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3. 10. 2. 17:20

저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프롤로그 | 브엘세바.

브엘세바는 세겜, 헤브론과 더불어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아브라함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곳 중 하나라고 한다. 세겜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처음 장막을 친 곳이고 헤브론은 아내 사라를 장사 지낸 곳이다. 세겜과 헤브론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로 편입돼 접근이 통제되고 있어 브엘세바만 접근이 가능하다고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만민의 아버지”가 된다는 위대한 약속을 받았지만 몇 가지 고질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선 결정적으로 자녀가 없다는 점 (사실상 자녀의 생산 가능성이 전혀 없었음), 둘재 토지가 없다는 점, 셋째 그렇다보니 인접한 외부세력에 한 시라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신분(이방인)이라는 문제였다. 우리는 흔히 그가 백세에 아들을 낳는 이야기에만 몰입해있지만, 공동체를 이끌어야 하는 책무가 주어진 아브라함에게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외부 적대 세력과의 지속적인 분쟁이었다. 특히 블레셋 영지가 주 거점이던 아브라함에게 아비멜렉과의 끊이지 않는 샘을 둘러싼 분쟁은 가장 큰 골치거리였다. 


그러다 마침내 샘을 하나 확보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브엘세바였던 것이다. 아비멜렉과 협정을 맺어 이를 확보하고는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이름 짓기를 “맹세의 우물”(일곱 우물)이라고 지었다. 단순히 적대 세력과의 협정으로서 맹세가 아니라 주거가 안정되지 않았던 자기 공동체에게 안정과 평화를 확보해줄 수 있는 거점이어서였을 것이다. 브엘세바는 아버지 사후에 이삭이 아버지처럼 아비멜렉에게 시달리다가 역시 샘을 재확보한 바로 그곳이다. 또한 이삭이 야곱에게 복을 빌어준 곳이며, 애굽 총리가 된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모셔 갈 때 야곱이 마지막 잠을 잔 곳인가 하면, 일찍이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나 사막으로 향하면서 잠시 들렀던 곳이기도 하다. 


프린서플 | 도상해석. 로뎀나무가 키워드인가 구운 덕이 키워드인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냄으로써 명실상부 대 예언자로 데뷔 한 엘리야가 아합과 바알 사제들에게 도전장을 낸 끝에 예배에 승리를 거두고, 거기서 그치지 않아 계속 밀어부쳐 그들을 제거하는 것은 물론(왕상 18:1-40) 자신이 수 년 간 멈춰 놓았던(왕상 17:1) 비까지 다시 오게 만드는 위력있는 영성을 발휘하지만 이세벨이 다짐한 보복의 소식을 듣고는 서둘러 도망친다(왕상 19:2). 


그리고 그가 찾아간 곳이 바로 브엘세바다(3절). 그는 브엘세바에 사환을 두고는 광야로 좀 더 들어갔다. 힘을 보충하려는 의도 보다는 아마 죽으려고 그렇게 더 들어갔던 것 같다. 그곳에 들어간 그는 기진맥진 한 상태로 그늘이 될 만한 로뎀나무를 발견하고는 그 아래서 잠이 든다. 일어나 보니 곁에 구운 떡과 물이 조금 있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먹고 마신 힘으로 그 지점으로부터 “사십 일”을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의 영혼은 몇 가지 부분과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1) 먹(고마시)는 부분 (2) 감각하는 부분 (3) 움직이는 부분 (4) 생각하는 부분


우리는 주로 먹을 것을 위해 움직인다. 감각을 좇아 움직이기도 한다. 먹을 것을 위해 움직이는 것과 감각을 좇아 움직이는 것은 다 ‘생각’을 통해서 가능하다. 먹는 생각 미감/쾌감 다 ‘생각’이다. 그러나 먹는 것과 그 감각이 완전히 배제된, 생각만을 위한, 생각만에 의한 우리의 움직임이 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면서도 가장 우월한 단계의 영혼의 부분이다. 그것은 먹는 것과 감각하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최고의 부분이다보니, 그곳에는 언제나 먹는 것과 감각이 제거되는 혹독한 경험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다. 광야는 그런 의미에서 언제나 영혼의 공간이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 같이(시 42:1-5) 우리 영혼은 그 샘의 원천을 찾아 헤매고 거기서 가장 원초적인 식량, <물>을 만난다. 그 샘, 브엘세바에 다다르는 것이다. 일곱 우물의 장소, 아브라함과 이삭이 맹세한 영적 장소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영혼은 그것 만으로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차라리 죽기를 원하는(19:4), 완전한 탈진(burn out)의 공간에 들어서고 마는 것이다. 엘리야는 브엘세바를 지나 바로 그 구역까지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로뎀나무를 만난다.


기왕 광야로 나가 만난 기적이면 더 시원한 오아시스를 만나야 하는데, 불덩어리들을 만난다. 


모세는 (불에 타지 않는 나무) 떨기나무를, 엘리야는 (불이 까지지 않는 나무) 로뎀나무를- 


에필로그 | 광야에서 왜 구운 떡을 주셨는가.


두 명의 여행자가 로뎀나무 가지들을 연료로 삼아 밥을 지어 먹었는데 1년 후 가보니, 그 재 속에 여전히 불씨가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유대인의 전설이 있다. 그래서, <숯 재료로 가장 좋은 나무> 곧, <천사가 숯불에 구운 떡을 놓고 간 나무>는 둘 다 같은 나무이다.


이 불을 연료 삼아 엘리야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산 호렙에까지 다다르는 것이다. 



2013년6월23일자 본문, 왕상 19:1-4, (5-7), 8-15a (c.f. 시 42 & 43  갈 3:23-29; 눅 8:26-39.)


이미지 참조:

www.wildbike.co.kr.jpg
blo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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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6. 4. 07:33

 

저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프롤로그 |   

경남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약 800년 가까이 보전돼 온 세계문화유산입니다. 그것이 보관된 곳 바닥에는 숯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숯의 유익함을 선조들도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숯 효과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산화 방지와 환원 작용입니다. 사물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힘/복원력이 뛰어나 주위 사물을 활성화 하는 이 숯은 산성 물질이나 식품을 알칼리화 합니다. 또한 인체 체액이나 혈액을 알칼리화 시켜 신선하게 유지해 주고, 식용 숯을 먹으면 산을 중화/해독하여 장내 세균을 죽이고 유효균을 활성화 시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외 전자파차단 효과, 원적외선과 음이온 방출, 그리고 팔만대장경 주 보본기능인 습도 조절부터 곰팡이 방지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유용함을 생각하면 예나 지금이나 우리 생활 속 보물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무를 숯가마에 넣어 구워 검은 덩어리로 재가 되기 이전의 탄소덩어리를 우리는 숯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우리말로 신선하고 힘이 좋다는 뜻을 가지며 영어로는 Charcoal, 즉 China(중국)와 cool(좋다)의 합성어로서 중국에서 약으로 들여온 숯을 서구에서도 복용해보니 좋아져서 그런 단어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부정한 입을 향해 탄식하자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그 입술에 숯(불)을 가져다 대 정화시키는 대목이 나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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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숯불과 성령 

컴퓨터가 한 과업을 수행하려면 뭔가 입력할 장치가 필요합니다. 키보드, 마우스, 스캐너, 웹캠, 그래픽스 태블릿, 라이트펜 등이 그럴 때 쓰는 입력장치들 입니다. 그리고 그 과업을 결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반대로 출력장치가 꼭 필요합니다. 모니터, 스피커, 프린터, 기타 컨트롤러(로봇) 따위 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입력장치들이 있습니다. 시각․청각․미각․후각․촉각들로서 이들을 관장하는 기관들이 있고 그 가운데서도 눈과 귀와 입의 능력은 가장 탁월합니다. 눈․귀는 주로 입력을 담당하고 입은 출력을 겸합니다. 이들 셋은 특별히 마음(noun)에 직결로 달라붙어 있어 입출력 정보를 아주 빠른 속도로 운반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이 셋 중에서도 출력 장치 격인 ‘입’을 놓고 깊은 탄식 속에 회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비로운 사실은 입을 통해서만 나머지 두 기관의 통제까지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이런 순서에 의해 그렇습니다.

입이 곧 마음입니다(마 12:34; 약 3:2-6).

귀는 마음에 있는 내용을 출력할 수 없습니다. 눈도 그렇습니다. 오로지 입만 그 내용을 그대로 운반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없는 것은 입으로도 운반되지 않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입니다(마 12:34b). 입이라는 지체를 가리켜 큰 배를 움직이는 작은 키에 비유하는 야고보는 그 작은 것이 온 몸을 더럽히기도 하고 인생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기도 한다고 했습니다(약 3:2-6). 손과 발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지만 마음은 마음 그 자신이기 때문에 통제할 수 없는 것이며, 입을 제어하기 어렵다는 것은 그것이 곧 마음이기 때문이라는 반증입니다.

입에 있는 말을 고치면 마음이 고쳐집니다(사 6:7b).

이사야 선지자는 영광이 충만한 성전 앞에 서자 가장 먼저 입술의 부정함을 고백합니다. 입술이 부정한 것은 사실 이사야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영광을 본 자가 그 입술을 내놓은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성령께서는 그분의 말(Logos)을 통해서 그 마음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마음을 고치면 잘 들리고, 잘 보입니다(행 2:1-42).

마음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는 잘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마음이 단단하면 아예 들을 수도 볼 수도 없게 됩니다. 들리지도 않고 볼 수도 없게 되면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즉, 모든 입력 장치가 먹통이 된 상태인 것입니다. 마음을 고치면 잘 들리고 보이게 되며, 또 이해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에필로그 |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

입이라는 이 신비로운 지체는 이와 같이 망가진 마음의 내용을 운반하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귀와 눈을 고칠 수 있도록 그 마음을 향해 들어갈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통로를 집도(執刀)하시고 정화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그 숯불, 곧 성령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6월3일 성령강림 후 제1주
본문, 사 6: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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