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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5.21 기독교의 방언은 왜 이상한 말(glossolalia)인가? 1
  2. 2012.05.28 리바이어던과 성령
말씀 속에서2013. 5. 2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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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언어의 붕괴.

“어떤 민족들이 역사에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사용한 언어를 재구성해 그들의 풍습, 제도, 계통, 인종 등을 밝힐 수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언어의 공통성으로부터 혈족 관계를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 즉 어족이 인류학적 종족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게르만 민족을 가정해보자. 그들 특색은 뚜렷하다. 금발, 긴 두골, 큰 키... 스칸디나비아형이 가장 완벽한 그들 형태다. 그러나 게르만어를 말하는 모든 주민들이 이 특징에 부합한다고 할 수는 없다. 알프스 산맥 아래 알레마니아인은 스칸디나비아인과는 아주 다른 형태다. 그렇다면 한 고유언어는 본래 한 인종에게만 속하고 그 언어가 타 민족에 의해 쓰여진다면 정복에 의해 그들에게 강요되었다고 해야하는 것일까? 물론 로마인에게 정복당한 고올인처럼 정복자 언어를 채용하거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종족들이 있음을 종종본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게르만어의 경우, 수많은 이민족을 굴복시켰다 할지라도 이들을 모두 병합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혈족 관계와 언어 공통성과는 그 어떠한 필연적 관계도 없어 보인다. 따라서 인종의 단일성이란 언어 공통성의 이차적 요인이지 필수적 요인은 전혀 아니라 할 수 있다. 다만, 다른 단일성이 있는데 그것은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서 유일하게 본질적인 것인 바, 사회적 유대에 의해 구성되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민족성이라 칭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의는 최고의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언어와 혈족 또는 민족성에 관한 정의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창세기 바벨탑 사건은 철저한 시스템의 붕괴로 이해될 수 있다.

프린서플 | 방언은 왜 이상한 말(glossolalia)인가?

“아주사Asusa) 거리에 있는 한 초라한 오두막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다. 이상한 교리를 믿는 신자들이 극도로 광적인 예배를 드리며, 대단히 급진적인 교리를 설교하고, 거의 정신이상에 가까운 극도의 흥분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 회중들은 흑인과 약간의 백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시간 동안 몸을 앞뒤로 흔들며 울부짖으면서 그 신자들이 신경을 자극하는 기도와 간구를 드리기 때문에 밤만 되면 그 지역의 주민들은 공포에 휩싸인다고 한다. 더욱이 그 신자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았으며 그 이상한 소리를 이해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Los Angeles Times Apr. 18, 1906, p. 1)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만나는 은사주의 형식의 원형으로 꼽히는 한 집회의 현장 스케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날 때는 바울의 로마서를 통해 만나듯이, 우리가 바울의 로마서를 만날 때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만나듯이, 본문에(행 2:1-21) 나오는 오순절 장면을 오늘날 만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게 보편적 교회사 시각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직전 중세교회 시스템 붕과가 있었듯이, 위의 아주사 사건 직전에는 경건주의 시스템 붕괴조짐이 보였듯이, 오늘날에는 안타깝게도 은사주의를 포함한 총체적 시스템 붕괴로 돌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붕괴된 시스템의 복원이 오로지 “듣기” 기능과 맞물려 있다고 전합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부지런함으로 듣는다.

우선 ‘눈치’라는 말로 이해하면 쉽겠습니다. 두려워 눈치를 보거나 약삭빠르게 눈치를 본다는 부정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부지런하게 듣는 사람은 보다 능동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며 관계 형성의 큰 밑거름이 됩니다.  


신뢰로 듣는다.

신뢰가 상실되면 어떤 말을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행동으로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듣기의 구조는 신뢰 입니다.


영으로 듣는다.

이것은 가장 우월한 듣기의 형식으로 설명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자기 혼자서만 들을 수 있는 듣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혼자서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혼자서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모세도 그랬으며 바울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에필로그 | 언어의 복원은 관계의 복원.

그러므로 방언의 본질은 그 말의 어떤 신비로운 해석에 있는 것같지만 실상은 이상한 말(glossolalia) 그 자체에 더 의도된 목적이 있습니다. 모든 관계의 궁극적 복원은 듣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부모 자식, 부부, 가정, 교회, 사회, 국가, 그 모든 듣기의 관계 복원에 기여해야 사도행전 2:1-21 사건의 본령에 응한다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자인 누가(Luke)가 오순절 성령강림 이 지점을 창세기 바벨탑에서 발생한 문제의 복원으로, 그렇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지 참조:

thetowerofbabel.net
S-a-q-u-a-r-i-u-s.deviantart.com
wikipedia.org
www.answersingenesis.org
images.yourdictiona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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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5. 28.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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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홉스는 그의 역작 <리바이어던>에서 국가를 일종의 인공적 인간(人工的 人間)으로 간주하고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⑴ 국가의 주권은 인공 혼으로 전신에 생명과 운동을 공급한다.
⑵ 장관이나 행정관리는 인공 관절이고,
⑶ 보수와 체벌은 신경이며,
⑷ 개별 가정과 재산은 체력이고,
⑸ 복지는 그 인공적 인간의 과업이다.
그리고 ⑹ 원로들은 인공인간의 기억과도 같으며,
⑺ 형평과 법은 인공적 이성과 의지요,
⑻ 평화는 건강, ⑼ 소요는 질병, ⑽ 내란은 죽음이다.
끝으로 ⑾ 이 모든 것을 결합하고 창출하는 신약(信約)은 이른 바 창세에 신이 말씀하신 ‘인간을 창조하자!’는 명령에 비유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것은 마치 일찍이 다니엘이 통찰했던 괴생명체를 서술했던 방식과도 같으며, 다니엘의 진술을 모티프로 재형해낸 요한계시록 속 괴생물들과도 같은 것으로, 일종의 집단 영성이다. 이들 모두가 괴생명체로 묘사되는 것은 그것들이 결국 하나님을 떠난 자율적 집단의 영성이라는 데 그 공통점이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리워야단이자 베헤못이다.

일찍이 악어나 하마나 뱀으로 혼역된 리워야단이라는 존재가 지닌 문맥들은 모두 이들 최강 파워들이 하나님 권세아래 종속되어 있다는 믿음이었다(c.f. 창 1:21; 출 7:9, 10, 12; 신 32:33; 시 91:13; 욥 3:8; 시 74:13‐17; 89:9‐10; 104:26; 사 27:1; 51:9‐10; 렘 51:34). 구약의 이러한 통찰과 기대감이 신약에 와서 성령의 이름으로 실현된다.

하나님의 성령이 이 파괴된 집단 영성의 치유자로서 임재된 것이다. 그 사역의 본령이 오순절 성령강림 첫 번째 현상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방언이다. 저자 누가가 바로 이 방언을 어떤 도상 속에서 위치시켰는지가 그 본령의 열쇠다.

방언은 본래 모든 신령한 은사로 들어가는 드라이브와 같은 입구다. 체험한 사람만이 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이같은 귀납적 체험 현장을 바벨탑 도상과 맞춰 놓은 것은 전적으로 누가의 놀라운 통찰 덕택이다.

바벨탑은 최초의 리바이어던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탑을 쌓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하였는가? 들리지 않았다. 망치를 달라고 하는데 흙을 건네고, 물을 달라고 하는데 불을 건네는 언어 파괴적인 리바이어던 현상과 오순절 성령강림의 방언의 은사 현상과 동치로 묶어 버렸다.

성령이 임하시니까 바벨탑이라는 리바이어던의 때처럼 갑자기 들리지 않게 되었다. 전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는 바로 그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새 리바이어던 현상 속에서는 오로지 경건한 자만 들을 수 있다.

말(logos)을 통해 재구성되는 이 작업과 공정은 각 세대가 인공적으로 창출해냈던 리바이어던을 재형 해내는 전혀 다른 개념의 리바이어던 작업 공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인공 혼, 인공 관절, 인공적 이성과 의지가 아닌 성령의 사랑의 법으로 다시 창조되는 과업. 이것이 바로 성령이 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 하시려는 일 즉, 새 리바이어던으로서 프락세이스(praxis, Acts)이다.



*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당시 교회권력에서 해방된 국가를 가리키며 또 그러한 국가의 성립을 논한다. 교회권력이 어떤 생명체로서 유기체에 훼방을 가하고 있다는 통찰로서는 같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바라는 리바이어던은 역시 또다른 권력으로서 재앙에 지나지 않는다 할 것이다.

미문(美門)에서 맞는 첫 성령강림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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