라엘의 정식 회원으로의 가입은 할례로서 되는 것이었습다. 그런데 이러한 신분적 징표를 버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

베냐민 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막내이지만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될 당시 다윗 왕을 배출하는 가문인 유다와 함께 잔존했던 유일한 지파 였습니다. 다윗 왕에 앞서 이스라엘의 첫 군주 사울을 배출한 지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명망있는 족보도 버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이스라엘과 히브리인은 어떻게 다른가. 헬레니즘 시대 당시 디아스포라 내에는 유대교로 개종해 들어오는 구성원들이 있었습니다. (할례를 통해 개종합니다.) 즉 자신은 중간에 개종해 들어온 이스라엘 족속이 아닌 순수혈통으로서 히브리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순혈도 버리는 것입니다.  


바리새인.

바리새 운동은 헬라의 강대국에 신앙적 주권까지 빼앗긴 상황에서 신앙을 존속시켜준 평신도 정신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이단으로 간주되었던 그리스도교의 교회를 철저하게 핍박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준수했던 것입니다. 그것 또한 버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필로그 | 열심

모든 것은 버렸지만 하나는 남아 있었던 것같습니다. 바로 열심. 즉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칫 열심히 사랑 하다가 분노와 앙갚음으로 변하게 마련인데, 바울은 반대로 분노와 앙갚음에서 사랑의 ‘열심’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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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
단상 속에서2012. 8. 28.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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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가 말하는 로마서 주제:

“스스로가 두려워할 줄 알고 희망 걸 줄 앎으로 그 스스로 심판대 아래 엎드리는 자를 구원할 다른 의(義)는 없다. 그는 살 것이다. 그는 이생의 헛됨을 깨닫고 있기에, 썩어가는 가운데 썩지 않을 것에 대한 기대 없이는 결코 가망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에, 참된 삶의 기대 없이는 결코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에, 그는 바로 그 참된 삶의 기대를 가지는 것이다. 그 위대한 가능성이 그에게 그 모든 하찮은 가능성의 끝과 목적을 일러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한결같음이라고 말하든지 사람의 믿음이라고 말하든지 그 둘은 같은 것이다. 예언자의 언어들은 이미 이 쌍방향 포인트를 지적해왔다. 즉, 예언자들의 “No”라는 말들 속에서 도망칠 수 없이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하나님의 한결같으심이다. 하나님 거룩한 그분 한분, 곧 그 모든 나머지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만나게 되는, 그 “No”를 단정하는 이들의 경외심과 또 그 부정 속에서의 공허함(void), 꿈틀거림(move), 지체됨(tarry)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의 경외감 안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믿음”이다. 하나님의 한결같으심(faithfulness)과 사람들의 충실함(fidelity)이 부딪히는 - 부정적 의미의 부딪힘 - 그곳에 그분의 의(義)가 나타나 있다. 그곳이 의인이 사는 곳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의 주제이다.”

이것은 로마서 1:17에 있는 하박국 2:4,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합 2:4)를 칼 바르트가 주석 한 것입니다.

이 문단을 번역하다 보면, 우리가 배워온 칭의론과 많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 바르트의 구원론을 오해들을 해서 각자 따다 붙여 쓰는 것같지만서도-,

우리가 배워온 칭의와 다른 점은 이미 (구원 받을) 그 사람은 준비된 자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심판대 아래 스스로 세팅해 설 줄 알아야 하고, 부패 속에서 썩지 않으려고 하고...etc..., 그런 기대감으로 이미 상당한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예수 이름으로 무조건, 완전 무조건, 구원 받는 교리와 차이를 보이죠? 그러나 칼 바르트의 이 주석은 그런 칭의에 반하는 주석이 아닙니다.

의가 (1) “있다”도 아니고, (2) “나타났다”도 아니고, (3)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1)은 원래부터 완성되어 있는 것을 말하고, (2)는 난데없이 갑자기 나타난 걸 말하고, (3)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바르트의 주장은 (3)항에 해당해 보입니다. 

칼 바르트는 말합니다. 예언자들이 줄기차게 외쳐대는 “No”라는 언어 속에 하나님의 미쁘심, 한결같으심, 충실하심이 있다. ‘이것이 <믿음의 기원>이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지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God the Holy One, the altogether Other.” 라는 댓구를 “하나님 거룩한 그분 한분, 곧 그 모든 나머지인 것이다.”라고 밖에 번역할 수 없었는데, 이 알아듣기 어려운 댓구는, 결국,

 “하나님의 모든 <No>라는 응답은 사실상 단 한 개의 <Yes>인 것이며, 또한 그 모든 <Yes>라는 응답 속에는 <No>라는 단 한 개의 하나님 응답이 들어 있다”

라는 파라독스 속에서 이해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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