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2.06.18 영화 <프로메테우스>에 등장하는 하나님들
  2. 2012.06.11 참 목자상
말씀 속에서2012. 6. 18.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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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프로메테우스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조물주를 만나봐야겠어. 만들어 놓고 대체 왜 파괴하려는지...,” 

이런 반신(反神)적 다이얼로그에 기인해 반기독교 이야기로 규정받기도 하지만, 그 말은 어떤 면에서 이 세상 환경들로부터 우리 인간들이 들어야 하는 목소리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어낼 수 없는 환경을 우리가 만들어낸 것으로써 상당부분 파괴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 파괴는 물과 공기와 토양뿐 아니라 생명 패턴에까지도 미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이미 그들의 조물주인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이름 짓는 권능이 그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진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면 모든 언어의 궁극점인 ‘이름,’ 즉 그 존재들이 사는 집(세계)인 그 ‘이름’을 짓는 능력은 이미 조물주에 상응한 권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로써 단지 “이름을 짓도록 하셨다”는 행위에서 그 깊으신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이며(시 92:5), 반면 “왜 만들어 놓고 파괴하려느냐”라는 어떤 이들의 소리를 통해서는 그 얄팍한 마음 됨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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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잘 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만들어 놓고 파괴하는 분이 아니라 “잘 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역사 모델로 합니다. 한 가정으로 출발해 국가의 형성과 성장 그리고 쇠락과 패망의 역사과정뿐 아니라 그 너머에 재건에까지 이르는 흥망성쇠의 장구한 ‘반복’을 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지파동맹에서 왕정 단계로 들어서는 대목은 그 역사를 감싸고 계시는 하나님 손길의 의도를 읽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청원 할 때 청원의 직접 대상은 마지막 사사 사무엘이고 하나님은 최종 결정권자였습니다. 사무엘은 왕의 제도를 좋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최고 실력자였던 사무엘이 자신의 일가가 누리는 절대 지위를 놓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내 그의 태도는 우리를 혼돈스럽게 만듭니다. 왕의 청원을 반려하고 싶어 하면서도 왕을 엄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제도를 ‘기피한다,’ ‘선호한다’라는 관점 보다는 백성들이 처한 모든 환경 속에서 항상 새로운 기대를 놓지 않으시고 복을 주신다는 그분의 속성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을 세워주셨습니다(삼상 10:24; 11:14).

왕의 제도를 반대했기에 이후에 쳐다보지도 않으셨던 게 아니라 합당한 인물이 그 자리를 맡을 수 있도록 엄선하시고, 그리고 기쁨으로 그 환경을 새롭게 열어주십니다. 왕이 되기 전의 사울은 수줍을 정도의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된 이후 그 위치를 감당하기에 몇 가지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세상 관점에서는 그만한 리더가 없을 것입니다. 체격과 그리고 용맹함, 그는 전사답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다 죽습니다. 그에게서 기름부음이 떠난 건 어디까지나 신앙적 문제 때문입니다.

다윗 왕을 세워주셨습니다(삼상 15:34-16:1).

사울이 지도자로서 실격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때에도 왕의 제도 자체를 둘러엎으시고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좋은 제도/환경이 될 수 있도록 일하십니다. 사무엘은 다윗이 소년일 때에 기름을 부어 예비시킵니다. 다윗은 시상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 깊은 시상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중요한 연관을 맺게 됩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미완의 삶으로 다음 세대를 맞습니다.

솔로몬을 세워주셨습니다(삼하 12:25).

솔로몬의 왕 됨은 자연스런 ‘세습’ 같지만 많은 역경을 거쳐서 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력 이전에, 앞서 모든 왕들에게 그러했듯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는 그 어떤 한 부분이 그에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왕이 된 후 재물과 복수가 아닌 지혜를 구하는 한 장면으로 압축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여디디아, 그는 하나님에게 사랑받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도 쇠락을 걷습니다.


에필로그 | 새로움의 하나님

이는 ‘모든 인생은 쇠락할 수밖에 없구나’를 가르치는 내용이 아닙니다. (1) 이미 예고된 왕의 제도가 지닌 속성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의 새로움/회복을 노력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3) 우리 자신의 장점을 쇠락시켜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우리는 언제나 그 새로움을 파괴해왔다는 점에서 우리 스스로가 파괴를 일삼는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6월17일 성령강림 후 제3주
본문, 고후 5: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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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 6. 11.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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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려는 계획을 이미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려는 뜻으로 간주하셨다(삼상 8:6-9). 게다가 왕의 제도를 요구한 것은 사실상 사무엘 일가의 세습을 반대하는 요구에 기반하기 때문에(8:5) 사무엘 입장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된 재앙이라도 내렸으면 체면도 세우고 좋았을 법하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한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우리는 여기서 참 목자상을 발견한다.

화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화목 시키는 사무엘상(像).
그리고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상.

그러나 우리는 이것만 가르치고 배워왔다.
어차피 당연히 망할 수밖에 없는 “사울,”
어차피 당연히 이길 수밖에 없는 “다윗,”
무시무시한 순종을 요구하는 “사무엘,”
끝으로,
다윗과 사무엘과, 그리고 내 편만 드는 “하나님.”

위의 본문이(삼상 11:14-15) 성서가 말하는 “새로움”의 모체 중 하나이며,
흔히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부여하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란 칭호에 대한
모상(模像)이기도 하다.

“새로움”은 화해 속에만 존재한다.
화해 밖에 있는 것은 새로움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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