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만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2.12.02 휴거, 베리칩, 바른 종말론
  2. 2012.11.04 베로니카의 수건
말씀 속에서2012. 12. 2. 20:48

저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프롤로그 |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라는 말은 예수 재림시에 신도들이 하늘로 들림받는 성경 예언이 1992.10.28에 일어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의 캐치프레이즈였다. 그러나 당일 예언은 빗나갔고 리더였던 목사는(이장림) 구속되었다. 구속 된 사유는 예언이 빗나가서가 아니라 사기 및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였는데 그의 자택에서는 1993.5.22 만기 도래되는 환매채와 수표 1억9300만원, 그리고 미화 2만6700불이 발견되기도 했다. 반면, 신도중에는 퇴직금을 모두 바친 철도공무원, 아들과 가출해 선교회에 합류한 주부, 여기에 합류를 막는다고 음독자살한 여고생, 그리고 심지어 ‘들림’을 가볍게 하기 위해 낙태를 한 임산부도 있었다고 전한다.

                         * 사진 설명: 당시의 종말은 북한의 남침과 연계되어 나타날 것으로 주장되기도 했는데
                                                 목사들 중에는 벌거벗고 그것을 전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사야처럼?...


                                * 사진 설명: 이후 92년 11월 2일에는 동아일보에 소형광고로 사과문이 게재되기도 했다.
                                         

프린서플 | 바른 종말론

휴거(携擧)라는 한 현상에 몰입했던 이 단체의 핵심 리더였던 이장림씨의 목적이 단순 금전사기였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서에도 없는 어휘인 이 ‘휴거’라는 말이 다름 아닌 이장림 그 자신이 과거 번역 과정에서 만들어낸 것이었다는 점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생명의 말씀사 소속 번역자였을 정도로 지식에 문외가 아니었을 그가 1978년 Ernest Angley 소설 Raptured를 번역하면서 휴거라는 한자식 표기를 처음 들여온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설류를 우리는 일종의 <묵시문학>이라는 장르로 분류합니다. 성서 자체가 이러한 묵시 환경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을 정도로 그 유래가 깊은 것이지만, 올바른 이해가 없다면 얼마든지 또 그런 혼란은 반복될 것이며, 실제로 강력한 스마트 환경에 진입한 오늘날도 이미 도처에서는 동종의 현상들이 포착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묵시를 이렇게 계시로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공의의 파괴.

종말의 주제는 휴거, 바코드, 베리칩이 아니라 <공의>입니다. 왜 종말이 오는 지, 왜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종말은 실제로 유대교 형성의 배경이었습니다. 유대교는 태초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처음’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맞지만 그 창조주를 언제 기억해냈는지가 중요한데 그 때가 바로 ‘종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죄도 한 개체로서가 아닌 하나님 공의에 관한 포괄적 침범을 다룬 것이며, 이후 전개되는 모든 죄상들 역시 공의의 붕괴를 기록한 것이고, 또 그것은 오늘날의 종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의의 심판.

심판은 회피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다미선교회>의 실패는 휴거를 마치 심판 회피의 거점으로 축소한 데 있습니다. 심판의 장소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십자가 도상입니다. ‘들림’도 그곳에서 발생합니다. 계시록을 이 전제와 분리시켜 읽을 때 우리는 또 다른 심판대, 또 다른 예수를 소개 받게 되는데 십자가 도상과 그곳에서 발생한 사건보다 더 강도 높은 종말이란 있을 수도 없고 또 있어서도 안됩니다. 이단 되기 십상입니다.

공의의 회복.

성서가 남긴 묵시와 작금의 묵시현상 간 가장 큰 차이점은 ‘회복’을 말하는 가에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회복을 의미했으며, 광야 성소도 회복이었으며, 다윗 성전도, 그리고 예수의 살과 피 역시 회복을 기표로 갖는 종말이었습니다. 구속사적 종말은 언제나 공의의 회복을 목적하고 재연되어왔습니다. 파괴와 불안이 아닙니다.


에피로그 | 반복의 도그마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는” 사람들 가운데 근본적인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은 한 마디로, 성례전의 ‘반복’에 실패한 자들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초림 이후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종말과 심판은 바로 이 성례전에서만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종말에 가서도 보전해야 할 최선의 도그마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본문의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는 대목은 마가와 마태복음에 공히 나오는 본문인데 유독 여기 누가복음에서 만은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아닌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로 기록된 것을 봅니다. 왜 “모든 나무”가 추가된 것일까. 그것은 지정학적 유대교 팔레스타인 만의 독점적 사건으로서 종말이 재생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나라, 모든 시대에 발생하는 일종의 반복을 고려한 번역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 이미지 참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110200209219013&edtNo=3&printCount=1&publishDate=1992-11-02&officeId=00020&pageNo=19&printNo=21988&publishType=00020

http://history.khan.kr/176

http://wnewskorea.cafe24.com/bbs/board.php?bo_table=weekly_issue&wr_id=199

http://ndarticle.joins.com/pad/2012/10/25/20121025194415390.jpg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개별 복합 게시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Unported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Pentalogia
말씀 속에서2012. 11. 4. 22:32

저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프롤로그 | 베로니카의 수건

544년경 에데사(북 시리아)는 페르시아 침공을 받았다. 당시 그들은 <아브가르 왕의 수건>이라 부르는 천 조각 하나를 500여 년간 보관해오고 있었는데 성벽에 걸어놓자 그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브가르는 그리스도 생존 당시 에데사 왕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해 궁금해 하던 그는 화가에게 그리스도를 그려오도록 시켰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화가를 거절하고 대신 직접 수건에 얼굴을 눌러 찍어 보낸 것이 바로 그 천 조각의 유래다. 

 한편, 그리스도를 따르던 무리 중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있었다. 신심이 좋은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잡힌 후 십자가를 지던 길까지 따라나섰는데 엄청난 무게를 견디지 못해 쓰러진 그리스도께 황급히 자신의 머리 수건을 풀어 건네었다. 그러자 그 분 얼굴에 맺힌 땀과 피가 닦인 그 수건에는 그리스도의 얼굴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고 전한다. 앞서 동방교회의 <아브가르 왕의 수건>이야기에 대항된 서방교회의 유명한 <베로니카의 수건> 이야기다. 이들은 “사람의 손에 의해 그려지지 않은” 그림이라는 사상을 타고 출현해 두 교회가 경쟁하듯 전설과 함께 유포되었으며 미술사가들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성상을 그린 초상화의 효시라고 입을 모은다. 서방과 동방교회는 이런 성상 여부를 두고 오랜 논쟁과 피를 부르는 다툼을 벌였지만, 분명한 사실은 각기 다른 명분 속에서 성상은 양 쪽 진영에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프린서플 |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손으로 짓지 아니한”이라는 사상은 오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성전을 직접 겨누던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으시다”고 했다가 돌에 맞았으며, 예수님 역시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막 14:58)고 선언하심에 순교의 제1 원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히브리서에서도 “손으로 짓지 아니한...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9:11)라는 개념으로 이어 받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왕상 8:27)라는 논조로써 아예 일치감치 솔로몬이 지은 처음 성전과 맞닿기도 합니다. 주로는 성전을 두고 논의된 것이지만 “손으로 지은 것”과 “손으로 짓지 않은 것” 간에 야기되는 문제는 한마디로 구태(舊態)와 그 구태에 맞선 개혁 문제로 종합할 수 있습니다.  

첫째, 손으로 그린 그림과 손으로 그리지 않은 그림.

당초 예수님 성상의 기원은 “손으로 그리지 않은”(αχειροποιητος) 그림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중세를 거치면서 교회는 도리어 손으로 그린 것들을 대량 생산해냈고, 급기야 그 그림을 통한 권력까지 양산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간직하고 전수해야 할 유산은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분명 손으로 그리지 아니한 그림입니다. 

둘째, 손으로 지은 성전과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

또한 성서가 지적하고 있는 ‘손으로 지은’ 성전은 모든 세속성전을 지칭합니다. 반면 솔로몬 성전에 대비된 광야 이동 성소, 헤롯 성전에 대비된 예수님의 몸 성소, 이들은 그 세속성전들에 대한 개혁적 성소가치로서 궁극적으로는 하늘 성소를 표상합니다. 세속성전이란 실제 그 자체가 물리적으로 지어졌다는 이유 때문에 결격인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표상하지 못하는 요인들을 내재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셋째, 손으로 지은 법과 손으로 짓지 않은 법

이로써 우리는 ‘법’에서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최종적으로 수여받은 율법 판은 모세가 돌에 새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써주신 것은 모세가 깨뜨려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렘 31:33)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돌 판에 손으로 새긴 법과 마음 판에 손으로 새기지 아니한 법, 이들 두 법의 차이를 예수께서는 돌 판에 적혀 있던 열 개 계명을 단 한 개 계명으로 축소하는 과정을 통해 증명하십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실 이 둘은 서로 양립될 수 없던 것인데도 예수께서는 사실상 이웃 사랑을 통해 그 나머지를 이룰 수 있다 하심으로 손으로 지은 법을 깨뜨리십니다.  

프린서플 | 손으로 지은 종교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종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그린 그림을 놓고서 자기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거나, 자기 손으로 성전을 지어 놓고서는 자기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법과 규칙들을 온통 자기들 손으로 지어놓고서도 자기들 손으로 지은 법이나 규칙이 아니라고들 곧잘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손으로 지은 종교 창설이 지니고 있는 제 1의 형식입니다.



* 이미지 출처:

http://annebender.blogspot.kr/2012/04/veronicas-veil.html
http://www.lib-art.com/art-prints/veronica.html
http://billdonaghy.wordpress.com/2008/03/20/passion-reflection-3-veronicas-veil/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개별 복합 게시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Unported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