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6'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11.14 해석 이론
  2. 2012.12.09 종말의 징표를 산출하는 방법에 관하여
말씀 속에서2013. 11. 14.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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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분간하지 못하느냐”

여기서 ‘분간’이라는 말은 관찰하고 깨닫는다는 뜻이 있지만(도키마조) 궁극적으로 해석하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는 무엇을 <해석>하고 어느 정도의 <해석능력>을 가졌는가?


(1) 


가령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히 1:1)라는 말이 “폴루메로스 카이 폴루트로포스 팔라이 호 테오스...토이스 파트라신 엔 토이스 프로페타이스...”라는 희랍어로만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우리는 도저히 주님의 말씀을 접근조차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한 언어에서 다른 한 언어로 옮겨지는 것도 해석이다.


(2) 


그런가하면 요한계시록의 666(계13:18)과 같이 숫자가 주어졌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해석이 더욱 어려울 것이다. 한 때 사람들은 이 666이 뜻하는 바가 상품의 바코드와 일치한다고 해서 요한계시록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곧 일어난다고 선포하였다. 벌써 25여 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그렇게 전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면 상품의 바코드는 666이 아닌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까?


(3) 


그렇다면 아래 본문의 경우(앞의 것이 계시록과 같은 상징의 형식이었다면 이것은 시편과 같은 예로 엔크립의 강도가 전자보다 더 센 것이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라고 했을 때 이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여러분은 어떻게 해석하겠는가? 주로 아래와 같이 해석하지 아니 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뭔가 무미건조한 해석이라고 여겨지는가?


   ① 과거 요셉 시대의 회고다.

   ② 오늘 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의미하는 교훈이다.

   ③ 오늘 나에게 주어지는 계시이다.



----


문자든 그림이든 그 무미건조함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이 바로 해석행위의 본질이다. 그런데 그것은 가장 은폐된 것을 찾아냄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앞서 (1)항의 해석은 문자에 해당하는 해석이다. 문자를 모르면 백만 천사를 대동하고 살아도 해석할 수 없다. 사전이 없으면 백만 번을 읽어도 뜻을 알 수 없는 이치이다. (2)항의 해석은 그림에 해당하는 해석이다. (숫자를 계산한 것같지만 그것은 그림에 해당한다) 유사한 형식, 반대의 형식을 지각하고 분변하는 감각을 이용해서 해석하는 능력이다. (게슈탈트라고 했던가?) 따라서 감각이 무디면 해석에 곤란을 겪을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3)항의 해석은 앞의 두 가지 해석 능력에다가 한 가지가 더 요구되는 해석인데 그것은 <이해>이다. 상대방을 이해하는가? 자신을 이해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을 이해하는가?



에필로그 |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그 본문의 진정한 해석의 키는 이름의 배열에 숨어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 본문의 해석을 가장 화려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 배열 코드를 밝혀내는 것이라는 뜻이다)


어째서 베냐민, 에브라임, 므낫세”라고 하거나,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이라고 하거나, “므낫세, 에브라임, 베냐민”이라고 하지 않고 유독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라고 하였을까? 그것은 오로지 요셉의 베냐민에 관한 애틋한 정서를 반영한다. 어린 베냐민을 살기 등등한 형들 밑에 두고 타향살이 해야 했던 요셉의 연민, 총리가 되어 형들을 대면했을 때 베냐민의 안위 먼저 물었던 베냐민에 대한 그의 연민, 그것은 어머니가 베냐민을 낳자마자 죽었을 때 어린 요셉에게 배태된 끝없는 안쓰러움이었으며 또 그것은 후일 요셉 일가의 호위 속에서 자라나 첫 번째 왕(사울)을 배출할 정도의 유서 깊은 부족으로 생존해 남은 결실로 꽃을 핀다.


이것이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라는 순서쌍에 대한 분간 즉, 해석이다. 어떻게 이와 같은 해석에 다다를 수 있은가? 


문자해석? 숫자해석? 그림해석? 그것은 앞서 주님이 가라사대,“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라고 하신 책망을 상기하는 바, <시대> 즉, 요셉과 베냐민과의 그 애틋한 시간으로 들어갈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해석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기에 기록된 <시대>라는 낱말이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인 이유이기도 하다. 카이로스 곧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수많은 시간 가운데서도 지극히 주관적인 시간 바로 그것인 셈이다.  


이것이 가장 우월한 궁극적 이해로서 해석 형식, 곧 시간을 타고 들어가는 방식이다.




2013.8.18일자 | 시 80:1-2, 8-19; 눅 12:49-56. (c.f. 사 5:1-7; 히 11:29-12:2,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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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12. 9.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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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큐비즘과 칸바일러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은 어떤 것일까? 비싼 그림 Top10에는 언제나 반 고흐와 피카소 그림이 석 점씩은 낀다. 고흐도 비싸지만 피카소 작품이 가장 비싸다. <도라 마르 초상>이 9천5백2십만 불, <파이프 든 소년>이 1억416만8천 불에 달했다. 그러다가 클림트에게 그 자리를 내준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초상>이 1억3천500만 불에 팔렸기 때문이다. 대체 왜 이리 비싼 걸까? 실제 그 정도 가치가 있어서일까? 그림 가치는 어떻게 형성될까? 일차적으로는 무엇보다 수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중세-르네상스는 교회/공공기관이 그것을 담당했지만 근현대로 넘어오면서는 투자처를 찾아 헤매는 자본들이 그 시장을 형성한다. 그 다음 그들에게 미술사적 가치나 작가 개인사적 가치가 배당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수요와 그 가치를 연결시키는 딜러의 안목과 기획이 간과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피카소가 아무리 뛰어났다 해도 볼라르(A. Vollard)나 칸바일러(D. H. Kahnweiler) 같은 딜러의 안목이 없었다면 그가 언제 세상에 소개되었을지 알 수 없다. 큐비즘(입체파)이라는 말도 칸바일러 갤러리 전시과정에 붙여진 말이다. 딜러는 상업적이긴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좋은 화가를 남보다 일찍 발굴해 그 그림을 미리 사줌으로써 화가가 안정적으로 예술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후원도 한다. 그래서인지 화가들이 좀처럼 딜러를 그리는 일이 없는데 피카소는 볼라르와 칸바일러 둘 모두에게 초상화를 그려줬다. 고호도 일찍부터 안목 있는 후원자를 만났다면 그런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다 죽지는 않았을 것인데, 어쨌든 이런 가치의 상승과 하락에 얽힌 모든 일은 작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작가 손을 떠나서 발생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프린서플 | 종말에 준비해야 할 것들

화가들이 미술사 속에 창출해낸 각각의 화풍들은 전 역사 중에서도 각 시대가 지닌 성질과 경향을 함축적으로 재형해낸 일종의 상징 언어라 할 수 있습니다. 빛의 움직임을 색채로 갈망해내던 시대를 고흐가, 여러 전쟁으로 모든 게 헤쳐 모이게 된 시대는 피카소가 표현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각 시대에 응답했던 계시들을 모아 상징체계를 이루고 있는 언어도 있습니다. 그것을 구속사라 부릅니다. 내가 문외 해 아무리 화풍 따위는 모르고 지나친다하더라도 그 화풍이 구현해낸 역사가 사라지는 게 아닌 것처럼, 내가 구속사를 아무리 등한시 여기더라도 그 화풍이 그린 역사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구속사의 최종적 종말이 말라기에 그려졌는데, 다른 종말론과는 달리 여기서는 그리스도라는 그 화풍의 화가뿐 아니라 그를 캐스팅하는 칸바일러 같은 인물까지도 예고한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칸바일러가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 식별할 수 있었습니다. 


불을 준비하는 사람, 연단.

신구약 구분 없이 연단이라는 제련과정을 많은 비유에서 사용합니다. 제련은 불의 과정입니다. 물에 담글 때가 있지만 결국엔 불을 견고케 하는 물입니다. 두드릴 때가 있지만 그 역시 불을 두드리는 일입니다. 이런 반복은 괜한 것이 아니라 가장 순수한 결과를 얻기 위한 시간 작업이라는 점에서 우리네 인생과 닮습니다. 그 분이 우리 삶을 이같이 제련할 수 있도록 불을 준비해 그리스도의 칸바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물을 준비하는 사람, 표백.

말라기가 읽어낸 종말은 사람들이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악행하는 자를 좋게 보고 기뻐하신다고 까지 비아냥댔습니다(말 2:17). ‘정의가 없는 것’이 악이 아니라 ‘정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악으로 보는 통찰입니다. 그러므로 깨끗케 해야 할 대상 악은 바로 정의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본악인 것입니다. 이 악을 씻어낼 준비를 함으로 그리스도의 칸바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 공의.

값비싸고 기름진 제물이 공의로운 제물이 아니라 불로 연단 받고 깨끗하게 씻은 자들이 드리는 제물을 공의로운 제물이라고 말씀합니다(3:3). 결국 제물의 공의는 그 드리는 자의 성결에서 형성되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삶을 연단하고 청결케 준비 시키는 사역을 통해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칸바일러가 됩시다.

말라기 종말론의 그 ‘준비하는 자’란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말라기가 예언한 종말을 초대교회가 그렇게 확정지은 것입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은 목숨 걸고 사람들의 삶 깊숙이 파고들어 불과 성령으로 세례 주는 분이 임박했다고 외치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에필로그 | 두 무명의 칸바일러

그리고 끝으로 세례 요한처럼 젊어 활력 있는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예수의 칸바일러 두 사람을 더 소개합니다. 무명의 늙은 선지자 시므온과 안나. 이 둘은 아무것도 아닌 것같은 삶을 살다가 그 삶이 다 저물녘에 갓난아기인 예수를 한 눈에 알아봅니다. 그 ‘알아보는’ 사역을 감당하고는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이것이 바로 구속사의 진정한 화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의 세계관에 의해 예고된 종말론과 또 그것을 성취 해내고 있는 초대교회의 구속사는 살아서 유명했던 피카소 보다는 무명했던 고흐와 더 친근하다 하겠습니다.  





* 이미지 참조:

http://www.guardian.co.uk/artanddesign/2009/may/04/vincent-van-gogh-ear

http://www.vggallery.com/painting/p_0455.htm

http://twistedsifter.com/2010/11/10-most-expensive-paintings-sold-in-21st-century/

http://twistedsifter.com/2010/11/10-most-expensive-paintings-sold-in-21st-century/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most_expensive_pain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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