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3. 6. 10.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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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아합의 아버지.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지면서 남쪽은 유다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북쪽에서 가져다 썼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대로 남 유다는 다윗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지만 북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다윗의 이상을 이어 받지 못한 것으로 성서는 기록한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그들에게는 왕위를 둘러싼 정변이 계속되었다. 여로보암이 북 이스라엘을 설립한 이래 열 아홉 명의 왕이 바뀌는 동안 여덟 명이 살해 당했고 다섯 번의 큰 정변이 발발했다. 200년 새의 일이다.


남 유다보다는 땅도 많이 차지했고 인구 수도 더 많았지만 북 이스라엘이 외국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위치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항상 국가 존립의 위협과 마주 섰던 여로보암의 후예들은 어떤 이상과 정통성을 유지·발전시키겠다는 이데올로기 면에서는 상대적 열세를 면할 수 없었는데, 그에 따른 영적 이질감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측면을 넘어 문화적이고 신앙적 유연성으로 폭넓게 번져 나갔다. 아합 왕과 이세벨이라는 인물은 이런 배경 속에서 등장하는 것이며, 아울러 엘리야와 엘리사 같이 그들을 견제하는 강력한 선지자들도 잇따라 출몰하기에 이른 것이다. 


비록 722년경 멸망 당하지만, 북 이스라엘 왕조 가운데 아합의 아버지인 오므리의 왕조는 강력한 왕조였다. 이세벨이 상징하듯 정략 결혼을 통해 안정과 번영을 누렸으며 그에 따라 군사력도 강대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윗 보다도 지명도 있는 왕조였다. 역사에서만. 


프린서플 | 사라지는 체험 남게되는 체험.


역사라는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세속적 용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역사적’이라는 말이 신앙적 조어로서 들려오면 현대 그리스도인은 뭔가 확실한 증빙이 붙은양 의미심장하게 받아 들인다. 하지만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믿지 않겠다’는 공리를 깔고 있다. 그래서 관념어에 강한 독일어 같은 경우는 실제 발생한 역사로서 히스토리에(Historie)와 전설 따위로서 역사, 게쉬히테(Geschichte)를 구별해 쓰기도 한다. 예수는 히스토리에지만 부활은 게쉬히테라는 식이다. 그렇지만 부활을 설령 게쉬히테라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가령) 내가 누군가와 만났다는 사실은 분명한 나의 히스토리에임에도 나에게 관심이 없는 저들에게는 내가 그와 백번을 만났다한들 게쉬히테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히스토리에든 게쉬히테든 내가 사랑하는 그(녀)와 만났다는 경험이 달라질 것은 없는 이치이다. 


본문에서 한 과부의 가정이 엘리야라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삶과 죽음의 체험을 했던 경험은 엘리사를 만난 과부의 가정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만난 과부의 가정이 체험한 바로 그것은 우리 각자 삶의 체험 속에서도 영구히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요건을 띠며 임한다.


죽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오다.


엘리야는 과부의 아들을 죽은 상태로 받아 안았고, 엘리사는 죽은 아이를 자기의 침상에 드러뉘였으며, 예수께서는 나인 성에서 죽은 아들을 데리고 나오는 과부에게 다가가 불쌍히 여겼다. 


죽은 것을 하나님의 사람이 살려서 돌려주다.


엘리야는 아이 위에 자기 몸을 3회 펴서 엎드리며 기도했고, 엘리사는 3곳 즉 입과 눈과 손을 맞대고 기도했으며, 예수께서는 죽은 자에게 직접 말로 명하여 살리셨다. 그리고는 살아있는 상태로 돌려주셨다(왕상 17:23; 눅 7:15).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엘리야를 만난 과부는 아이를 살린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이란 칭호를 고백한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칭하던 과부의 아이를 살린 것이다. 예수께서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셨을 때는 모든 사람이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고 하였다. 


에필로그 | 다윗 왕가와 오므리 왕조.


인간의 삶은 두 번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한번은 자기 체험(Geschichte) 속에서, 그리고 타자의 회자(Historie) 속에서. 그리하여 어떤 것은 구속사에 산입 되는가 하면 어떤 것은 역사에서 조차 잊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우리가 경험했던 체험 속에서 영구히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누군가의 체험과 연결되는 것 뿐인데, 특히 사르밧 과부, 수넴 여인, 나인 성 과부처럼 하나님의 사람과 연결되었을 때 그 체험과 존재는 영원한 것이 된다. 다윗과 오므리 왕조의 역사적 편차도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미지 참조:

wikipedia.org.jpg
www.biblicalarchaeolog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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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6. 4.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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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NCD Vs. Finding Organic Church.


과거 NCD라는게 있었다. (지금도 있지만 과거만 못하기에.) 크리스티안 슈바르츠가 만든 이말을 우리나라에 들여올 때 자연적 교회 성장(Natural Church Development)이란 이름으로 들여왔다. 마이너스 성장하는 당시 개신교 환경 속에서도 신흥 메가쳐취의 패러다임을 주도했다. 


그 열풍이 지방 중소형 교회에 한창 일 무렵 프랭크 바이올라라는 사람이 쓴 책 하나가 Finding Organic Church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한 때 아마존 베스트셀러 12위에 랭크 된 이 책의 제목은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NCD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1) Natural, Organic, (2) Development, Finding, (3) Church, Church. 세 쌍의 시니피앙도 같고 의미도 같고, 그리고 무엇보다 기존 교회의 구태 패러다임을 파격적으로 탈피시키겠다는 케치프레이즈도 같다. 


NCD의 경우는 자연적 성장의 특질을 ‘지도력’, ‘사역’, ‘영성’, ‘교회조직’, ‘예배’, ‘소그룹 활용’, ‘전도’, ‘인간관계’ 8분야로 특징 짓되, 특히 소그룹의 활용과 효과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NCD도 이 과정에서 초대교회처럼 작은 교회를 지향하고 바이올라의 책도 초대교회 같은 작은 교회를 지향하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메가쳐치에 효험이 있고 후자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아마도 Development를 Finding 곧 ‘확립’, ‘발견’으로 번역하지를 않고 단지 ‘성장’이라고 오역하는 바람에 초래된 결과 같다. 한편, Finding Organic Church는 자연적 교회(Organic Church)에 반하는 그 특질을 다음 8가지로 규정한다. 

The glorified bible study(미화된 성경공부),
The special interest group(특별 이익집단 모임),
The institutional home church(제도화 된 가정교회),
The personality cult(개인 숭배),
The bless-me club(자기 수집품적 모임),
The socially amorphous party(사회적으로 모호한 집단),
The disgruntled malcontent society(불만에 찬 불평분자 집단),
The unwritten liturgy driven church(비성서적 예배가 이끄는 교회)


프린서플 | 다른 복음은 어떻게 식별되는가.


우리 나라 경제성장에 발맞춰 급성장한 기독교가 지나치게 귀족화되고 세속화되자 여기서 낙오되고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을 틈타 시한부종말론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때가 1992년이다. 엄청난 파장을 불러온 이 휴거소동이 해프닝으로 끝나버리는 바람에 종말론이나 은사주의는 당분간 소강 상태인 채 물러난다. 대신에 기독교는 이에 대한 반동으로 사회와의 문화적 소통에 상대적 관심을 돌리게 되는데 그런 과정에서 다양한 열린예배 형식이 모색되고 중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문화엔진을 장착한 강력한 패러다임 틀이 교회로 유입된다. 때를 같이해 2000년대 초 서구의 다채로운 성장 모델이 수입되면서 과거 국가 성장기 때와는 차원이 다른 기술적 프로그램들이 속속 도입된다. Cell, 목장, 소그룹운동, 총동원...이런 용어들이 거의 모든 교회에서 목격되며 NCD라는 이름도 이때 접한다. 그러나 지금은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 아랍권 체제의 붕괴, 기아, 천재지변, 그로인한 원전폭발 재앙..., 누구도 통제할 수 없고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세계를 덮치고 있다는 불안감 속에서 기독교는 지엽적 이데올로기형 종교, 웰빙·웰다잉 종교,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꿔입은 종말론과 은사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진리에 참되려면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대결 상황을 안 떠올릴 수가 없다(왕상 18장). 바울은 본문에서(갈 1:1-12) 다음과 같이 그 식별 방법을 제시한다.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다.


저마다 “사람 뜻 따라 된 것이 아니라”고 하기에 분별이 어려운 것같지만 바울처럼 자기 됨이 어디까지나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즉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았다”고 하는 확실성이 있으면 구별할 수 있다.


다른 복음은 없다.


당시 바울이 “다른 복음”이라고 했던 그 복음은 예수를 믿는다 할지라도 전통에 의거 할례까지 추가로 받아야 완성된 믿음이라고 가르치던 그 복음을 말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대결(왕상 18;20-21) 당시 훼파 대상이었던 그 편에 바울이 위치 되고 마는 셈이고 (왜? 바울의 복음은 이방인의 복음이니까) 바울이 “다른 복음”이라고 진노했던 그들이 도리어 과거 엘리야 편에 서 있던 전통 이스라엘이 된 상황이다. 


이같은 다름(difference)의 발생을 어떻게 오늘날 적용할 수 있을까? 그런 식의 다름이라면 오늘날 동성애도 WCC도 자연스레 허용해야 된다는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시간의 지연과 거기서 오는 차이(difference)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복음이 엘리야의 자리를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바울의 다름은 <변화>였고, 전통의 자리에 섰던 그들의 다름은 <변질>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할례라는 전통을 차별의 용도로 전락시켰으니까.)


포스트 모더니즘 즉, 해체의 시대에 다름(difference)은 늘어지거나 지연될(différer) 때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제아무리 자신이 달라지지 않았다 주장하더라도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 그것은 거짓말이다. 달라지지 않은 자가 있던가? 새삼 자연적”, 유기적”이란 말은 해체의 다른 말이 아니었던가? 문제는 어떻게 달라지느냐인 것이다. 변화인가 변질인가.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에도 변치 않는 게 있기는 하다. 에크리튀르, 즉 ‘흔적’이나 ‘자국’은 남게 돼 있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성서라고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다.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거나 배운 게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직접 계시라는 말인데 ‘다른’ 직접계시와는 또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바울, 그의 생애로 보나 문법적으로 보나 그 계시는 한 마디로 ‘변화’를 말한다. 변화가 계시이다. 그렇기에 바울의 계시로서 그의 변화는 오랜 기간 집중받아 온 것이다.


에필로그 | 집합을 위한 분할인가 집단을 위한 분할인가.


자연적 교회(Natural Church)와 유기적 교회(Organic Church)는 둘 모두 초대교회를 표방한다고 하였다. ‘작은 것’, ‘분할된 것’을 지향하는 면에서도 같다. 그래서 ‘흩어지고,’ ‘모이는’ 교회로서 유연성도 같게 나타난다. 하지만 그 분할이 꾀하는 ‘전체’ 내지는 ‘집합’에 관한 문제가 둘을 가른다. 그 분할이 1인을 위한 집단으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분할된 1인들이 집합 자신으로 존재하는 지의 문제는 엘리야가 850명의 바알 사제를 맞닥뜨린 현장과도 같은 것이다. 




이미지 참조:

www.ely.anglican.org
dallasnaz.com
joinedtoh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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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5. 30.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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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소망 Vs. 희망.


소망(所望)과 희망(希望)은 다른 말일까? 국내 개신교에서는 희망이라는 말 보다는 소망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공동체에서의 사용 빈도수도 그렇지만 성서번역에도 그러하다. 신약성서 기준으로 개역한글에서 48회 정도가 소망으로 번역되는 동안 희망은 단 한 번 쓰였고, 표준새번역에서는 소망이 45회 희망이 13회 채택되었다. 그리고 새번역의 소망은 45회이고 희망은 14회다. 공동번역만이 59회 모두 희망이라고 번역했고 소망은 단 한 건도 채택하지 않았다. (개역개정은 개역한글과 같다.) 


참고로 히틀러 치하의 유대인들을 도왔던 래지스탕스 출신 자끄엘륄은 소망과 희망을 구분해서 쓰는 학자다. 에스뻬랑스(espérance)와 에스쁘아(espoir)가 그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에 espérance를, 그리고 무의미한 현대인들의 기대를 espoir로 구별하는데, 그의 책을 번역하면서 관련 학회는 역시 긍정적 전자의 기대감을 ‘소망’으로, 후자는 ‘희망’으로 구별해 번역한 듯하다(c.f. 한국자끄엘륄협회 주).


아마도 그것은 한자로만 볼 때 앞의 ‘소(망)’는 공간적 목표점을 가르키는 뉘앙스가 강하지만 ‘희(망)’는 공간적 지형을 배제한 유토피아 뉘앙스가 강한 낱말로 판단해서인 것같다. 그러나 유토피아 utopia는 분명 “장소”(τοπος)라는 말에 “없다(ου)”라는 부정 접두가 붙은 말로서 실제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뜻하기에 “도달할 수 없는” 허구를 가르키는 현대적 허구와 부합할 수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강한 의지로 반영될 때 기대에 대한 강도는 전자보다 더 증가될 수 있다 하겠다. 즉 에스빼랑스가 되는 셈이다.


프린서플 | 왜 소망 너머에 희망이 있는가.


고대 희랍인들은 인간이 지닌 기대감의 종류를 ‘욕구’, ‘욕망’, ‘갈망’ 그리고 ‘희망’ 순으로 열거했다. 욕구(όρεξης)는 appetite(배고픔)이다. 갈망(επιθυμία, desire)은 wish 같은 것을 말한다. 그리고 욕망(θυμός)은 anger(분노)와 동의어다. 분노가 욕망인가? 분노는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유추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희망(βούλησης)이다. “will”, “의지”, “뜻”을 이르는 말이다. 나머지 셋은 모두 처음 것인 욕구를 가장 밑에 깔고 있다. 희망 역시 욕구의 일종인 셈이다. 하나의 공이 다른 공을 쳐내듯이 무절제한 경우 하나의 욕구는 다른 욕구를 넘어서는 차원에서의 희망이다.


그러나 희랍인들의 언어를 사용했던 신약성서 저자들은 이와 같이 ‘내다보고’ ‘기대하는’ 감정과 행위를 표현할 때, 이상 모든 낱말들과는 별개의 엘피스(ελπίς)라는 말을 채택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본문(롬 5:1-5)에서 희망을 산출하고 있는 방법을 묵상할 때 이해될 수 있다.  

환란은 인내를 산출한다.


초대교회의 환란은 물리적 박해에서 비롯되었다. 물리적 박해를 받는다고 정신이 편안한 것은 아니다. 물리적 고통은 당연히 정신적 고통도 수반한다. 그러나 정신적 고통은 그 물리적 환란이 두 번, 세 번... 계속되는 ‘반복’ 속에서 물리적 고통을 압도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정신이 처한 상태를 ‘인내’와동일 상태로 보는 것이다. 이로써 물리적 환란이 정신적 환란을, 정신적 환란이 인내를 산출한다.


인내는 연단을.


정신적 환란에서 산출된 인내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은 시간이다. 인내가 시간을 상실했을 때 그것은 굳는다. 다시 물리적 상태 즉, 인내가 견고함(steadfastness)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는 이유다. 이로써 최초의 환란은 연단이라는 제과정으로 완전히 탈바꿈 되어 이제는 새로운 것을 바라볼 준비를 완료하게 된다. 그래서 인내라는 말은 ‘증거’라는 말도 되는 것이며(고후 2:9), 연단이라는 말은 ‘체험’이라는 말로도 치환되는 것이다. 왜? 체험이 증거이고 증거가 체험이니까.


연단은 희망을.


소망, 희망에서 ‘소’와 ‘희’는 다르지만 ‘망’은 같다. ‘망’은 亡과 月과 王이 합쳐 된 말이다. ‘망함’과 ‘달’과 ‘왕’. 이 한자어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달’일 것이다. 주기적으로 새롭게 되는 달의 ‘새로움’은 유서 깊은 관조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달아나 버릴지라도 언제나 새로음이 싹트고 있는 것이다. 


에필로그 | 희망의 내용.


아이러니하게도 성서 저자가 채택한 엘피스(ελπίς)라는 단어는 좋은 것(good)뿐 아니라 나쁜 것(evil)에 대한 기대감이라는 뜻을 함께 갖고 있다. 왜 나쁜 것에 대한 기대감일까? 그리고 또 왜 그런 어정쩡한 단어를 채택했을까? 예컨대 엘피스는 호기심으로 상자를 연 판도라가 슬픔, 질병, 싸움, 고뇌 등 온갖 나쁜 것들이 튀어 나오는 바람에 절망의 늪에 빠져있을 때 가장 마지막으로 뒤늦게 올라온 것, 바로 그것이다. 그때 엘피스라는 단어를 썼다. Hope의 또 다른 희랍어인 블레세스(βούλησης)의 경우는 가장 밑바닥에 욕구를 깔고 있지만 엘피스는 그 자신이 가장 밑에, 가장 마지막 순서로 깔려있다. 엘피스는 언제나 그러하다. 누구에게나 미래는 판도라다. ‘pan’은 ‘모든’이며, ‘dora’는 ‘선물’이다. 모든 선물. 슬픔, 질병, 싸움, 고뇌, 우리는 고를 수 없다. 다만 가장 마지막에 엘피스가 깔려 있다.


그래서 환란, 인내, 연단, 희망 순인 것이다. 이것이 엘피스라는 희망이 두려움이라는 의미를 갖는 이유이며, 신약성서 저자가 엘피스를 채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아울러 본문 v.5에서는 그 희망의 궁극적 내용을 말하고 있다. 바로 “성령으로 사랑을 부어주셨다”는 내용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 곧 엘피스인 것이다. 


* 그런 점에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 이라는 말을 믿음과 소망 보다 나은 것이 사랑이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은 넌센스다. 가장 마지막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미지 참조:

www.historyforkid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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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언어의 붕괴.

“어떤 민족들이 역사에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사용한 언어를 재구성해 그들의 풍습, 제도, 계통, 인종 등을 밝힐 수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언어의 공통성으로부터 혈족 관계를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 즉 어족이 인류학적 종족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게르만 민족을 가정해보자. 그들 특색은 뚜렷하다. 금발, 긴 두골, 큰 키... 스칸디나비아형이 가장 완벽한 그들 형태다. 그러나 게르만어를 말하는 모든 주민들이 이 특징에 부합한다고 할 수는 없다. 알프스 산맥 아래 알레마니아인은 스칸디나비아인과는 아주 다른 형태다. 그렇다면 한 고유언어는 본래 한 인종에게만 속하고 그 언어가 타 민족에 의해 쓰여진다면 정복에 의해 그들에게 강요되었다고 해야하는 것일까? 물론 로마인에게 정복당한 고올인처럼 정복자 언어를 채용하거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종족들이 있음을 종종본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게르만어의 경우, 수많은 이민족을 굴복시켰다 할지라도 이들을 모두 병합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혈족 관계와 언어 공통성과는 그 어떠한 필연적 관계도 없어 보인다. 따라서 인종의 단일성이란 언어 공통성의 이차적 요인이지 필수적 요인은 전혀 아니라 할 수 있다. 다만, 다른 단일성이 있는데 그것은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서 유일하게 본질적인 것인 바, 사회적 유대에 의해 구성되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민족성이라 칭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의는 최고의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언어와 혈족 또는 민족성에 관한 정의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창세기 바벨탑 사건은 철저한 시스템의 붕괴로 이해될 수 있다.

프린서플 | 방언은 왜 이상한 말(glossolalia)인가?

“아주사Asusa) 거리에 있는 한 초라한 오두막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다. 이상한 교리를 믿는 신자들이 극도로 광적인 예배를 드리며, 대단히 급진적인 교리를 설교하고, 거의 정신이상에 가까운 극도의 흥분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 회중들은 흑인과 약간의 백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시간 동안 몸을 앞뒤로 흔들며 울부짖으면서 그 신자들이 신경을 자극하는 기도와 간구를 드리기 때문에 밤만 되면 그 지역의 주민들은 공포에 휩싸인다고 한다. 더욱이 그 신자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았으며 그 이상한 소리를 이해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Los Angeles Times Apr. 18, 1906, p. 1)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만나는 은사주의 형식의 원형으로 꼽히는 한 집회의 현장 스케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날 때는 바울의 로마서를 통해 만나듯이, 우리가 바울의 로마서를 만날 때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만나듯이, 본문에(행 2:1-21) 나오는 오순절 장면을 오늘날 만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게 보편적 교회사 시각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직전 중세교회 시스템 붕과가 있었듯이, 위의 아주사 사건 직전에는 경건주의 시스템 붕괴조짐이 보였듯이, 오늘날에는 안타깝게도 은사주의를 포함한 총체적 시스템 붕괴로 돌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붕괴된 시스템의 복원이 오로지 “듣기” 기능과 맞물려 있다고 전합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부지런함으로 듣는다.

우선 ‘눈치’라는 말로 이해하면 쉽겠습니다. 두려워 눈치를 보거나 약삭빠르게 눈치를 본다는 부정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부지런하게 듣는 사람은 보다 능동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며 관계 형성의 큰 밑거름이 됩니다.  


신뢰로 듣는다.

신뢰가 상실되면 어떤 말을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행동으로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듣기의 구조는 신뢰 입니다.


영으로 듣는다.

이것은 가장 우월한 듣기의 형식으로 설명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자기 혼자서만 들을 수 있는 듣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혼자서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혼자서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모세도 그랬으며 바울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에필로그 | 언어의 복원은 관계의 복원.

그러므로 방언의 본질은 그 말의 어떤 신비로운 해석에 있는 것같지만 실상은 이상한 말(glossolalia) 그 자체에 더 의도된 목적이 있습니다. 모든 관계의 궁극적 복원은 듣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부모 자식, 부부, 가정, 교회, 사회, 국가, 그 모든 듣기의 관계 복원에 기여해야 사도행전 2:1-21 사건의 본령에 응한다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자인 누가(Luke)가 오순절 성령강림 이 지점을 창세기 바벨탑에서 발생한 문제의 복원으로, 그렇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지 참조:

thetowerofbabel.net
S-a-q-u-a-r-i-u-s.deviantart.com
wikipedia.org
www.answersingenesis.org
images.yourdictiona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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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5년만 있으면 종교개혁 500주년. 잘했든 못했든 500년 전에 루터가 한번 끊어준 덕택에 바울의 복음이 2000년을 지탱할 수 있었다. 원효의 불교도 한 1400년 존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복음은 100년 좀 넘었는데..., 휘청휘청 하는데다가 이게 무슨 색인지가 모호하다.

프롤로그 | 바울의 행로.



프린서플 | 못하게 하다. 허락하지 않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책입니다. 사도행전은 성육신하셨던 예수님의 지상사역이 모두 끝난 후 그 다음에 진행되었던 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활동인물은 모두 사람이지만 성령의 사역을 중심으로 쓰고 있습니다. 계시록을 제외하고 그 외 문서는 대부분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중 바울을 필명으로 하는 서신이 13개이며, 그 가운데서도 전혀 논란 없는 바울의 친필 서신을 학자들은 7개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후대의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은 글들을 보고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그 분이 하신 일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시대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확장시켜나갔는지를 파악합니다. 특히 사도행전은 그리스도교가 지중해 연한의 팔레스타인이라는 한 지역에서 시작해 로마라는 세계도시로 상륙하기까지를 소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어떤 계획이나 전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이었다는 증언들로 곳곳에 스며있는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다음과 같이 파악합니다. 



못하게 하다. (v.6)


바울 일행이 원래는 아시아로 가려고 했던 것같습니다. 그러나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막은 것은 성령이라고 못을 박아두고 있습니다. 바울이 임의로 한 것이 아니라 또렷한 성령의 의사였다는 것입니다. 

왜 아시아로 가는 것을 막으셨을까요?  


허락하지 않다. (v7)


못하게 하는 것(금지)과 허락하지(방치·묵인) 않는 것은 방향성에서 같지만 양자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이럴 때에 우리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역사를 어떻게 파악 할 수 있을까요? 그 영이 나타나서 육성 혹은 육안으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러한 소통은 다음에 하게 됩니다.


환상을 보다. (v. 10a)


베드로 같이 바울도 특별한 계시를 받습니다. 베드로는 꿈에서 고넬료 쪽 사람들을 보았고 바울은 환상으로 마게도냐 사람들을 봅니다. 그것이 꿈이냐 환상이냐는 중요한 가름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주도하는 전 여정 속에서 그 인도하심을 파악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정을 하다. (v. 10b)


바울은 비로소 성령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환상에서 도와달라고 부른 것은 마게도냐인들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라고 바울이 파악을 하더라는 사실입니다.   



에필로그 | 아시아로 먼저 들어왔다면.


바울의 복음이 아시아로 강제로 밀고 들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이미지 참조:

modernreject.com
www.washedred.com
small-www.sophiainstitu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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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