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13. 12. 9.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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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거 종말론에 관심을 가졌을 당시 세상에 곧 종말이 임한다는 계시를 받았었다. 그러나 얼마안가 그 꿈이 헛된 것으로 판명 되었다. 그 후로도 의미심장한 이미지가 꿈에서 인식되곤 했지만 전과는 달리 그것을 가급적 ‘읽으려고’ 노력한다. 그림을 ‘읽다보면’ 당초 전제된 심상과는 전혀 다른 뜻에 도달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그런 경우를 주로 계시로 인준하는 편이다. 


(1)


과거 종말론이 전국을 강타했을 당시 대부분의 집회에서는 이 노래가 빠지지를 않았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함께 뒹구는 //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 ... 사막이 낙원되리라 //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그즈음 어느 날인가 꿈에 보이기를, 정각 6시를 가리키는 한 대형 괘종시계가 보이더니 “이제 곧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생생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시한부 종말론 서적에서 나오는 식으로 나도 뭔가 신령한 계시를 받은 것 같은 냄새를 풍기며 사람을 대하곤 했다. 그러나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2)


미문(美門)을 시작한 이후 꾼 의미 있는 꿈은 세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① 날이 서지 않은 스케이트를 타며 무디디 무딘 날로 얼음을 지치느라 애를 쓰다 깬 적이 한 번 있었고, 또 한 번은 ② 광폭 타이어 달린 멋진 차를 타다가 차 뒤로 돌아가 보니 뒷 타이어 모두 펑크 나 있는 걸 보고 깬 적이 있다. 두 이미지 모두를 나의 부족한 영성으로 읽는 데 활용하였다. 



그리고 ③ 서로 맞붙은 두 개의 방에 얽힌 꿈을 하나 더 꾸었다. 직사각형인 한 쪽 방에서는 벽에 사람들을 둘러 세우고 하나씩 조준 사격을 하며 공포에 몰아넣고 있었고(내가 그런 게 아니다), 계단 식 풀장을 갖춘 정사각형으로 된 바로 옆방에서는 갓난아기를 안은 부부가 있었는데 그 갓난아기를 풀장에 담그자(내가 안았을 것이다) 아기의 머리 뒤를 통해서 붉은 피 같은 것이 물에 퍼져나가는 이미지를 본 것이다. 처음에는 직사각형의 방을 나쁜 교회, 정사각형의 방을 미문(美門)교회 라는 식으로 읽었었다. 그러나 아기 머리에서 퍼져나간 피를 이해할 수 없었다. 피도 나쁜 것이라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생명일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 하게 되면서 좋아했다. 그렇지만 조준사살을 하고 있는 직사각형 방은 여전히 ‘나쁜 교회’로 규정했었다.

이런 내용을 설교에서 한 후 성도들과 교제하는 중에 그 두 방 모두가 나 자신이라는 개정된 방향으로 읽는데 동의하게 되었다. “생명을 배양하려는 나”와 “이성으로 뭔가를 조준하려는 폭력성의 나”가 언제나 공존한다는 사실에 동의하게 된 것이다.


(3)


위와 같이 그림을 읽는 방법은 비교적 심리학적인 측면이 농후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최초의 이콘(Icon)으로 소개되는 성 카트리나 수도원의 예수상의 경우, 읽을 수 있는 그림으로서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두 눈이 짝짝이로 보이는 그 예수님 상은 하나님의 진노의 얼굴과 사랑의 얼굴로 읽히는 그림이다. 이것을 이콘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그들이 사는 집의 실내는 집이 아니라 ‘동물들의 동굴’인 것만 같고, 뼈들이 돌출된 그 그림 상의 인물들 역시 사람이 아니라 ‘야수’인 것만 같은 것도 모두 그 그림을 ‘읽을 때’에 알 수 있는 도상들이다.



(4)


6시를 가리키는 괘종시계를 읽기보다는 그림 그대로만 보다 보니, 그리고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함께 뒹구는...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장면을 읽기보다는 그림으로만 보다 보니, 우리는 진정한 종말을 계시로 받지 못하고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본문 이사야서 11장 1-11절은 바로 그런 종말에 대한 대표적인 도상이다.


① 이새의 줄기 한 싹, 

② 입의 막대기(세상을 침), 

③ 입술의 기운(악인을 죽임), 

④ 허리 띠(공의), 몸의 띠(성실), 


등은 모두 심판의 도상에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곧이어 평화의 도상도 전개 된다.


⑤ 이리-어린 양, 표범-어린 염소, 송아지-어린 사자, 암소-곰,

⑥ 소처럼 풀을 먹는 야수

⑦ 독사 굴

⑧ 독사 굴에 손 넣는 아이


서로 상반된 쌍이 잇따라 전개 되면서 그 평화를 표명하는 이 이미지를 대개 저 구름 속 하늘나라 이미지로 이해 하는가 하면, 여호와의 증인 같은 곳에서는 아예 지상천국 이미지로 소개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5)


신약성서 저자들이 이 그림을 어떻게 ‘읽었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도상(마 3:1-12; 눅 3:1-18)을 통해 이 그림을 읽어나갔다.


세례요한이 등장하는 도상은,


① 약대 털로 된 옷 (짐승/야수)

② 가죽 띠 (허리띠)

③ 메뚜기와 석청 (먹이) 


으로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은유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 이상만 중첩되어도 유사한 것이라 말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더 결정적인 장면들이 추가 된다. 바로,


④ 독사이다.


일반적으로 세례 요한이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외친 것을 두고 그 독사들을 나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본문에는 저 바깥에서 구경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아니라 세례를 받으러 스스로 나오는 자들을 향해 외치는 소리이다.


누가복음에는 아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없다. 세례 받으러 나오는 일반 회중들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인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⑨ “가난한 자를 심판”하고 “겸손한 자를 판단”한다는

그 알 수 없는 이사야서 본문(11:4)의 해독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심판은 부자나 우쭐대는 자들을 대상으로 해야지 왜 ‘가난한 자’와 ‘겸손한 자’를 심판하는가?


결국, 이사야서 본문이 지닌 도상은 심판이면서 평화의 잔치인 “세례 문전(門前)”의 도상으로서, 그 직사각형 방의 조준사격이 “나쁜 교회”를 향한 것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을 겨누고 있는 세례와 일반인 셈이다.


구름 속 하늘나라도 아니며, 이 땅에서의 지상천국 유토피아도 아니며,

오로지 ‘회개의 향연’이었던 것이다.



(6)

 

사람은 이처럼 다른 동물과는 달리 그림과 글씨를 사용하여 정보를 전달하고 취득할 줄을 안다. 글씨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그림을 글씨처럼 읽기도 하는 것이다. 이미지를 읽어내는 이러한 방법은 근대 들어 심리학이나 해석학 분야에서 응용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이처럼 고대 언어인 성경이 온통 그런 언어로 되어 있는 것이다.


흔히 종말론에 등장했던 666, 바코드도 그림이다. 최근의 “베리칩”도 그림이다. 


“괘종시계”, “날 없는 스케이트”, “펑크 난 고급 타이어”, “피의 세례를 준 아기”, “카트리나 수도원의 Icon”, “감자 먹는 사람들”도 모두 다 그림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계시’를 완성하는가는 어디까지나 그 읽기 능력에 달려있다 할 것이다.



에필로그 | 독사 굴에 손 넣은 아이


따라서 최종적으로 우리는 이사야서 본문 상에서 감히 “독사 굴에 손을 넣고 휘저을 수 있었던 아이”가 누구인지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아이는 다름 아닌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는, 이 종말 도상의 궁극적 해석에 다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독사 굴에 손을 넣은 아이가 말한다. “나는 그 분이 아니요, 그 분은 바로 저기 저 분이시다” 라고.




2013.12.8일자 | 독사 굴에 손 넣은 아이 | 사 11:1-10. (cf. 시 72:1-7, 18-19; 롬 15:4-13; 마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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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11. 4.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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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베로니카의 수건

544년경 에데사(북 시리아)는 페르시아 침공을 받았다. 당시 그들은 <아브가르 왕의 수건>이라 부르는 천 조각 하나를 500여 년간 보관해오고 있었는데 성벽에 걸어놓자 그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브가르는 그리스도 생존 당시 에데사 왕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해 궁금해 하던 그는 화가에게 그리스도를 그려오도록 시켰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화가를 거절하고 대신 직접 수건에 얼굴을 눌러 찍어 보낸 것이 바로 그 천 조각의 유래다. 

 한편, 그리스도를 따르던 무리 중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있었다. 신심이 좋은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잡힌 후 십자가를 지던 길까지 따라나섰는데 엄청난 무게를 견디지 못해 쓰러진 그리스도께 황급히 자신의 머리 수건을 풀어 건네었다. 그러자 그 분 얼굴에 맺힌 땀과 피가 닦인 그 수건에는 그리스도의 얼굴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고 전한다. 앞서 동방교회의 <아브가르 왕의 수건>이야기에 대항된 서방교회의 유명한 <베로니카의 수건> 이야기다. 이들은 “사람의 손에 의해 그려지지 않은” 그림이라는 사상을 타고 출현해 두 교회가 경쟁하듯 전설과 함께 유포되었으며 미술사가들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성상을 그린 초상화의 효시라고 입을 모은다. 서방과 동방교회는 이런 성상 여부를 두고 오랜 논쟁과 피를 부르는 다툼을 벌였지만, 분명한 사실은 각기 다른 명분 속에서 성상은 양 쪽 진영에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프린서플 |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손으로 짓지 아니한”이라는 사상은 오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성전을 직접 겨누던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으시다”고 했다가 돌에 맞았으며, 예수님 역시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막 14:58)고 선언하심에 순교의 제1 원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히브리서에서도 “손으로 짓지 아니한...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9:11)라는 개념으로 이어 받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왕상 8:27)라는 논조로써 아예 일치감치 솔로몬이 지은 처음 성전과 맞닿기도 합니다. 주로는 성전을 두고 논의된 것이지만 “손으로 지은 것”과 “손으로 짓지 않은 것” 간에 야기되는 문제는 한마디로 구태(舊態)와 그 구태에 맞선 개혁 문제로 종합할 수 있습니다.  

첫째, 손으로 그린 그림과 손으로 그리지 않은 그림.

당초 예수님 성상의 기원은 “손으로 그리지 않은”(αχειροποιητος) 그림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중세를 거치면서 교회는 도리어 손으로 그린 것들을 대량 생산해냈고, 급기야 그 그림을 통한 권력까지 양산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간직하고 전수해야 할 유산은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분명 손으로 그리지 아니한 그림입니다. 

둘째, 손으로 지은 성전과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

또한 성서가 지적하고 있는 ‘손으로 지은’ 성전은 모든 세속성전을 지칭합니다. 반면 솔로몬 성전에 대비된 광야 이동 성소, 헤롯 성전에 대비된 예수님의 몸 성소, 이들은 그 세속성전들에 대한 개혁적 성소가치로서 궁극적으로는 하늘 성소를 표상합니다. 세속성전이란 실제 그 자체가 물리적으로 지어졌다는 이유 때문에 결격인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표상하지 못하는 요인들을 내재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셋째, 손으로 지은 법과 손으로 짓지 않은 법

이로써 우리는 ‘법’에서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최종적으로 수여받은 율법 판은 모세가 돌에 새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써주신 것은 모세가 깨뜨려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렘 31:33)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돌 판에 손으로 새긴 법과 마음 판에 손으로 새기지 아니한 법, 이들 두 법의 차이를 예수께서는 돌 판에 적혀 있던 열 개 계명을 단 한 개 계명으로 축소하는 과정을 통해 증명하십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실 이 둘은 서로 양립될 수 없던 것인데도 예수께서는 사실상 이웃 사랑을 통해 그 나머지를 이룰 수 있다 하심으로 손으로 지은 법을 깨뜨리십니다.  

프린서플 | 손으로 지은 종교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종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그린 그림을 놓고서 자기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거나, 자기 손으로 성전을 지어 놓고서는 자기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법과 규칙들을 온통 자기들 손으로 지어놓고서도 자기들 손으로 지은 법이나 규칙이 아니라고들 곧잘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손으로 지은 종교 창설이 지니고 있는 제 1의 형식입니다.



* 이미지 출처:

http://annebender.blogspot.kr/2012/04/veronicas-veil.html
http://www.lib-art.com/art-prints/veronica.html
http://billdonaghy.wordpress.com/2008/03/20/passion-reflection-3-veronicas-v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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