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2.08.18 넝쿨이 빨아당기는 힘 2
  2. 2012.05.08 죽음 직전의 회상에 관하여
  3. 2012.04.14 부활의 다듬어짐
일상 속에서2012. 8. 1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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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오르던 산 속 나무숲이 마치 정글처럼 보여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무마다 넝쿨들이 휘감아 있다. 저렇게 높은 길이를 지난 몇 달 새 다 휘감아 올라갔다. 기둥이 되어 준 나무라는 식물도 그렇지만, 한해살이에 불과한 저 식물들의 흡입력이 더 놀랍다. 여러 해가 아닌 단 몇 달 새에 자신의 키를 다 흡입한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식물이지만 이들에게 프쉬케가 없는 게 아니다. 프쉬케의 가장 기본 능력인 섭생능력을 토대로 살아간다. 생명흡입, 섭생능력 곧, 영양섭취의 힘은 아래로부터 위로 밀어 올리는 힘인가 위에서 빨아당기는 힘인가? 그러면 이들의 영혼은 뿌리인가 아니면 그 줄기와 잎의 끝인가? 또한, 그런 점에서 이들의 영혼은 부분인가 전체인가?

죽은 것에는 흡입력이 없다. 공기도 물도 들이마시지 못한다. 죽은 나무와 풀에 흡수되는 물은 스며드는 것이지 섭취된 것이 아니다. 아무리 많이 스며들어도 그것은 썩을 것이다. 이것으로 생명을 판단한다.

우리 신체의 영혼의 힘은 끌어당기는 힘인가, 밀어 올리는 힘인가? 넝쿨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부분인가 전체인가? 심장과 압력이라고 말하겠지. 압력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호흡, 곧 영양섭취로서 프쉬케의 힘이 근원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예컨대 기독교 정체성 속에 행해지는 금식은 신에게 부려보는 투쟁도 아니고 극기와 맞바꿔 얻어내는 마술의 힘도 아니며, 그것은 바로 가장 기본이 되는 그 섭생의 프쉬케를 불러 깨우는 노력인 것이며, 그 프쉬케가 대기 중에 흩어진 프뉴마(바람)와의 운동일 때 의미가 있다. 이 유일한 운동력이 아니면 어떻게 (1) 풀고, (2) 끌러주고, (3) 자유케 하고, (4) 꺾는 모션을 불러일으키겠는가?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

따라서 우리가 굶을 때 - 그것은 의도적인 단식일 수도, 가난함의 주림일 수도 있지만 - 우리는 죽음과 거의 동시에 생명의 힘을 체험한다. 혀의 감각에서 비롯되는 시장기와는 다른 영혼으로부터 밀어 올리고, 끌어당기는 허기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라”는 통찰은 지당한 것이다. 이 섭생이 영성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면서도 관문과도 같은 영혼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에게 친근한 허기는 영양의 굶주림이라기보다는 감각 혼, 즉 탐욕의 허기에 더 가깝다는데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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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 속에서2012. 5. 8.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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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직전의 회상은 죽음인가 생명인가.
죽음의 임박에 따른 두려움은 미래에 관한 고통인가 과거에 대한 고통인가.
임박한 죽음의 두려움이 과거에 따른 고통이면 삶은 생명이며 미래에 따른 고통이면 삶은 죽음이다.
그렇기에 삶과 죽음은 나눌 수도 합칠 수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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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 4. 14.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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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늑대소녀

1920년 10월 인도에서 한 목사 부부가 아말라(2세)와 카말(8)이라는 두 여자 아이를 늑대 굴에서 구출하여 양육한 일이 있습니다. 발견될 당시 이 아이들은 모습만 사람이었지 행동은 완전히 늑대였다고 합니다. 두 부부의 헌신적인 노력 끝에 이들은 서서히 걷기를 배웠고, 울부짖는 소리 대신 말을 배웠고, 어둠을 싫어하고 빚을 찾게 되었으며, 날것이 아닌 익은 음식을 좋아하게 되었고, 사람들에게 정도 느껴 의지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아말라는 아이는 이미 1년 이내에 죽었고 카말라는 그로부터 9년 후에 죽게 됩니다. 두 손으로 그릇 잡는데 1년 반, 꼿꼿이 설 수 있는데 1년 반, 그리고 5-6세 수준의 언어가 죽기 전까지 9년 동안 배운 전부였습니다. 인간이 그 특유한 기능을 개발하지 못하고 다른 습성에 길들여지면 차라리 백지 상태에서 형성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시간도 훨씬 오래 걸린다는 보고로서 예이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은 결국 일종의 그들의 사인(死因)이 된 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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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부활은 다듬어질 때 이룰 수 있는 것. 다듬어지지 않은 자들에게 부활이란?

오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고의 절기인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절이 오늘만 있는 건 아닙니다. 지난해도 있었고 내년에도 올 것이며 매해 그렇게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맞는 이 부활주일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유일한 날입니다. 그러므로 올해 부활절에 내가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이 부활절에 내가 술친구와 더불어 마시고 있다면 이 부활은 영원히 술친구와 함께 한 부활이며, 이 부활주일에 내가 온전한 성만찬의 의미에 응하고 있다면 이 부활은 그렇게 영원히 남습니다. 이러한 반복(mimesis)을 통해 우리의 부활은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첫째, 부활은 고통을 통해 다듬어집니다.

유아에서 아동으로, 아동에서 청소년으로, 청소년에서 청/장년이 되어가는 것은 결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과 학교를 오가면서 사회로 진입할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하게 되는데 “교육”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것은 한마디로 고통, 곧 통증입니다. 이 통증의 고충을 상당량 부모님들이 받아내 줍니다. 이 고통을 이해해 주시는 분들을 우리는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이 과정을 간과했을 때 삶에 들이닥치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는 이미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상적으로 사회에 진입한 사람들 중에 어릴 때의 고충을 통증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로 가는 고통입니다. 

둘째, 부활은 죽음을 통해 다듬어집니다.

부활의 전제는 죽음입니다. 죽음을 전제 하지 않으면 부활은 존재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사회에서 이해하는 살상(殺傷) 개념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생명으로서 죽음 입니다. 죽을 것만 같은 어머니들의 해산의 고통이 생명과 맞닿고 있는 이치입니다.

셋째, 부활은 생명을 통해 다듬어집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죽이고 싶다는 생각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은 모두 살상입니다. 부활이 고통과 죽음을 통해 다듬어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은 모두 살고 싶어 하지, 죽고 싶다는 속성은 아예 갖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간절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죽고 싶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이와 같이 살고 싶은, 생명력을 통해 우리 부활이 다듬어집니다.


에필로그 | 다듬어지지 않은 자들에게 부활은 전혀 행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과정이 일체 필요가 없는 분이신데 우리를 위해 몸소 보여주심으로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다듬어진 자들만이 부활과 그 너머에 있는 세계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자들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이 과정 없이는, 이 과정이 전혀 없는 그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의) 부활이란 뒤늦게 다듬기에도 아주 더디고, 그리고 그것은 도리어 그의 사인(死因)이 되고 말 것입니다. 늑대소녀들에게서처럼.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4월8일 부활주일
본문, 마 28: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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