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스'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4.01.02 때(a time)가 있다.
  2. 2012.05.21 옴파로스
말씀 속에서2014. 1. 2.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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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8세 때에 어머니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덕택에 전도서에서 가르치는 14쌍의 때(time) 가운데 가장 첫 번째인 (1) 날 때, 죽을 때를 일찍부터 알아, 이렇게 그 14쌍의 때를 설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쌍인 (2) ‘심을 때’와 ‘심은 것을 뽑을 때’는 아마도 내가 성실하게 섬겼던 교회에서 뽑힐 때였을 것이다. 단순히 뽑히는 게 아닌 ‘심었다가 뽑히는’ 것을 말한다.


(3) 죽일 때와 치료시킬 때. 여기서 죽일 때(to kill)는 앞의 죽을 때(to die)와는 또 다른 것이다. 게다가 누가 죽이는 것인지 주어가 없다. 여기 등장하는 모든 때의 쌍이 그러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단순히 죽기만 하는 게(to die) 아니라 누군가가 ‘죽이는’ 느낌이 있기에(to kill) 누군가가 ‘치료시킨다-’라는 느낌도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4) 헐 때와 세울 때. 나의 어떠어떠한 고대하던 것들은 헐렸지만 이 작은 미문(美門)은 세워졌다.


(5) 울 때와 웃을 때, 그리고 (6) 슬퍼할 때와 춤출 때. 이 들쭉날쭉한 4개의 느낌을 우리는 조울증이라고 말하지 않고 ‘때’라고 말해야 한다. ‘때’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조울증인 것이다.


(7) 돌을 던져 버릴 때와 돌을 거둘 때. 그 돌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각자 다르겠지만 그 돌은 어떤 일의 기초일 수도 있고, 그래서 그것은 어떤 서약, 맹약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그 버려진 약속을 다시 집어들 때가 있는 것이다.

 

(8) 안을 때(받아들일 때)와 안은 것을 멀리할 때. 나는 왜 저 사람과 멀어졌을까? 우리는 저 놈이 나쁜 놈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고 단지 ‘때’라고 말한다. 눈치 챘겠지만 이 모든 14쌍의, ‘28때’의 원인은 바로 그 ‘때’ 자신인 것이다.


그 외에 (9) 찾을 때와 잃을 때, (10) 지킬 때와 버릴 때도 있다. 100세에 간신히 아들을 낳았는데 그걸 바치라구? 여기서는 하나님이 ‘어쩌구저쩌구 아니야?’ 라고 추론하지 않고 단지 그 ‘때’가 있다고 말할 뿐이다.


(11) 찢을 때와 꿰맬 때. 찢어지면 새로 사면 될 것이지만 ‘꿰매야 할 때’가 있다. 새로 사서 구비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꿰맸기 때문에 상처라는 것도 남는 것이다. 이 역시 ‘때’를 지목할 뿐이다.


(12) 잠잠할 때와 말할 때. 나는 가급적이면 남들이 모두 말할 수 있는 것은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남들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노력한다. 매우 고된 것이다.


(13)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대부분의 경우는 사랑했던 그(것)를 미워하며, 미워했던 바로 그(것)를 사랑했던 것임을 알게 된다. 이들 모든 굴절에는 ‘때’라는 것이 끼어 있다.


(14) 전쟁할 때와 평화할 때. 이 기록은 아마도 전쟁을 마치고, 그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가족과 신앙이 다 몰살당하고, 그러고도 남은(remnant) 모진 생명은 포로기를 살아야 했을 때, 그 포로기마저 다 저물어 갈 무렵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평화에는 힘의 평화가 있고, 다 헛된 후의 평화가 있다. 둘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전자에 비해 후자는 열등한 것인가? 하나님은 힘센 평화에만 거하시고 헛된 평화에는 안계실까? 그렇다면 그 평화는 시간이 해결해준 것인가? 하나님이 해결해주신 평화인가?


그래서 이 전도서의 14쌍의 때는 주어 없이, 하나님이 주어인지 악마가 주어인지 알 수 없이 단지 그 때가 주도를 하고 있다. 


특히 이 14쌍의 때의 시작을 거는 전도서 3장 1절(“하늘 아래 범사에 때가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에서 앞의 때는 크로노스(Chronos)이며 뒤의 때는 카이로스(Kairos)다.


* 알다시피 크로노스는 물리적인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주관적이면서도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이다. 


그렇지만 3장 1절 이후에 펼쳐지는 14쌍의 때 즉 28개의 때는 모두 크로노스일 뿐이다. 왜 카이로스는 없고 크로노스뿐일까?


그것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때’는 카이로스인 것처럼 떠들고 다니지만 사실은 크로노스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죽을 때가 날 때를 집어 삼키며,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심을 때를 집어 삼키며, 치료시킬 때가 죽일 때를 집어 삼키며.., 그리고 세울 때가 헐 때를 집어 삼킬 뿐이다. 


그리하여서는 마침내 그 전쟁을 평화가 집어 삼키는 것이다. 평화가 전쟁을 집어 삼킬 때도 많지만 ‘헛됨’을 이길 수 있는 전쟁이란 이 세상에 없다.



에필로그 | 새로움의 시작 “헛됨”


이 28 때(크로노스)의 결론은 바로 11절 ‘영원’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영원은 하늘에서 난데없이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28 크로노스를 지났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교회는 운영의 문제 때문에 이 ‘영원’이라는 비 물질을 물질로 사들일 수 있는 것처럼 흘러간다. 그리고는 거기서 얻어지는 것이 카이로스라고 가르친다. 크로노스의 잔인무도함을 알지 못하고 영원이라는 카이로스로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런 카이로스를 나는 배격한다.


우리 미문(美門)의 자매, 형제들은 대부분이 젊기에, 그 젊은이들에게 “새롭고 새롭다” 해도 시원찮은데 2014년을 “헛되고 헛되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였다. 그것은 그 ‘헛되다’를 통해서 가장 강력한 ‘새로움’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14쌍의 대 즉 28때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여기에 우리 자신을 올려놓아 볼찌어다-


1. 날 때, 죽을 때.

2. 심을 때, 심은 것을 뽑을 때.

3. 죽일 때, 치료시킬 때.

4. 헐 때, 세울 때.

5. 울 때, 웃을 때.

6. 슬퍼할 때, 춤출 때.

7. 돌을 던져 버릴 때, 돌을 거둘 때.

8. 안을 때(받아들일 때), 안은 것을 멀리할 때.

9. 찾을 때, 잃을 때.

10. 지킬 때, 버릴 때.

11. 찢을 때, 꿰맬 때.

12. 잠잠할 때, 말할 때.

13. 사랑할 때, 미워할 때.

14. 전쟁할 때, 평화할 때.



* 2014.1.1. | 때(a time)가 있다 | 전 3:1-13, (cf. 시 8; 계 21:1-6a; 마 25:31-46.).

* 이미지 참고:


Time warps all things. Melting Watch, 1954, by Salvador Dali -http://ignite.me/articles/consciousness/what-our-memories-say-abou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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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5. 21.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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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옴파로스 

고대 희랍인들은 사물이나 환경에 인격을 붙여가며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가이아(대지)와 남편 우라노스(하늘), 그리고 아들 크로노스(시간), 하는 식의 신화입니다. 고대인들의 <시간>에 대한 깊은 통찰일까요? 시간 크로노스는 아버지격인 우라노스를 해하고 권좌에 오른 후 혹시 자신도 자기가 그런 것처럼 자기 자녀들에게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헤스티아, 데메테르, 하데스, 포세이돈..., 자녀들을 다 체내에 흡수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내 레아는 막내만큼은 빼앗기지 않기 위해 돌덩어리 하나를 보자기에 싸 내주고는 아이를 빼돌렸습니다. 그가 바로 제우스입니다. 제우스는 장성하여 시간(크로노스)에게 구토제를 먹여 11형제를 구해내 그 권좌에 올라 천체를 운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희랍인들은 각 도시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델포이라는 곳에 와 점을 치곤했는데 그곳에 있는 돌 하나를 크로노스가 토할 당시 가장 먼저 튀어나왔던 돌, 즉 그 보자기 속 돌이라고 믿어서 입니다. 그 돌을 이름하여 옴파로스, 배꼽이라는 뜻으로 부르는 것은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상에 기인합니다. A.D. 390년경 데오도시우스 1세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하고 이교도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그곳을 찾아 점치는 일이 중단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주님은 어느 장소로 다시 내려오시는가.

데카르트는 <세계와 빛에 관한 논고>를 준비해서 발표를 하려다가 갈릴레이가 단죄되는 것을 보고는 이 논문 발표를 포기합니다. 당시 갈릴레이가 단죄를 당한 이유는 땅이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런 지동설을 주장한 것은 사실 갈릴레이만이 아니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퍼져있는 지동설은 사람들의 사고 발달에 따른 개정된 이치였지만 세상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라는 말씀에 입각하여 반석인 교황이 머무는 교회는 도무지 움직일 수 없는 중심이며, 만물이 이 반석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진리였습니다.  
결국 테카르트와 갈릴레이 시대가 도래 하고야 말았지만 그 중심 권좌는 여전히 인간 차지였습니다. 중세시대의 반석은 하늘이 움직인다고 가르쳐 그 권좌를 찬탈했지만 데카르트의 후예들은 그 움직이지 않는 하늘과 움직이는 땅으로 이루어진 기계로서 세상, 그 이치로서 ‘세상’ 자체가 하나님이라고 가르쳐 자신들이 권좌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물의 중심은 오로지 교회, 교회가 바로 옴파로스입니다.

교회가 그 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엡 1:22-23).

주님은 머리가 되시며 교회는 그 분의 몸입니다. 세계는 그로 충만하며 모든 세계는 그 발아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문학적 표현이나 수사가 아니라 세상이 운영되는 실제 이치입니다. 에덴동산이 그 땅의 중심이었듯 노아의 방주도 모든 세상의 중심이었으며, 모세의 증거막이 구속사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세상의 중심 곧, 옴파로스인 것입니다.

교회에 비밀 푸는 지혜(열쇠)를 주시기 때문입니다(엡 1:17-19).

교회가 중심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이 비밀을 알고 있고 또 해석할 수 있는 열쇠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그 해석의 지혜와 능력은 세상의 방법이나 이치 또는 학문으로는 축성 할 수 없는 은사입니다.

교회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요 17:6-19).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만물 가운데 충만하셔서 만물을 사랑하시고 운영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보호되는 곳은 오로지 교회뿐입니다. 그분 보혈은 세상 물질의 권좌나 정치 권좌나 어떤 종교적 권좌를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분이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신 몸 된 교회에 그 효력이 미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보혈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보호받는 곳은 교회가 아닌 셈입니다.
옴파로스는 제우스의 성산에 있는 것도 아니고, 태양마저 따라 움직였던 교황 권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움직이지 않는 태양과 움직이는 지구로 이루어진 기계로서 과학 원리에 맺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은 오로지 교회에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교회에 다시 하강하실 것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5월20일 부활 후 제7주
본문, 행 1:6-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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