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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0.17 게하시
  2. 2013.10.16 무익한 종 Vs. 사마리아 나병환자
말씀 속에서2013. 10. 17.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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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호모보누스와 프란치스코.


1197년 경에 활동하던 호모보누스라는 사람은 이탈리아 어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사업을 성공적으로 번창시켜 사업에서 버는 대부분을 빈민구제에 사용하고 가족에게는 꼭 필요한 것만 제공했다. 그런 까닭에 가족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지만 아침 저녁으로 교회에 나가는 등 신실한 생활을 하였다. 호모보누스라는 이름도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었으며, 그는 죽음도 미사를 드리던 중 맞이했다. 사후 이노센트 III세에 의해 성인에 올려진 그는 사업하는 자의 귀감이며 그래서 그의 심볼은 ‘전대’다. 비슷한 시기 1182년 경 같은 이탈리아 아씨시라는 지역의 프란치스코도 역시 사업가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에 교역을 하러 갔다가 그를 낳았는데 프랑스와 사업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름도 “프랑스 인”(프란치스코)이라 지었다. 그는 원래 기사가 되려고 했으나 젊은 날 배회를 했던 것같다. 어떤 이름 모르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곤 하다가 하루는 한센 병 환자와 마주친 일이 있었다. 말에서 내려온 그가 가서 돈을 쥐어 주고 평화의 입맞춤을 하는 모습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깊은 신앙을 갖게 된 그는 아씨시 부근의 한 교회를 지키는 가난하고 늙은 신부를 보고서 아버지 가게에 있는 값비싼 포목이며 말이며 다 내다 팔아 그 신부와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기행에 보다 못한 아버지는 일부 재산을 물려준 상속권을 회수하기 위해 법정에 세우기까지 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상속권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다 벗고는 그 옷들과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돌려준다. 이후 그는 저 유명한 극단적 청빈의 수도회 프란체스코회의 설립자가 된다.



프린서플 | 우리가 버려야 할 전대.

눅 10:1-11, 16-20 (c.f. 왕하 5:1-14; 시 30; 갈 6:(1-6), 7-16.)


모든 사람이 극단적인 청빈의 생활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모든 사람이 할 필요가 없는 것도 아니다. 프란치스코와 같이 예수님의 길을 좇아 극단적인 실천에 다다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건강한 경제생활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큰 기둥이 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본문에서 주님이 칠십 인을 세우셨다는 사실이다. 단지 칠십 인(seventy)이지 제자라는 명칭이 없다. 열둘을 세우고 있는 마태복음 보다 훨씬 보편화 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일꾼이 부족하다. 이 보편적 제자들에게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하시면서 당부하신 말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전대, 배낭, 신발을 가지지 말며


먼 여행을 갈 때는 배낭은 물론 어느 정도의 여비도 소지하고 떠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은 모든 것을 금하시고 신발도 갖고 가지 말라 하신다. 이는 무소유의 청빈을 어떤 미덕으로 설파하기 위함이 아니라 전대나 배낭이 필요 없는 복음 사역의 정석을 이르는 말씀이다. 먹을 것은 유숙하는 집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먹고, 배낭에 무엇을 받아 넣을 일도 없는 것이다. 걸식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일꾼’이 되라는 말씀이시다. 마땅히 받아먹을 수 있는 것도 일꾼이라는 전제일 때 가능하다.


(2) 영접하지 아니하면


영접하지 않으면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라고 말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불친절 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 복음이 갖는 가치를 이르는 말이다. 복음은 어떤 의미에서든 구차해져서는 안 된다.


(3)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본문은 집에서 집이 아닌 집에서 동네로 이동할 것을 권고한다.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공동번역)는 것이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1) 복음을 통해 뭔가를 사고 담으려는 것에 대한 경계, (2) 복음은 구원의 도구이지만 심판의 도구이기도 하다는 점, 끝으로 (3) 이집 저집 기웃거리는 태도에 대한 경계를 들 수 있다.


에필로그 | 프란치스코와 걸식 수도사들.


프란치스코가 추구했던 것처럼 청빈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요 가치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유행처럼 번져 걸식이 마치 무슨 트렌드처럼 된 때도 있었다. 모든 개념이 그러하듯 중요한 것은 본질이다. 


본문 가운데 해독하기 가장 어려운 말씀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핵심은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행보를 통해 엘리야와 엘리사를 읽던 누가의 게하시에 대한 경계이다. 가정 방문과 공적 장소를 제외한 “길에서 사람을 만나는” 사제의 속셈은 무엇인가? 엘리사의 제자 게하시는 병 나아 돌아가는 나아만을 쫓아가 돈을 받아냈다.


이것이 곧 “전대나 배낭을 휴대하지 말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다. 전대나 배낭에 돈이나 물건을 넣고 다니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사람을 만나러 갈 때 빈 가방(혹은 지갑)을 들고 가는 목적은 단 하나 거기다가 뭘 담아가지고 오려는 심산일 경우이다. 그것이 실제 지갑이든, 마음의 지갑이든. 본문은 이런 걸식을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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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10. 16.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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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에 게시되고 있는 “말씀 속에서” 아티클이 현재 7월분부터 밀려 있는 상태입니다. 7, 8, 9월분을 먼저 올려서 최근 아티클 발행 템포와 맞출까 하다가 우선 최근 것 템포를 맞춰 가면서 7, 8, 9월분을 섞기로 했습니다.



프롤로그 | 우리나라의 나병(한센병).


나병은 구약성서에서 천형으로 묘사되거나 문둥이라는 표현으로 전라/경상도 욕설일 정도로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런 멸시는 근대에도 계속돼 일제강점기 당시 소록도에 강제 수용해 그들의 인권을 짓밟았다. 당시 병원장은 환자들을 보살피는 선행을 베푼다고 언론에서는 미화되었지만 실제는 강제노역, 여성과 남성의 분리, 불임수술 등 악행을 저질렀다. 특히 일명 물방이라는 독방에 가두기도 했는데 방 구조가 문턱이 높고 고의로 물을 채워 넣은 구조로 이는 나병환자를 하루라도 빨리 죽이기 위한 고안이었다. 이 물방에 갇힌 나병환자는 겨울이 되면 물방의 얼음이 얼어붙는 바람에 얼어 죽기도 했다. 그 병원장은 살해당하였다.


광복이후에도 비토리섬이라는 곳에서는 토지소유문제로 분쟁이 발생 지역주민에게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질 정도로 그들은 비극의 역사를 걸어왔다. 이들의 처우가 개선된 것은 1965년 당시 소록도국립병원장이 소록도에 거주하는 환자들을 배려, 과수업, 양돈업 등으로 자립을 할 수 있게 하면서부터였다. 축구팀도 만들어 그들이 몸만 불편할 뿐, 정상인보다 못한 게 없음을 보여주었다.


나병은 2000년 경 법률적으로 한센병이라는 명칭으로 공식화된다. 나병과 한센병은 의학적 의미에서는 같으나 사회적 의미에서 다르다. 나병은 치료약이 없어 환자의 형상이 말기까지 진행되던 때의 명칭이라면 한센병은 치료가 되는 병으로서 의미가 있다. 리팜피신 600㎎ 1회 복용이면 3일 이내에 전염성은 없어진다는 사실이 오늘날 한센병 치료의 개가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강력한 항나제를 1980년대 초반부터 환자 전원에게 투여해 오고 있다. (원글: 위키피디아, 한국한센복지협회)


프린서플 | 복음의 가치는 순종인가 자유인가 (2)

본문: 눅 17:11-19. (c.f. 렘 29:1, 4-7; 시 66:1-12; 딤후 2:8-15.)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 구절(1-10절)의 내용을 통해 구조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 실족: 연자 맷돌/Me ------------->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1-4절)

- 믿음: 뽕나무/Gentile ------------> 바다에 심기우리라. (5-6절)

- 순종: 일하고 돌아온/종 ----------> 식사 수발/무익한 종. (7-10절) 


여기에다가 금주의 본문 11-19절을 같이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감사: 나병환자/Gentile ----------> 돌아온 Gentile/사마리아인. (11-19절)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지는 자는  “나”  입니다.

믿음으로 바다에 심기는 뽕나무는 “이방인” 입니다.

그렇다면,

일하고 돌아와 피곤함을 무릅쓰고 식사 수발을 드는 “무익한 종” 역시 “나” 입니다.

왜냐하면, 감사함으로 돌아온 사마리아인 나병환자와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의 자세한 내용은 https://www.facebook.com/pentalogia/posts/652781511420938)


이와 같이 “나/무익한 종”과 “사마리아인/돌아온 이방인”의 대조됨으로써 실족케 하는 무익한 종이 될 것인가 아니면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처럼 될 것인가를 핵심 문제로 던기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금주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나병환자, 그 돌아온 나병환자의 태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이 중요합니다.


(1) 멀리 서서(afar off)

그들은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말했습니다.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가까이 올 수 없어서 입니다. 그 대신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자비) 여기소서.” 라고 소리를 높여 구한 것입니다.


(2) 보시고(saw), 보이라(show).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셨습니다(saw). 그러시더니 제사장에게 하거 ‘너희 몸을’ 보이라(show)고 하셨습니다. 전혀 보여 주지 않으며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귀담아 들을 대목입니다.


(3) 가다가(set off)
그랬더니 그들이 가다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제사장들에게 닿아서 고침을 받은 게 아니라 가다가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출발 지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느 지점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set off, 즉 출발하자마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으로 보는 것이 더 원문에 가깝습니다. 출발하자마자 나은 것입니다.

(4) 돌아와(turned back)
그럼에도 10명 중 1명이 돌아오게 됩니다. 도착지에 거의 도착해서(돌아오기에는 먼 거리라서) 뿔뿔이 헤어졌다면 이해가 갈런지 모르나 출발하자마자 병이 나았는데도 1명만 돌아오고 만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그 본심의 차이가 확실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종의 근성인지 감사의 근성인지.
돌아온 그는 그냥 돌아온 게 아니라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 이 네 단계 과정에서 생각되는 자신의 적용을 이야기 나눠 봅시다.


에필로그 | 오는 것(to come)과 돌아오는 것(turn back).

지난주에 연하여 이번 본문 역시 자유에 관한 본문 입니다. 오늘날 종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Freedom과 Liberty, 즉 똑같은 자유이지만 여기서 형성되는 간극을 통해 우리는 여전히 억압하고 - 기꺼이 억압 받고 - 방종을 합니다. (이 Freedom과 Liberty에 관해서는 다음 아티클을 참조하세요: https://www.facebook.com/MiMoonChurch/notes)


지금까지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사입니다. 

“나”(연자 맷돌)는 바다에 “빠졌다”면 “뽕나무”(이방인)은 바다에 “심기어”집니다.

“나”(무익한 종)은 일하고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마리아인 거기다가 나병까지 걸린 이 사람은 “돌아와” 있습니다.


무익한 종에게 사용한 동사는 에이세르코마이, 나병환자 사마리아인에게 사용한 동사는 휘포스트레포로서, 후자는 “돌아와” 있는 것에 반해 전자는 아무 힘 안들이고 “들어와”(to come/to enter) 있는 것입니다. 무익한 종은 그냥 언제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감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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