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2.05.13 그 가지에 맺히는 열매는 무엇인가
  2. 2012.05.07 너희는 가지니
말씀 속에서2012. 5. 13. 17:27

 

저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프롤로그 | 세 개의 언어 

오늘은 퀴즈를 하나 낼까 합니다. 영어 잘 하는 제3세계(Africa) 학생 하나가 한국에 대학을 다니러 왔습니다. 인종차별 받는 그 외국인 학생은 얼마간 홀로 외롭게 지내다 친절한 한국인 학생 하나를 클래스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 한국인 학생은 영어를 썩 잘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그 클래스에서는 이 외국인 친구를 가장 잘 도울 수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한국 음식도 소개하고 근교 관광안내도 하고 무엇보다 둘은 항상 함께 앉아 수업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클래스에 한국인 학생 한명이 새로 들어왔습니다. 그 새로 온 학생은 외국인 학생을 보자마자 말을 건네는 것이, 영어 수준이 장난 아닙니다. 그 외국인 역시 종전 학생과 대화 나누던 때와는 딴 판으로 명쾌한 소통에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셋이 같이 있을 때면 유창한 영어로 대화하는 둘 사이를 그는 도저히 끼어들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셋이서는 절대 함께 대화할 수가 없었습니다. 즉, 세 사람에게는 세 종류의 언어가 존재했습니다. (1) 그 외국인과 영어 잘하는 학생과의 언어, (2) 그 외국인과 영어 잘 못하는 종전 학생과의 언어, 그리고 (3) 두 한국 학생들 간의 언어. 자 퀴즈 들어갑니다. 세 친구 중에 가장 소외당하는 친구는 누구일까요? 소외당하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해보십시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프린서플 | 그 가지에 맺히는 열매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님 자신은 참포도나무이시고 아버지 하나님은 농부이시며 우리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가지는 항상 붙어 있어야만 하고 붙어서 열매 맺되, 열매 맺는 그 가지는 더 많이 열매 맺게 하시려고 그것을 깨끗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무 가지의 열매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열매>에 관한 비유는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분포되어 있지만 여기 요한복음 본문 구간에서의 열매는 그 열매 간의 관계에 대한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친구>인 것으로 확정지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고 많은 관계 중에 왜 하필 <친구> 관계를 열매로 지목 하셨을까요? 

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v. 15a).

본래 하나님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표현이었습니다. 주인과 종-여기서는 죽여도 되는 종(dou,louj)을 말함-의 관계일 뿐인데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 선조들이 모세가 하나님과 교제 하는 것을 보고 “마치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더라”는 출애굽기 33장 11절, 그 최상의 관계를 실제로 실현하는 선언이셨던 것입니다. 모세와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마치 친구처럼 이야기 하는 사이/관계 말입니다. 친구이기 때문에 대화 할 수 있었던 게 아닙니다. 대화하는 그 자체가 마치 친구 같았다는 뜻입니다.

친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v. 15b).

부모도 나를 알고 형제도 나를 알고 선생님도 나를 아십니다. 그러나 친구가 ‘아는 것’은 좀 다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자들 보다 무심할 수 있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전자들보다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친구만이 갖는 그 남다른 ‘이해’가 좌우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과 나는 이해를 동반하는 관계여야 하는 것입니다.

친구로서 희생이 가장 큰 義(사랑)를 수립하기 때문입니다(v. 13).

본래는 창조주와 피조물, 주인과 종의 관계였던 것인데 높은 곳에 계신 분이 낮은 곳에 친히 내려 오셔서 그 독특한 열매 관계, 즉 <친구>가 되신 것은 그 희생이 높은 곳으로부터 억지로 된 파괴적 희생이 아니라 그 화목의 완성도를 지표 하는 겸손으로 이루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필로그 | 언어의 통일 

우리는 보통 사회적으로 세 가지 언어 형식, 곧 (1) 우등한 그룹 언어, (2) 열등한 그룹 언어, (3) 동등한 그룹 언어를 구사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우등한 그룹 언어는 때로는 우월하게 만들지만 때로는 비굴하며, 열등한 그룹의 언어는 때로는 희생적이지만 무시하며, 동등한 그룹 언어는 무성의하기 십상입니다. 이 언어들의 통일이 바로 친구됨으로써 열매 맺음의 관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5월13일 부활주일 후 제6주
본문, 요 15:9-15 .


'말씀 속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바이어던과 성령  (0) 2012.05.28
옴파로스  (0) 2012.05.21
너희는 가지니  (0) 2012.05.07
버린 돌  (0) 2012.04.30
의인과 죄인의 상대성 원리  (0) 2012.04.24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개별 복합 게시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Unported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Pentalogia
말씀 속에서2012. 5. 7. 21:58

 

저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프롤로그 | 접붙임

성서 가운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쓴 로마서라는 책에 보면 접붙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와 동지역 사람들인 유대인들이 오히려 이방인들 보다 복음에 배타적인 것을 빗대어 참올리브 나무 격인 유대인을 견책하고, 이방인들은 접붙여진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로서 독려하는 내용입니다. 이방인들로 하여금 참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져서 열심히 열매를 맺으라? 그러나 일반적으로 접붙임의 경우에는 일부러 야생 올리브 열매를 얻으려하지 않는 한 참올리브 나무에다가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를 접붙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야생 올리브 나무에 참올리브 나무 가지를 접붙입니다. 바울 선생이 잘 모르고 쓴 비유일까요?
접붙임이 성공을 하면 그 접붙인 부위 아랫부분은 기존 대목의 성질을 유지하고 그 접붙임 윗부분부터는 접붙인 가지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합니다. 즉, 배나무에다가 사과나무 가지를 접붙이면 배의 단맛을 지닌 사과가 열리고, 감나무에 개암나무 가지라는 것을 접붙이면 감 맛이 나는, 하지만 감보다는 크기가 작은 개암열매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원목이 어떤 나무냐가 아니라 가지가 어떤 가지냐에 따라 열매가 결정되어진다.” 이것이 바로 접붙임의 원리이며 여기에 우리 존재의 비밀이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프린서플 | 너희는 가지니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존 환경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를 가릴만한 유전학적 선택권이 없습니다. 나 자신이 출생한 원가지는 우월할 수도 있지만 열등할 수도 있습니다. 부유할 수도 있고 빈한할 수도 있고, 현명할 수도 있고 무지할 수도 있으며, 군자(君子)와도 같은 후덕한 원목을 자랑할 수도 있지만 실망스러움을 그 뿌리로 둘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은 유전학적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로써 결정됩니다. 그 은사는 바로 나무가 아닌 그 나무의 ‘가지’로서 능력입니다(사 11:1, 10; 롬 15:12; 렘 23:5; 33:15).

예수로 접붙임 되십시오(롬 11:17).

우리는 예수님의 출생 지역과는 다른 이방인들이지만 그분께 접붙임 되어 구속사 안으로 들어와 구원을 획득했습니다. 구속사에 들어와야만 그 구속사의 진액이 흘러 구원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구속사는 본래 유대인들의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지도 않았고 유대인과 같은 생활 방식으로 살지도 않았으며 그들 민족이 지닌 가치관과도 다른데 어떻게 구속사에 진입할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으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나무에 붙은 상태 그대로 계십시오(요 15:4).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지 나무로부터 떨어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밖에 던져져 마르고, 마르면 불에 던져져 타버릴 뿐입니다. 나무에 붙은 가지는 붙었다 떼어졌다 하는 게 아니라 붙은 상태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있는 상태입니까 떨어져 있는 상태입니까? 붙어 있다면 붙어있는 상태를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의(義)의 가지가 되십시오(요 15:3).

의의 가지가 됨으로써 그분께 붙어있음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진액 자체가 義이기 때문입니다.


에필로그 | 우리는 ‘가지’ 그 자체 입니다(요 15:5).

배나무에 접붙인 사과나무 가지에 사과가 열리고, 감나무에 접붙인 개암나무 가지에 개암열매가 열리듯 그 가지에는 고유한 성질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액을 통해 의로워졌지만 우리가 지닌 속성 곧, 우리 혈통의 계보는 우리 몸속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부모님의 아들․딸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계보가 義의 가지 된 우리로 말미암아 황금가지(Golden Bough)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5월6일 부활주일 후 제5주
본문, 요 15:1-8 .


'말씀 속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옴파로스  (0) 2012.05.21
그 가지에 맺히는 열매는 무엇인가  (0) 2012.05.13
버린 돌  (0) 2012.04.30
의인과 죄인의 상대성 원리  (0) 2012.04.24
무엇이 기쁜가, 무엇이 부끄러운가  (0) 2012.04.18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개별 복합 게시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Unported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