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속에서2013. 11. 6.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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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를 문맥 속에 놓고서 설명하는 이 유명한 믿음의 구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 히브리서의 믿음을 토대로 부정적 예시의 제사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겠다.


(1) 욥의 제사: 유비무환, 확실히 해두자. 


욥은 자녀들을 위해 (또는 자녀들로 하여금) 빈번하게 제사를 드리게 했다. 자녀들이 파티를 끝내고 돌아오면 차례대로 그들을 불러다가 깨끗함 받도록 제사를 드렸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들 명수대로 (한 제물로 한 번에 드리는 제사가 아니다) 번제를 드렸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하였다.


(2) 사울의 제사: 빨리빨리, 또는 책임소재 미상. 


사울이 권력에서 밀려나게 되는 단초는 사무엘과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사무엘과의 갈등은 한 제사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사울은 급한 전투를 앞두고 있었는데 언제나 그랬듯이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 싸우러 나가야 했다. 그런데 제사를 집례 해야 할 사무엘이 약속한 날짜에 나타나지를 않는 것이다. 기다리다 지친나머지 사울은 단독으로 제사를 감행했다. 사울의 불법이라고 말하지만 그의 입장에서 항변한다면 그는 명시적 ‘왕’이라기 보다 사사의 한 사람으로서 제사 집례가 아예 불가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순종하지 않았다’는 명시적 과오 외에도 총체적 책임소재의 미상인 제사였다. (왕의 제도가 도래하기까지는 사무엘의 자식관리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3) 엘리의 제사: 제사보다는 젯밥에 더 관심. 


엘리의 아들들은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을 가지고 오면 태워서 제사 드릴(번제) 고기를 미처 태우기도 전에 날것으로 강탈해 가곤 했다.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려도 강제로 가져간 것이다. 이때 엘리 제사장은 귀가 잘 들리지를 않았다고 성서는 기록한다.


(4) 가인의 제사: 반 믿음(Anti-faith)의 제사. 


가인과 그의 제사는 ‘실패한 예배’의 모든 예배의 표상이다. 제사 직후의 이야기들로만 채워져 있어 자인과 아벨의 제사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두 개의 목소리가 등장할 뿐이다. 가인의 마음과 판단력 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목소리, 그리고 하나님의 판단하심 속에서 등장하는 아벨의 목소리. 여기서 믿음의 제사와 반(反) 믿음의 제사로 갈리는 것이다. 



(5) 히브리서에서 제시하는 믿음의 제사.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믿음의 제사는 위 네 가지 제사들이 아닌 것을 말한다. 특히 저 유명한 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바라는 것을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다. 자동차? 집? 명예? 각종 환경과 사물의 물리적 형체를 떠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실상”(휘포스타시스)은 바라는 그것들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문장이다. OK?


. 실상 ≠ 바라는 것

. 실상 = 믿음


(* 실상/휘포타시스는 1:3 그 본체의 형상이라는 말에서 “본체”와 같은 말이다)


즉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파괴하고 공백으로 비워버린다. 믿음은 과정이나 수단이 아니라 본질이라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자동차나 자동차나 명예가 과정이고 본질이 믿음이라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공백인 셈이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벨의 소리 없는 목소리의 원리인 것이다. 그래야 천국이제.



* 2013.8.11일자 설교, 믿음과 반(反) 믿음 | 히 11:1-3, 8-16. (c.f. 사 1:1, 10-20; 시 50:1-8, 22-23; 눅 12:3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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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11. 5.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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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익명(Anonymous)에 대한 문자적 유래 입니다. 

Anonymous(어나니머스)는 onym이라는 말에 an이라는 접두어가 붙어서 된 말이다. onym은 name의 어근이다. onyma은 onoma와 더불어 희랍어로서 onym에서 'o'가 탈락되고 음가를 통해 name이 되는 과정을 거쳤다. ous는 ‘있는’(full)이라는 접미이고 a(n)는 부정(not)이다. 이렇게 해서 이름(onym/name)이 없다(an/not)는 뜻 즉, ‘이름을 숨긴’을 뜻하는 ‘익명의’라는 어휘가 태어나 ‘가명의’라는 뜻은 물론 ‘무명의’(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특징이 없는’(이름을 붙일 수 가 없는)이라는 뜻으로까지 사용되었다. ous가 빠진  anonym은 ‘가명, 변명, 익명, 작자 불명의 저작’이라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그리고 anonymous에서 an을 제거하면 ‘이름이(onym=name) 있는(ous=full)’으로 쓰면 ‘이름을 밝힌’이 된다. 또 접두를 바꿔서 몇가지 단어가 나온다. acronym은 ‘이름(onym)의 첫 글자(acro=head)’라는 뜻에서 ‘두문자어’가 되었다(AIDS같은-). allonym은 ‘다른(all=allo=other) 이름(onym=name)’이라는 뜻에서 ‘필명’(남의 이름으로 출판된 작품) 등의 말이 되었다. antonym은 ‘반대되는(anti=against) 이름(onym=name)’이라는 ‘반대말’로, synonym은 ‘같은(syn=same) 이름(onym=name)’이라는 ‘비슷한 말’로, homonym은 homo(same)가 붙어서 ‘동철이의어’이 되었다(can[깡통]과 can[할 수 있다]의 예). patronymic은 ‘patro(father)’와 결합되어 ‘아버지의 이름을 딴’이라는 뜻으로, pseudonym은 pseud(거짓의, 가짜의)와 결합되어 ‘익명, 아호’의 뜻으로 활용되었다. 이상 anonymous의 용법이다.


다음은 그 익명에 대한 몇 가지 예시입니다.

(1) 조직이나 집단 속에서


우리는 어떤 조직이나 집단에 속해서 나의 뜻을 관철 시킬 때, “누가누가 이렇게 말하더라”(“-카더라”: ○○가 ~라고 하더라)는 식의 문장을 만들어 의견을 발의하고, 제시하고, 대변하고, 반론하고, 관철시킵니다.


(2) 가난한 자와 약자 앞에서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붓자, 제자 중 하나(가룟 유다)가 책망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가난한 자는 가룟 유다가 사용하는 익명입니다. 즉 삼백 데나리온은 가난한 자가 아닌 자기가 갖고 싶은 재물인 것입니다. 


(3) 형제 앞에서, 아버지 앞에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가인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요셉을 해한 형제들은 요셉의 옷을 아버지에게 가져나가 보이면서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라고 말합니다. 가인은 자신을 “아우를 지키는 자”라는 익명 속에 자신을 감추고, 동생을 해한 형제들은 자신들이 해한 동생을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익명 속에 감춥니다.


(4) 원시인들의 경우


다음은 민속학적 고찰인데, 미개인이나 원시인들은 자기 종족의 왕을 뽑을 때 경건하게 뽑습니다. 어찌나 경건하게 생각하는지 왕이 쓰던 물건에 자기 신체가 접촉하기라도 하면 큰 일이 날 것처럼 여길 정도입니다. 어느 날 왕의 쓰던 물건을 자기도 모르게 접촉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걸 안 순간 며칠을 시름시름 앓다가 실제로 죽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같은 신적 권위가 있는 왕에게는 중요한 임무가 하나 있었습니다. 종족의 안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하늘에서 비가 오게 하는 것까지 포합됩니다. 가뭄이 들면 그 왕은 어떻게 해서든 대개 비가 오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날은 아무리 해도 비가 안오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왕을 세운 종족은 가차없이 그 왕을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왕을 세웠습니다. 그런 식으로 다른 왕을 세워 나갑니다. 다시 말하면 이들에게 있어 왕은 욕구와 그 앙갚음의 익명의 대상인 것입니다. 


위에 열거된 예시들은 모두 익명(anonymous)에 관계된 인간이 갖는 행태입니다. 


(5) 십자가에서


그 익명성을 모두 제거하고 일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드러냈고, 또한 자신의 실체를 밝혔으며,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익명이 아닙니다. 그의 실명 나사렛 예수께서 달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달리실 당시 그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것은 위에서 열거된 전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익명성인 것입니다. 즉 익명이 아닌 실명으로 하였지만 그것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철저한 희생일 때 형성되는 익명성입니다. 


이것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의 본질이며, 그래서 이름(onym)은 그와 같이 우리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2013.7.28일자 설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 눅 10:1-4; 골 2:6-15 (c.f. 호 1:2-10; 시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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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11. 4.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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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소개했던(지난 2/25과 2012/07/02 ) 그림을 다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GO는 ‘자부심/자존감’이라는 뜻에서 ‘자아’라는 심리적 의미까지 폭넓게 쓰입니다.

ECO는 ‘환경’이라는 뜻입니다. ‘집’이라는 어원에서 왔습니다.

아래 그림은 사실 ‘이기주의’(EGO)를 지양하고 조화로운 환경(ECO)을 지향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지만 성서는 여전히 자아를 통해서 환경에 이르는 전통을 진리로 취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파워 블로거가 날이면 날마다 ‘신사참배’와 ‘독재’ 청산만 외쳐대는 걸 보고서 “그럼 다니엘과 예레미야도 친일파입니까?”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돌아온 답은 “네 친일파입니다.” 이 답을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이런 ‘호로 자식을 봤나-’라는 생각이 들어 이후 그를 기억에서 꺼 버렸다.


친일, 신사참배, 군사독재.., 이런 어휘들을 동의어처럼 사용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우리 민족이 지닌 기본 EGO의 혈액까지 통째로 뽑아낼 기세로 달려드는 바람에 마치 내가 친일, 신사참배, 군사독재를 찬양하는 자처럼 만들어버리는 EGO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 다니엘은 자신의 자아(EGO)를 통해 세계(ECO)를 본다. (단 7:1-3, 15-18)



다니엘은 소년기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왕이 여러 차례 바뀌도록 압제자 나라의 중요 관직을 수행했던 인물이다. 다니엘서는 그의 꿈과 환상 그리고 그 해몽을 통해 그가 하던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는 당대 박수들과는 달리 정보를 활용할 줄 알았다. 오늘 날의 엘벤 토플러나 피터 드러커 정도 될까? 그는 자기가 살던 시대를 중심으로 수백 년의 세계 정치·경제·행정을 내다보았다. 그렇게 주로 그가 섬긴 왕들과 정권의 카운슬링을 담당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그의 자아를 통해 인식되고 나타났다. 즉, 다니엘은 자신의 자아(EGO)를 통해 세계(ECO)를 내다봤던 것이다. 

특히 인자(人子)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자아가 그를 통해 인식되었다.



(2) 그리스도는 자아(EGO)를 통해 성령(ECO)을 보내셨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아로서 이 땅에서 충실한 자신의 생애를 사시고, 이어서 그의 제2 자아로서 성령을 보내셨다. 포스트 보.혜.사. 즉, “또 다른 보혜사”란 그 뜻이다. 이미 자신의 EGO는 보혜사인 것이다. (둘째 아담, 다윗의 자손, 새 모세, 人子.., 다 그의 EGO에 관한 다른 말들이다.)



(3) 바울은 성령 받은 자아(EGO)를 통해 교회(ECO)를 설립해나갔다. (엡 1:11-23)



바울의 자아는 확실하게 성령 받은 사실을 인식한다. 성령 받은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방언으로 아나? 통역과 예언으로 아나? 느낌(feeling)으로 아나? 무엇으로 그것을 아나? 교회라는 ECO를 통해서만 <성령 받은 나의 EGO>를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 우리는 박수나 무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니엘처럼.



(4) 복과 화(ECO)는 자아(EGO)를 통해 임한다. (눅 6:20-26)



금주의 성서일과표(Lectionary) 마지막 성구는 두 개의 ECO(환경)을 제시한다. 복과 화. 전자는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의 EGO를 지닌 사람들이 들어가고, 후자는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의 EGO가 들어가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5) 에필로그


친일, 신사참배, 독재, 이것들을 동의어로 사용하는 목회자들이 김준곤의 CCC도 군사정권 부역의 산물로 부정하는 역사인식의 동향을 보면서 나는 그들의 EGO를 측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지닌 EGO의 모든 혈액을 통째로 뽑아낼 기세로 달려들던 사람들이 금번 WCC에 가서는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내면서 변증하는 모습을 보고서 뿜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비록 환관이었지만 - 그가 자신의 EGO를 살리려고 환관이 되었는지 민족의 EGO를 생존시키기 위해 환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자신의 후세들이 마음껏 배타적 제2성전 시대를 향유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은 자신의 꿈과 함께 그렇게 스러져 갔다.


훗날 이 배타적 제2 성전 시대 주도자들은 ‘사마리아’라고 하는 거대한 열등감을 만들어 놓고는 자기들끼리 칭찬하고 자기들끼리 칭찬 받는 시대를 열게 된다. 


그리스도라는 종말은 바벨론이나 페르샤에 떨어진 게 아니라 사마리아 바로 옆 동네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열등감은 EGO의 아름다움을 좀먹는다.

허영은 EGO의 아름다움을 부패시킨다.


2013.11.3일자, 제목: 계시의 영을 주사 | 엡 1:11-23; 눅 6:20-26. (cf. 단 7:1-3, 15-18; 시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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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3. 10. 31.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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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성서일과(lectionary)를 받아들고는 내가 혐오하던 이씨(氏) 아저씨를 떠올렸다. 


바울이 제사에 쓰는 술처럼 (혹은 피) 주님을 위해 자신을 “붓는다”고 표현했던 말년의 고백, 베드로가 말세에는 하나님이 모든 이에게 영을 부어 주신다며 인용했던 요엘의 예언, 그리고 옆에 서있던 바리새인과는 달리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 쥐어뜯던 세리 이야기(딤후 4:6-8, 16-18; 욜 2:23-32; 시 65; 눅 18:9-14.), 

이들을 읽으며 그 아저씨를 떠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1)


유년시절 자영업 하던 아버지 탓에 많은 어른을 보며 자랐지만, 그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아저씨였다. 귀엽다면서 내 얼굴 가까이 내미는 그의 얼굴에서는 언제나 술 냄새 풍기지 않는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지독한 냄새, 어린 내가 보기엔 아무 할 일 없이 술 냄새만 풍기며 드나드는 것 같은데도 “술 좀 작작 마시라-”고 나무랄 뿐 아버지는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어느 날 시장 통을 지나오는 길목의 주점에 낯익은 모습이 보여 힐끗 보니 이씨 아저씨가 혼자 앉아 있었다. 함께 마주 앉은 사람도 없고 안주도 없었다. 안주도 없이 소주만 마시는 게 어린 내 눈에는 신기해 보였다. 잠깐 서서보고 있노라니 아저씨는 술이 아직 남은 소주병을 술집 아주머니에게 맡겨 놓는 것이었다. 오가며 딱 두 잔씩만 마신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으며 알콜 중독자는 폭음보다는 소량의 알코올을 항상 마신다는 사실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렇게 술만 마시다보니 젊은이들은 그를 무시했다. 아버지의 일꾼 중 어떤 형은 그 아저씨와 무슨 다툼이 있었는지 순간 그를 번쩍 들어서는 대형 쓰레기통에 처박으려고까지 하는 걸 보았다.


가정도 건사될 리 없었다. 아내가 도망갔기 때문에 술을 마시게 된 것인지 술을 마셨기 때문에 아내가 도망간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씨 아저씨는 그렇게 언제나 혼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회사 여러 사람들이 그 아저씨 집에 초대되어 가는 기이한 일이 있었다. (적어도 내가보기엔 기이했다.) 언제나 혼자였던 그 아저씨 곁에 아주머니 한 분도 계셨다. 떠났던 아주머니가 돌아온 것일까 새 아내를 맞은 것일까 (아마 전자가 맞을 것이다) 식사 후 반주와 함께 여흥이 돋자 아저씨는 갑자기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백구야~~배~액구야~아~~ 백구야”


‘백구야’가 도대체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이씨 아저씨 모습은 전에도 보지 못했고 후에도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또 혼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대포집에 홀로 앉아 한두 잔씩 홀짝홀짝 마시는 게 보였다. 술을 끊지 못해서 아주머니가 떠났는지, 아주머니가 떠나서 술을 마시는 것인지 이번에도 알 수 없었지만 이씨 아저씨는 그렇게 죽어갔다. 한 2년쯤 뒤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2)


이렇게 사람 망치는 술이 없었던 적은 없다. 금주를 법으로 제정한 군주들이 있기는 했지만 성공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마 영조가 가장 세게 그 법을 강제했을 것이고, 미국은 1900년대 초에 강하게 시행했던 것으로 아는데 모두 다 밀주 만드는 사람만 배불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표적인 예가 알 카포네다.


뿐만 아니라 술은 성서의 오랜 제사법에도 포함되어 있으며 신약에 와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성만찬은 술의 예전 아니었던가.)


오순절 강림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 중 일부는 성령 받은 이들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였는데, 베드로는 취한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영을 “부어 주신 것”이라는 표현을 쓴다(행 2:17-18). 


그리고 무엇보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술처럼 “(벌써) 부어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이 지닌 메타포는 공교롭게도 술이다. 새 술이 맞다. 사람의 혈액에 술의 기운이 닿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처럼 성령을 받은 사람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자녀와 젊은이는 늙은이의 꿈을 통해 양육 받는다. 젊은이가 늙은이를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는 일 따위는 발생하지 않는다. 다른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그 영을 받은 모두의 생애가 완전히 그 영이 꾀하는 일에 “부어진다”라는 점에서 성령은 언제나 소명과 결부되어 성서에 나타난다.


(3)


나는 설교를 위해 그 소명의 삶들을 예시로 준비하였다. 자기가 하는 일을 위해 자신의 몸을 물처럼 피처럼 남김없이 부은 사람들의 예시.


IT시대의 중독자는 3박4일 게임만 하다가 죽기까지 하지만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은 자기 삶을 그야말로 “부은” 자의 좋은 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문의 주인공 바울. 두 말할 나위 없이 “부어진” 최상의 예다.


그러나 설교에 직면한 순간에 성서일과 중 가장 끝자락 누가복음 말씀이 나를 짓눌렀다.


성경에서 말하기를 바리새인 옆에 있던 세리는 하늘을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했다고 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가슴만 쳤다고 했다. 바리새인은 하늘을 상대적으로 “감히” 올려다보는 모든 자를 말한다. “감히”가 무엇을 말하는가.


내 삶은 언제나 바울인 것처럼, 언제나 스티브 잡스인 것처럼 회자하며 기도하고 설교하는 나, 전혀 저런 알콜 중독자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노라고 자신하는 나는 바로 그 ‘감히’ 하늘을 향해 고개 드는 자, 즉 고개 빳빳이 든 그 바리새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누구도 이씨 아저씨와 같은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 본인조차도. 


성경은 너는 <그런 삶을 살지 말라>고 교훈하기도 하지만, 그 깊은 기저에는 너는 <그런 삶을 살지 말라고 말하는 그 교훈을 파괴>한다.    


(4)


언제나 장례가 빈번할 수밖에 없는 교회들. 교회에서 신앙 없는 이들에 대한 장례가 맡겨졌을 때 다소 난감해하는 표현 역력한 것은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다. 명백하게 구원받지 못했다고 판정된 사자(死者)에 대해서는 드러내 표현은 않지만 매우 편파적 장례식이 치러진다. 아예 ‘천국환송식’이라는 활자로 인쇄하기도 한다. 그러면 불신자의 장례는 “지옥환송식”인가? 


나는 언제나 공교롭게도 장례식 기도에서 한결같이 다음과 같은 기도 논조를 유지해왔다. 더하지도 감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삶에 사력을 다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의무를 모두 이행했던-”


이 기도 논조는 알코올 중독자 이씨 아저씨의 사망 앞에서도 읽혀야 했던 문장이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치열한 삶을 다 마쳤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판까지 하려는 경향에 휘말린다.


(5)


결국 나는 설교 말미에 “이씨 아저씨처럼 되지 말자”가 아니라 “이씨 아저씨처럼 되지 말자고 했던 우리의 태도를 반성하자”로 끝맺고 말았다.


왜냐하면 바울이 자신을 전제로 부은 삶,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를 부은 그 역사가 바로 이 노선에 베이스를 깔고 있다는 급하고 강한 이끄심 때문이었다. 


가끔 우리는 그들을 오늘날의 세계적인 목사나 부흥사의 형상으로 착시를 일으킬 때가 있다. 그러나 성령에 취한 그들은 세상이 보기에 이씨(氏) 아저씨의 형상이었을 것 같다. 스스로를 만물의 찌꺼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다른 말로 하면 그 가시적 교훈에 대한 파괴가 새 술의 본질적인 기운이었던 것이다.

나도 새 술에 취했는 지는 알 수 없도다-



2013.10.27일자. 본문, 딤후 4:6-8, 16-18. (cf. 욜 2:23-32; 시 65; 눅 18:9-14.)

이미지 참조: https://cartoonimages.osu.edu/index.cfm?fuseaction=collections.seeItemInCollection&CollectionID=02d5386b-a575-4bfa-8005-cf676fd41345&ItemID=694fd8b8-3210-4dc0-8e03-aa0c256643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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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talogia
말씀 속에서2013. 10. 24.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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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avaggio 1573 – 1610


프롤로그 | 여름 실과 한 광주리.


다음은 아모스의 한 대목입니다.

8:1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여름 실과 한 광주리를 보이시며 8:2가라사대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가로되 여름 실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하리니 8:3그 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시체가 많아서 사람이 잠잠히 처처에 내어 버리리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8:4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8:5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8:6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 8:7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내가 저희의 모든 소위를 영영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8:8이로 인하여 땅이 떨지 않겠으며 그 가운데 모든 거민이 애통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하수의 넘침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같이 뛰놀다가 낮아지리라 8:9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해로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 8:10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 모든 사람으로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 하게 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8:11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8:12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8:13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암 8:1-13)

여기 나타나는 주요 어휘들을 상징해석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프린서플 | 한 가지면 충분하다.


“여름 실과”하면 무더운 날씨에 싱그러운 과일을 연상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해석은 다르게 합니다. 그것을 부패가 임박한 익은 과일의 상태로 보는 것입니다. 최초의 문서 예언자였던 아모스가 본 여러 가지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여름 실과 한 광주리였습니다. 그 실과의 부패의 결국이 전쟁으로 임했습니다. 


“월삭”은 번제의 절기였습니다. 이와 같은 종교적 절기란 모든 상업적 행위의 금지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민 28:11, 왕하 4:23). 이때가 되면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 수 있을까.” 종교적 절기가 생활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현상입니다.


“안식일”의 목적은 쉬는 것입니다. 쉰다는 의미는 쾌락을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쉬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쉬는 것은 예배를 뜻합니다. 예배를 아예 노동으로 가르치는 영적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 아무 쉼의 예배가 준비되고 열렸더라도 그것을 노동행위로 인식하고는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 그들의 영성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안식일 준수의 질은 그 사람과 시대의 영성을 반영하는 중요한 척도입니다. 아모스 시대에는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하며 안식일이 빨리 지나가기 만을 바라는 세태가 도래했습니다.


이들 모두 여름 실과 현상입니다.


“에바”는 곡식을 다는 계량 단위입니다. “세겔”은 은을 다는 단위입니다. 에바를 작게 함으로써 세겔의 중량 수가 더 커질 수 있도록 고쳤습니다. 곡식을 파는 이들이 곡식은 적게 주고 은은 더 받으려는 조작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잿밀” 즉 밀의 찌끼처럼 먹지 못할 것을 가난한 자와 같은 약자에게 팔았던 것이 바로 여름 실과, 즉 임박한 종말의 세태였습니다.


“야곱의 영광?” 옛날의 추억이나 전설의 용어쯤으로 전락되어 버린 야곱, 이스라엘의 영광.., 바로 그 영광의 출현을 이들 모든 세태가 직면하게 되는데, 그 날에는 태양이 한 낮에 사라지져 캄캄하게 되며 절기는 애통으로, 모든 노래는 애곡으로..., 마치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 하게 된다고 예언합니다.


그리고는 가장 최종적 재앙이 도래합니다.


기근입니다.

그 기근의 형식은 다음과 같으며, 여기서 이 유명한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에필로그 | 마르다와 마리아.


예수께서 일 안하고 말씀만 듣고 앉아 있는 마리아를 답답하게 여겨 타박하는 마르다에게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하고 타이르신 말씀이 바로 이 아모스 8:1-12에 대한 주석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교회는 각종 액티비티가 즐비하죠. 노인학교도 해야하고, 새가족 VIP 모실 준비도 해야하고, 그러다 보면 “읽고”, “듣고”, “쓰고”, “말하기” 라는 말씀의 본령에 소홀하게 마련입니다. 그들이 바로 마르다 입니다. 여름 실과 한 광주리 인 것입니다. 마르다가 보기에 마리아는 태만하지만 말씀의 본령에 충실한 자의 태도 입니다.


따라서 <마르다>가 신앙적 흉악범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두려운 것입니다.




2013년7월21일자 설교: 한 가지면 충분하다 | 눅 10:38-42 (c.f. 암 8:1-12; 시 52; 골 1: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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