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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7.16 야웨의 궤(櫃)의 행방 1
말씀 속에서2012. 7. 16.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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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인디아나존스: 잃어버린 성궤

1981년 <인디아나존스: 잃어버린 성궤>가 발표된 이후 성궤의 실존에 관심이 고조된 적이 되었습니다. 이미 1913년 성궤를 찾아 떠난 고고학자가 존재했던 사실이 이 영화로 재고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료 속에서 “성궤는 이스라엘에서 이집트로 옮겨졌다”는 단서를 잡고 카이로에 거처를 잡은 그는 기록을 탐독하던 중 성궤 운반 시간대를 대조해 “성스러운 금괴는 시오니 제국(현재 에티오피아)으로 옮겨졌다”는 문장을 찾아내 에티오피아까지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는 대학 친구에게 보낸 1919년9월13일자 편지를 마지막으로 행방불명됩니다. 친구는 그를 찾아 에티오피아까지 와서 ‘악섬’이라는 지역에서 에티오피아 정규군 복장이 아닌 이상한 복장에 창을 든 경비병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악섬의 지도자로부터 “네 친구는 성스러운 곳을 들어갔다가 천벌을 받아 죽었다.” 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는 친구의 시신 수습을 위해 한 지하교회를 찾아갔다가 그곳서 ‘천벌을 받아 죽었다’는 수많은 유골들과 함께 구부린 채 죽어있던 자기 친구를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실제로 솔로몬 왕으로부터 위임 받았던 성궤가 악섬의 20여개의 지하교회들 중 어딘가 한 곳에 숨겨져 있다는 비밀을 전해 듣게 됩니다. 여러 분은 이 이야기를 믿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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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야웨의 궤(櫃)   

본문에서는 다윗이 매우 위험천만한 일 하나를 시도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지금까지 모든 신앙의 초점이었던 ‘하나님의 궤’를 특정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작업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작업 도중에 그만 웃사라는 사람이 부주의로 죽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이 사건 속에서 우리는 이 성궤에 얽힌 다음 세 가지를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성궤(법궤)를 중심한 신앙은 터부인가 믿음인가.

성궤는 요단강 강물을 끊는 능력이 있었습니다(수 3:13). 뿐만 아니라 여리고라는 철옹성을 함락시키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수 6:16). 그리고 엘리 제사장 말기에 가서는 이 성궤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적이 있는데, 당시 성궤 스스로가 그들의 우상의 머리와 손목을 끊고 그 스스로가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기이한 힘을 보여준 바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비롭고 신성한 힘의 근원이 과연 터부 신앙에 반응하는 것인지 아니면 믿음 신앙에 반응하는 것인지, 이것이 이 본문이 갖는 핵심입니다.

둘째, 성궤로 인한 저주가 복으로 바뀌는 시점은 언제인가. 

성궤를 이동 시키다가 발생한 불상사로 겁을 먹은 다윗은 그것을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에 두게 했습니다. 오벧에돔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왜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을까? 웃사는 만졌기 때문에 저주 받았고 오벧에돔 은 만지지 않았기 때문에 복 받은 것일까? 웃사는 단지 뛰는 소 때문에 궤가 떨어질까 봐 붙든 것뿐인데 왜 그는 죽고 오벧에돔은 복을 받았을까? 물론 ‘웃사는 죄 있었고 오벧에돔에게는 없었고’ 라는 식이면 그만이겠지만, 오히려 오벧에돔이 정통 레위지파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관심해야 할 중요점은, 하나님께서 성궤가 그 집에 머무는 동안 전혀 저주가 없었고 도리어 복 받은 것으로 타인의 이목에도 띄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즉, 오벧에돔 집에 머무는 동안 성궤에 대한 터부가 해제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터부의 완전한 해제는 다윗이 그 궤 앞에서 하체를 드러내고 춤 춰도 (웃사처럼) 급사하지 않는 담대함의 예배로 드러납니다. 이를 질타하는 미갈이 오히려 터부에 걸립니다. 그리고 다윗의 그 시도적인 찬양과 오벧에돔의 직책이 다름 아닌 찬양이었다는 사실은 이 성궤의 터부 해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예배가 갖는 의미입니다.

셋째, 성궤의 행방은 어디로 갔는가.

오벧에돔이 석 달간 받은 복은 석 달로만 끝나지는 않았던 것같습니다. 세례 요한의 목을 친 헤롯 왕이 에돔의 자손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그 복은 나름대로 유구했던 것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복이 복의 재생산으로 이어지는 지 아니면 새로운 터부로 재생산 되는 지, 그 지점에 성궤의 행방이 감춰져있다 하겠습니다. 바로 여기에 다윗이 받아낸 약속의 영원함, 곧 성궤의 행방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에필로그 | 어디에도 없다는 어디에든지 있다

성궤는 영어로 the Ark입니다. 노아의 방주도 Ark라고 부릅니다. 구별된 에덴동산도 일종의 Ark였습니다. 솔로몬 성전도 Ark일 수 있습니다. 성전 되신 예수님의 몸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에덴동산도 성전도, 예수님의 육체도 또 그의 무덤도, 그리고 성궤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디에도 없다는 말은 어디든지 있다는 개념으로 치환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흑암 속에서 빛으로 틈을 벌린 이 지구도 일종의 알, 즉 Ark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지구를 성궤로 인정하지 않는 이치에서 그 성궤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7월 15일 성령강림 후 제7주
본문, 삼상 6: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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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