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고난'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2.10.28 욥, 듣기만 하다가 보게되는 것
  2. 2012.10.14 욥이 잃었다가 다시 받은 것들
말씀 속에서2012. 10. 28.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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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다빈치와 몬드리안

위 도형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통계적으로 거의가 다섯 번째 사각형을 고르는데 이른 바 황금비(1:1.618)라고 부른다. 가장 균형 잡히고 편안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책, 창, 명함, 신용카드..., 온갖 실용 디자인의 표준비율이 되기도 한다. 예술가들은 일찍부터 여기에 관심해 자기 작품에 적용했다. 밀로 섬의 아프로디테, 2500여 년 된 파르테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모두 이 비율을 썼다. 특히 다 빈치는 이를 위해 수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물론 20세기 들어서도 황금비 작가는 있다. 몬드리안이다. 그러나 그는 다 빈치와는 완전히 다른 화풍을 구사했다. 풍경을 그리더라도 어떤 도형의 조합/분할로 결론 맺는다. 형태뿐 아니라 색상도 원색으로 정리되었다. 소위 황금비의 극단적 재구성인 셈이다. 사실, 두 화가 모두 황금비를 겨냥해 그렸는데 어째서 그런 다른 결과가 나온 것일까? 다 빈치의 경우는 사실과 똑같은 그림을 위해 황금비를 썼다면 몬드리안은 그 사실적 장면들 속에서 황금비만을 부각해 사실을 그렸다. 육안으로는 모나리자가 더 실사로 느껴지지만 시각은 어차피 왜곡임이 훗날 규명된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작품이 자연(nature)에 충실했다고 말하는데 누가 더?

프린서플 | 듣기만 하다가 보게 되었다는 것

본문에서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됩니다. 이를 두고 “그것은 그가 영적인 마음의 눈을 뜬 것입니다.” 라고 해버리면 그 의미만 강조되고 실질적 신유는 모호한 게 되어 예수님의 실제 이적과 그 권능은 부인하는 것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반면 그분의 말씀이 지금도 살아 역사하신다는 믿음을 추상적인 의미가 아닌 확실한 실제에 놓고 기도해 마침내 정말로 그 맹인이 볼 수 있게 되었다면 그 “눈을 떴다.” 라는 사건은 실질적으로 나타난 체험이라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맹인의 눈을 뜨게 한 그 신유 당사자가 신분을 망각하고 그 이적을 토대로 과도한 부를 축재했다면 결과적으로 그 의미의 눈은 도리어 맹인 된 상태로 전락되었다 할 것입니다. 어쨌든 두 결과를 놓고 볼 때, 마음의 눈을 뜨든 실제 눈을 뜨든 확실한 것은 “보게 되었다.”라는 사실 입니다. 그 사실 만큼에는 이천년 아니라 일만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습니다. “본다”는 말에는 다음 몇 가지 차이들이 있습니다.  

첫째, 시각/시력으로 보는 것입니다. (SEEING)

우선 창세기 첫 장의 표현대로 땅을 볼 수 있고, 하늘도 볼 수 있고, 물, 바다.., 각종 식물들이나 창공을 나는 새, 그리고 육지와 바다의 여러 생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지켜보는 것입니다. (WATCHING)

본다고 하는 것에는 시각적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어떤 장면들이 ‘되어가는’ 상태를 파악하고 보는 것, 그것은 단순한 시력 이상의 것입니다. CCTV 모니터 보는 것은 SEE라고 하지 않습니다. WATCH라고 말합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성전 재건을 할 때 그 성의 문을 교대로 지키게 했으며(느 7:3),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을 때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 하신 것도 이 의미로서의 ‘보는 것’입니다.

셋째, 발견으로 보는 것입니다. (FINDING)

모세는 떨기나무에서 타는 불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한편, 다윗 왕조가 야웨를 섬기는 민족으로 명맥을 이어가고는 있었지만 내내 타락해 가다가 요시야 왕 때에 비로소 제사장 힐기야에 의해 모세의 율법 책이 발견됩니다(대하 34:14-15). 그것이 바로 개혁으로 연결됩니다. (그 동안 율법책을 잃어버리도록 뭐하고 있었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예화에 소개된 밭에 감춰진 보화도 역시 ‘발견’해야 얻을 수 있는 보화였습니다.

넷째, 깨달음/앎으로 보는 것입니다. (PERCEIVING)

신구약에 걸친 유명 인용구 하나가 있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 6:9)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욥은 오늘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이로써 우리 인간의 시력(See/Sight)에는 지켜보는 것(Watch), 발견하여 보는 것(Find), 통찰하여 보는 것(Perceive)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하나만 빠져도 시력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해서 맹인 바디매오와 욥, 이들 두 사람이 보게 되었다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특히, 욥은 마지막에 가서 “my eye sees you” 즉, I SEE YOU라는 정답을 하나님께 내놓음으로 그 지루한 여정의 종지부를 찍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직 지루하다고 한다면 아직 보지 못한 것입니다.

I SEE YOU.

에필로그 | 황금비율

아프로디테나 모나리자 식으로 보든 몬드리안의 분할 식으로 보든, 중요한 것은 기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그마가 그 기준인 줄 착각하나 사실은 그 기준을 도리어 자기 식으로 ‘형성’한 그것을 도그마로 가져가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도그마 - 아니 사실은 도그마가 아니라 진리 - 그것은 오로지 ‘비율’ 그 자신입니다. 로고스는 말씀이라는 말로도 번역되지만 ‘비율’이라는 말로도 번역될 수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황금비(The Golden Ratio)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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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10. 14.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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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욥의 의(義)를 기점으로 나타나는 두 가지 측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참조: http://www.mimoonchurch.com/159 ) 자신의 의를 과신하는 욥 하나와 - 패배주의적 신앙과 그것을 연결지었습니다 -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 그것은 주로 창조로 표현되었습니다 - 앞에서 회개함으로 오직 하나님의 의로 덧입은 욥이었습니다. 

오늘 이 본문(막 10:17-31)에 등장하는 ‘재물이 많은 사람’은 부자로서 재물이 많다는 점에서 욥과 닮았지만 계명을 다 지켰노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전자의 욥과 많이 닮았습니다. 특히 그는 (1) 살인하지 말라, (2) 간음하지 말라, (3) 도둑질하지 말라, (4) 거짓 맹세하지 말라, (5) 속여 빼앗지 말라, (6)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과 계명을 잘 준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권고로 제시되고 있는 그것은 불교 같은 종교에서 말하는 어떤 무소유를 뜻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구제의 질량을 무겁게 쌓으라는 주문도 아니며, 그 재물을 예수님 자신에게로 가져오라는 요구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버리라”는 단순한 말로 압축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은 그로 하여금 “제자가 되어 따르라”는 말씀 즉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씀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 상에서 우리는 재물 많은 이 사람을 포함하는 다음 세 부류의 제자군이 등장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첫째, 재물을 버리지 못하는 제자. 

이들은 예수님께 달려와 무릎까지 꿇으며,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버리고,” “따르라”고 했을 때 슬퍼하며 되돌아갔던 제자들입니다.


둘째, 수군거리는 제자.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는 말을 듣고 서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수군거리는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


셋째, 버리고 따르는 제자. 

반면에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라고 고백하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향해서만 예수님께서 알려주십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로써 우리는 그 재물 많은 사람의 영생에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재물 자체가 아니라 그 재물을 놔두고 따르지 못한 결단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생은 버렸다 다시 받는(λαμβάνω) 것에 포함되는 것이지 이 남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 속에서 상속받는(κλερονομέω)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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