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2.06.25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 방법에 관하여
  2. 2012.06.01 공학적 신앙
말씀 속에서2012. 6. 2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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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4전5기

70-80년대에는 권투가 정말 인기가 많았습니다. 세계타이틀이 걸린 경기가 있는 날이면 아빠들은 일찍 집에 들어오시거나 늦게 늦게 아예 밤새고 오시거나-ㅎ. 2002년 월드컵 당시 열기가 엄청났다고들 하는데 옛날엔 큰 경기 있는 주말엔 항상 그렇게 열기가 넘쳤습니다. 1977년 TBC라는 방송국에서 대단한 경기가 열렸습니다. 우리나라 홍수환 선수와 카라스키야 라는 선수의 경기입니다. 괴물로 알려진 카라스키야의 무쇠펀치는 예상대로 홍수환 선수 얼굴을 때렸고 연거푸 다운되었습니다. 너무 쓰러진 나머지 이젠 주심이 선수의 눈을 보며 그 의지를 읽어 경기를 이어갑니다. 2라운드에 가서는 무려 네 번이나 쓰러집니다. 3라운드가 시작되었을 때 갑자기 홍수환 선수가 상대를 무섭게 몰아쳐 로프로 몰아가더니 비스듬히 누워있는 상대 선수의 턱에 강력한 펀치 한방을 날려 다운을 시킵니다. 경기는 끝났고 홍수환 선수는 다시 세계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카라스키야 선수가 더 셌는데도 불구하고 운이 없어 졌다고 기억하지 않습니다. 홍수환 선수가 4번 쓰러졌다가 5번째에 이겼다는 사실 그 하나만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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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 방법

어떤 성서신학 학자는 예수님의 기적(이적)들을 몇 가지 형태로 분류를 해놓았습니다. 치유기적, 귀신축출 기적, 규범 기적(penal miracle), 선물 기적, 구조 기적, 현현 기적, 자연 기적 하는 식입니다. 이 모든 기적은 오늘날 이 시대에도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 누구에게 그런 기적이 일어나는가 하는 점입니다. 다음 사항들을 유념합시다.

첫째, 하나님의 기적은 과학이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우선 우리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기적들이 기적인 이유는 자연과학의 법칙을 초월한다는데 그 전제가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일반적인 자연현상은 기적으로 분류하질 않으며, 과학/상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을 주로 기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적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과학이 그 전제의 노릇을 하는 까닭에 그 기적 자체보다는 그 과학적 사고가 기적을 주도하고 있다는 모순인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기적은 그 모든 사상과 이론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과학만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성과 사상과 이론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된 그 진정한 기적을 만났을 때에는 과학적 상식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 이성과 사상으로서 그 모든 체계가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기적에는 보편성과 개연성이 있습니다.

만약 큰 중병이 걸린 어떤 사람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가만히 누워 있다가 느닷없이 낫게 된 것을 치유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어떤 잘 먹고 잘 살던 사람이 느닷없이 복권에 당첨된 것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울부짖는 자가 하나님의 기적을 만나는 것이며, 그 간절한 그 무엇들을 우리는 ‘보편성’과 ‘개연성’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기적은 쑈가 아닌 과정으로서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간절한 간구의 과정에서 보편타당한 그 은택을 누렸다면 그 기적은 하나의 ‘초월 현상’으로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은택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구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데에 본질이 있습니다. 쑈로서 존재하는 그 모든 기적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임을 단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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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자라나는 씨 속에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했던 능력이

본문 구간에는 세 가지 기적이 잇달아 나옵니다. (1) 자라나는 씨, (2) 겨자씨 (3)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심. 저 성서신학 학자는 그 ‘자연 기적’ 분류 속에 (1)항과 (2)항은 분류해 넣고 있지 않으나, 우리는 이 세 가지를 모두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질료와 형식이 같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질료와 형식의 실현은 4전5기와 같은 꾸준함과 기다림을 자양분 삼아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6월 24일 성령강림 후 제4주
본문, 막 4:2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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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 속에서2012. 6. 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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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단지 화학이나 물리 같은 학문으로만 한정지어진 사이언스(Science)라는 단어는 본래 총체적 ‘지식’을 의미하는 라틴어 “싸이엔티아”에서 온 말이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자연과학의 충격과 위력은 대단했던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문화나 사고까지도 화학과 물리의 방식으로 달아 잰다는데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역사를 달아 재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가령 노아 방주의 넓이, 길이, 높이를 재서 기린의 목과 비교 해보곤 안심하는 식의 신앙은 어디까지나 자연과학의 산물이다.

이런 똑똑한 사고방식에 반기를 든 입장이 나타났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사는 그 자체로 밖에는 이해가 안된다는, 그 이해의 방식에 관한 제동이었다. 뭔가를 이해한다고 했을 때 - 그것이 역사이든 과학이든 - 이미 ‘이해’를 바탕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즉 직접 경험한 것 없이 어떻게 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느냐는 공리(公理)의 성공이었다.

쉽게 말하면 노아의 방주를 재보고 안심하는 식의 공리로써 인류 최초의 사람 아담을 기독교인으로 생각하는 것까지는 그런대로 봐준다 치더라도, 그를 장로교인이나 감리교인 혹은 성결교인, 심지어 순복음교인으로 간주하는 상상은 전적으로 자기 이해로서 공리이지 소위 과학이 추구하는 그 공리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딜타이에게서 <생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이래, 이를 토대로 한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해석학> 출현의 전거가 되는데, 한마디로 그것은 역사를 달아 재는 방식을 둘러싼 투쟁 학문이라 감히 규정지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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